무관의 투수왕 '한용덕'

2006. 9. 27. 1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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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은식 기자]

▲ 한용덕
ⓒ2006 한화 이글스

4년 연속 우승을 비롯해 모두 25년의 프로야구 역사에서 열 번의 우승을 독점했던 김응용 감독을 제외한다면 다른 누구에게도 밀리지 않을 기록들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김영덕 전 이글스 감독이다.

그는 OB 베어스를 이끌고 그 뒤의 어떤 우승과도 바꿀 수 없는 초대 우승감독의 영예를 차지했고 또 5할9푼6리라는 페넌트레이스 최고 승률을 구가하며 최초의 통산 500승을 경유해 712승의 기록을 남겼다.

그뿐인가. 그의 휘하에서 박철순은 22연승의 금자탑을 쌓았고 이만수는 트리플크라운에 올랐으며 송진우는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역사에 유일무이한 기록들만 모아도 손가락이 심심치 않을 지경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기억 속에서 그의 무게가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기록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기록 때문이다. '비난은 잠깐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던, 기록에 대한 그의 비뚤어진 집념 때문이다.

타율부문 경쟁자인 홍문종에게 7연타석 고의사구가 던져지는 것을 보며 민망해했던 이만수가 그랬으며, 이기는 경기에서 선배 한희민을 5회에 밀어내고 마운드에 올라 승수를 챙겨야 했던 송진우가 그랬다.

기록에 대한 김영덕 감독의 집착은 그렇게 선수들의 자존심과 스포츠정신 그리고 팬들의 순수한 열정과 사랑에 얼룩을 남겼다. 그리고 절대 잊힐 수 없는 자랑스러운 최초의 대기록들에 '사실 이 기록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면…'이라는 보이지 않는 꼬리표를 달아놓고 말았다.

스포츠가 스포츠인 것은, 단지 '최선을 다해', '이겨야 한다'는 단순하고 순수한 논리 때문이다. 그 안에 복잡한 계산과 복선이 깔리고 그것이 승부의 논리를 흐리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스포츠가 아니다. 그래서 포스트시즌 상대를 고르기 위한 져주기 게임을 관전하는 것은 환멸 그 자체이며, 승리소감을 묻는 질문에 '당연히 이길 팀을 이겼을 뿐'이라며 이죽거리는 '타격천재'의 인터뷰는 꼴불견 그 자체다.

스포츠에서 승리의 희열이 고작 가학적 쾌감일 수만은 없는 것이며, 또한 기록이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의 아름다움을 새길 수 있는 도구가 되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연봉 600만원으로 시작한 프로 생활

그러고 보면, 북일고와 이글스에서 내내 김영덕 감독의 그늘에 머물렀던 한용덕의 행로가 '가꾸어진' 기록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은 꽤나 역설적이다. 한용덕은 특이한 존재다. 그가 훌륭한 투수였음을 증명하는 기록들은 무수히 많지만 딱히 한마디로 소개할 '타이틀'은 단 한 개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용덕은 39살까지 17년 동안 2,080이닝을 던지며 통산 10위에 해당하는 120승을 올린 투수다. 그 중에 기록한 16번이나 되는 완봉승은 통산 7위에 해당하며, 1291개나 잡아낸 삼진도 통산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가 던진 이닝수도 통산 3위에 해당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단 한 차례도 개인타이틀을 얻어 본 적이 없었다. 다승은 물론, 방어율, 탈삼진, 어느 쪽이건 단 한 해도 정상의 자리에 서 본 적이 없다.

그는 화려한 투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꾸준한 투수였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투수였다. 그래서 그는 이기는 경기뿐만 아니라 여러 번 지는 경기에서도 던졌고, 118번의 패전으로 통산 최다패전 부문에서도 4위에 올라있다. 그래서 한국 프로야구사를 통틀어서 장기레이스를 위한 투수진을 구성한다면, 선동렬과 최동원으로 구성될 '원투펀치'에는 끼어들 수 없을지 몰라도, 반드시 선발진에 한 자리를 만들어 끼워 넣어야 할 인물이다.

그리 특출 날 것 없는 선수였던 한용덕은 이미 대학교 1학년 때 야구를 그만둔 적이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 때문에 어렵사리 이어왔던 선수생활이었지만, 무릎 관절염을 앓게 되면서 결국 야구를 포기하는 것과 함께 대학도 자퇴를 해버리게 된다.

