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KBL History] 그때 그 선수 (왕수진) - 여자프로농구 10년사

글·사진 민희정 기자 2007. 11. 9.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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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장이 중요시되는 농구에서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수 있는 것은 엄청난 응집력과 체력을 초월한 정신력, 그리고 3점슛이었다. 3점슛이 생긴 이후, 한국에서는 스크린을 이용해, 패턴을 이용해 허를 찌르는 3점슛을 연마했고, 이는 국내대회는 물론 국제대회에서도 큰 힘이 되었다.

3점슛하면 떠오르는 선수가 누가 있을까...? 현재 리그에서는 김영옥, 김경희, 변연하, 김은혜등을 꼽을수 있다. 프로리그가 시작된 후 팬들에게 3점슈터로 각인됐던 선수를 꼽자면 여러 선수가 있겠지만 『왕수진』은 반드시 거론해야 할 선수다. 프로리그 통산 한게임 최다 3점슛 기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왕수진은 99년 WKBL 여름리그 신세계전에서 무려 11개의 3점슛을 기록했다. 당시 17개를 시도했으며, 해당 게임의 성공률은 64.7%에 달한다.

사실 왕수진은 고교 졸업시 큰 주목을 받지못했다. 삼성생명에 같이 입단한 한현선이 주목을 받았으며 한현선은 그 해 신인상을 거머쥐었다. 입단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으나 서서히 자신의 진가를 알렸다. 또한 98년 SK증권이 해체되면서 지금은 WKBL TV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는 같은 포지션의 유영주가 입단했으나, 왕수진은 자신의 고유영역인 슈터자리에서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물론 유영주와 왕수진의 플레이 스타일은 차이가 있다. 유영주는 3점슛도 정확했지만, 골밑플레이에도 능수능란했고, 왕수진은 외곽에서 주로 플레이를 했다.) 입단 당시 초특급 선수로 불렸던 변연하가 유영주, 왕수진에 밀려 식스맨으로 활약했으니 왕수진의 슛이 얼마나 위력적이었는지는 짐작할만 하다. 왕수진은 10점대 중반의 평균득점을 올리며, 삼성생명의 우승에 힘을 실어주었다.

2000년 4월, 프로 6구단 금호생명이 창단하면서 왕수진은 팀을 옮기게 된다. 금호생명의 첫 주장이 된 왕수진은 모래알같은 팀을 이끌었으나 금호생명은 1승 19패라는 최악의 성적에 머물렀다. 그 후,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 참가, 시드니 4강의 쾌거를 이룩했다. 주전멤버는 아니었지만 주어진 시간에 슈터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다.

그러나, 왕수진은 시드니 올림픽이 끝난후 팀의 권유에 은퇴하게 된다. 발목부상때문이었다. 당시 왕수진의 나이가 28살. 수술후 재활을 통해 충분히 더 뛸 수 있는 컨디션이었으나, 금호생명은 은퇴를 권유했고, 왕수진은 끝내 은퇴를 결심하게 된다.

왕수진은 찬스를 잘 잡는 선수였다. 움직임이 많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슛타이밍이 좋은 선수였다. 또한 오픈찬스에 강해, 속공시에 3점슛을 맡길 수 있는 장점을 가진 선수였다. 무엇보다 성실한 연습자세와 기복없는 플레이가 팀에 믿음을 주었다. 너무 일찍 은퇴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요즘처럼 평균득점이 줄어든 WKBL의 경기를 보고 있노라면 왕수진 선수의 시원한 3점슛이 그리워진다.

사진 민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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