딱히 운동으로 대성할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그저 그런' 선수였기에 야구에 대한 집념도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리라. 그는 군대를 다녀와서 트럭 운전 보조나 임시 전화선로 가설 같은, 야구와는 조금도 관계가 없는 여러 가지 임시직들을 전전하며 술로 몸을 학대했다고 했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젊음은 오히려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한 법이다.

그러나 그가 완전히 야구를 지우고 산 것은 아니었다. 시간이 나면 발길은 야구장으로 움직였고, 그 어느 날 그는 대전 야구장에서 북일고 시절 은사인 김영덕 감독과 마주치게 된다. 김 감독은 OB와 삼성을 거쳐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와 있었다. 한용덕은 김영덕 감독에게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졸랐고, 그 자리에서 배팅볼 투수로 입단이 결정되었다. 그것이 1986년이었다.

구단이 그에게 제안한 연봉은 300만원이었지만, 김영덕 감독의 배려로 600만원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연습생 신분으로 배팅볼을 던지는 일이었고, 글러브를 비롯한 개인장비는 직접 마련해야 했다. 20년 전의 일이었다고는 해도, 매달 적자를 면치 못하는 생활이었다.

원래 북일고 시절 그의 수비위치는 유격수였다. 그런 그가 프로에서 투수가 된 것은 배팅볼을 던질 것이 아니라면 팀에 굳이 연습생이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매일 수백 개의 공을 던졌지만 뭘 알고 던진 것은 아니었다.

누구에게 친절하게 배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배팅볼에 다양한 구질과 묵직한 구위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저 누구도 걱정해주지 않는 어깨의 통증을 견디기 위한 나름의 투구요령을 터득해가며 우직하게 직구를 뿌려댔을 뿐이다.

그래선지 그의 투구폼은 독특했다. 신인 시절의 박찬호처럼 왼발을 높게 차올리는 '하이키킹'을 하고서도 정작 공을 던지는 상체는 별 움직임이 없었다. 그 시절 투수부문의 모든 타이틀과 기록을 독식하던 선동렬이 오른 무릎이 땅에 닿을 정도로 온 몸을 던지던 동작과는 영 딴판이었다. 그래서 보기에 얼핏 무성의해보이기까지 하는 동작이었다. 확실히 그것은 역동적이기보다는 여유만만하고 능글맞은 것에 가까웠다.

불운의 사고는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 괭이로 마운드를 다듬고 내려오는 한용덕 코치
ⓒ2006 한화 이글스

그것은 비슷한 시기, 비슷한 경로를 걸었던 해태의 송유석이 그랬듯 하루 수백 개의 배팅볼을 던지면서도 어깨와 몸을 버텨내기 위해 체득한 그만의 비법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어딘가 어설픈 동작으로 구속은 빠르지 않으면서도 묵직한 공을 꽂아 넣었다는 것도 두 투수의 닮은점이었다. 그것은 저마다 거친 세월에 다져진 굳은살 같은 여유와 힘이었다.

그렇게 미숙한 공이나마 하나하나 허투루 던지지 않았기에 2년 뒤 그는 정식선수로 등록될 수 있었다. 여전히 던질 줄 아는 공은 거의 없었지만 오로지 묵직한 직구 하나만으로도 쓸모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90년 시즌을 앞두고 일본 전지훈련에서 변화구를 배우면서 투수로서 눈을 뜨게 된다. '사토'라는 일본인 인스트럭터가 가르쳐준 변화구들은 묵묵히 다져온 잠재력에 드디어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 시즌 그는 곧장 13승을 올리며 당당히 주축투수로 진입했다. 그 뒤로 94년까지는 그의 전성기였다. 91년에는 17승을 올렸고, 94년에는 16승을 올렸다. 팀 내에서 가장 많은 승수였다.

한창이던 94년 시즌 중에 겪었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는 조금 더 인상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아내가 운전하던 승용차가 트럭과 충돌하면서 그 자신이 입은 부상도 문제였지만 거의 다리를 잃을 지경에 놓인 아내를 간호하는 일이 급했다. 그로부터 몇 년 간 정돈되지 못한 몸과 마음 탓에 제대로 마운드에 집중할 수 없었고, 이미 서른줄을 넘어선 한용덕에게 그것은 그대로 돌이킬 수 없는 변곡점이 되고 말았다. 그는 다시는 사고 이전의 성적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온실이 아닌 거친 들판에서 밟히며 자란 들꽃의 생명력은 역시 좋을 때보다는 어려울 때 확인되는 것이다. 한용덕은 그로부터 10여 년간 그야말로 이글스 마운드의 마당쇠로 활약했다. 정상의 자리를 바라보며 힘을 내는 것은 사실 많은 이들이 하는 일이다. 그러나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는 내내 한 순간도 주저앉지 않고 분투하는 것은 보기 쉬운 일이 아니다.

95년은 한용덕 뿐만 아니라 '페넌트레이스 최강' 이글스의 슬럼프가 시작된 해였다. 타선에서는 장종훈의 홈런신화가 이어졌고 마운드에서는 정민철이라는 특급 선발과 구대성이라는 특급 마무리가 나타났지만 팀의 성적은 바닥권이었다. 95년부터 98년 사이 이글스는 두 번의 6위와 한 번의 7위로 주저앉았다.

한용덕은 선발과 계투를 가리지 않았고 이기는 경기와 지는 경기를 의식하지 않았다. 비록 구위는 이전만 못했고 해마다 승수보다 많은 패전 수를 쌓아가야 했지만 그는 꾸준히 100이닝 이상을 던졌다. 선발로 던지다가 후배 이상목의 컨디션이 회복되면 다시 계투로 물러앉았고 그러다가 구대성에게 고장이 생기면 마무리로 출격하기도 했다. 게다가 심심치 않게 지고 있는 경기를 마무리하러 나서기도 했다.

그는 기록과 타이틀에 미련을 두지 않았고 감독 눈치를 보는 것 같지도 않았으며, 때로는 팬들을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를 움직이는 것은 오로지 마운드에서 최대한 오래 버티며 최대한 많은 상대 타자들을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그의 플레이는 화려하지 않았지만 내내 단순하고 담백했다.

야구선수 다운 모습 보인, 한용덕

▲ 은퇴식에서 김인식 감독과 함께
ⓒ2006 한화 이글스

그의 등번호는 40이었다. '40세까지 선수로 뛰겠다'는 그의 소박한 목표를 담은 숫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2004년 겨울 만 서른 아홉의 나이로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구단은 그를 방출해버렸고 한 해 더 뛰고 싶은 마음은 결국 그쯤에서 접어야 했다. 그러나 누구보다 값지게 이어온 선수생활이었고 돌아보면 완전 연소시킨 열 일곱 시즌이었다.

이듬해 구단은 방출되는 과정에서 은퇴경기도 갖지 못했던 한용덕을 위해 은퇴식을 열어주었고 투수코치로 불러들였다. 그 자신, 타고난 재능과 조건 대신 하나에서 열까지 몸으로 부딪히며 터득한 것들을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것이 이제는 그의 일이 되었다.

올 시즌 이글스는 상당히 매력적인 마운드를 구축했다. 신인 류현진과 고참 문동환이 구성한 8개 구단 최고의 '원투펀치'와 그들을 뒷받침하는 '살아있는 역사' 정민철과 송진우로 구성된 선발진 그리고 '재활선수' 조성민과 지연규를 통해 이어지는 또하나의 국보급 마무리 구대성. 최고는 아니지만 하나하나가 이야깃거리를 간직한 채 분투하는 흥미롭고 또 끈끈한 라인업.

물론 그것은 마운드 운용의 귀재 김인식 감독과 역대 최고 투수중 하나인 최동원 코치의 작품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어쩐지 그 잡초냄새 가득한 진용에서 한용덕의 분위기를 읽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야구장에서마저 흑막이니 음모니 혹은 학연이니 무어니 하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 피곤한 시절. 한용덕이라는 단순한 사내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느끼는 것은 묘한 청량감이다. 기록과 타이틀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혼신을 다한 플레이 끝에 남은 땀 배인 기록들을 보는 신선한 감동 말이다.

야구는 역시, 야구다워야, 야구다.

/김은식 기자

덧붙이는 글CBS라디오 표준FM (98.1MHz) '파워스포츠'(월~토 21:05 - 21:30)의 '(김은식의) 야구의 추억' 코너에서도 방송되고 있습니다기자소개 : "솔직해지기 위해서, 모른 체 눈감고 살기를 좋아하는 제 머리와 싸운 흔적을 글로 남기고 있으며, 그렇게 쓴 글은 개인홈페이지 '솔직해지기 위한 투쟁'(www.kes.pe.kr)에 모으고 있습니다. 2002년 5월부터 11월까지 '맛있는 추억'을 연재해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에 선정되었으며, 그 글은 동명의 산문집으로 엮여지기도 했습니다. ("맛있는 추억", 자인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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