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배구

[농구100주년] 100주년 공로상 수상자들은 한국 농구 이끈 전설들

손대범 기자 입력 2007.11.26. 15:21 수정 2007.11.26.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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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농구 100년을 기념하는 100주년 기념행사가 11월 26일, 잠실학생체육관에서 열렸다. 지난 100년간 발전해온 한국 농구를 기념하고, 또 앞으로의 발전을 기원하기 위한 이날 행사에서는 그간 농구 발전에 이바지해온 농구인들에 대한 공로패 수상도 있었다. 주요 공로패 수상자들은 어떤 인물이며,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정리해보았다.

이상백(1904~1966) · 대학농구 창설자

이상백은 한국뿐 아니라 일본의 농구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다. 대구 출생의 이상백 박사는 대구고보를 거쳐 일본 와세다대학교 부속 제일고등학원을 졸업, 1924년 와세다대학교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그가 농구와 본격적으로 연을 맺은 건 같은 해 일본에서 대학농구연맹이 결성되면서부터였다. 와세다대학 농구단 감독으로 올라선 이상백 박사는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농구가 채택되도록 노력하는 한편, 이성구, 장이진, 염은현이 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할 수 있도록 이들을 적극적으로 알렸다. 또, 그 역시 농구심판으로 뽑혀 일본 국제심판 1호로 등재됐다. 매년 봄, 한국과 일본에서는 그의 업적을 추모하기 위해 '이상백배 대학농구대회'가 개최되고 있다.

이성구(1911년~2002년)·한국농구의 아버지

'한국농구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성구는 한국농구 근대화에 누구보다도 힘써왔던 인물이다. 1911년 충남 천안출생으로 휘문고보와 연희전문(현 연세대)를 거쳤으며, 초창기 농구가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는 데 백방으로 노력했다. 1936년에는 염은현, 장이진과 함께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농구선수로서는 사상 최초였다. 45년에는 대한농구협회를 창립해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했으며, 60년대말에는 외국인코치(찰스 마콘 주한미8군 소령) 영입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대표팀의 기량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84년 한국농구코치협회 회장, 98년 WKBL 초대총재를 지낸 것을 비롯, 대한체육회 이사, 연세체육회 부회장 등 체육행정가로도 활발히 활동했던 이성구 선생은 문화포장, 국민훈장 목련장, 대한민국체육상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또, 고령의 나이에도 농구를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관심을 보이며 농구전술서 「농구의 기본적 배경. Winner Basketball」을 99년에 펴냈다.

김정신(1919~2001)·한국은행 농구단의 산파

김정신은 1919년 평양에서 태어나 평양 광성고등학교와 서울 연희전문대학을 다니며 농구선수생활을 했다. 그는 일제시대에도 전조선 대표선수로 뽑힐 만큼 두드러진 실력을 과시했으며 해방후 48년 런던 올림픽과 52년 아시안게임땐 당당히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그는 이미 49년 한국은행 남자팀 창단멤버로 은퇴 후엔 감독을 역임했으며 56년엔 한국은행 여자농구팀을 창단하여 초대 감독을 맡는 등 한국은행 농구단의 산파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56년 멜버른 올림픽때는 37세의 나이로 대표팀 사령탑을 맡아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농구협회 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그의 아들인 KBL 김인건 경기본부장은 연세대와 한국은행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등 아버지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 부자 농구선수로도 유명하다.

전규삼(1915~2003)·스타 가드 양성한 농구계의 마에스트로

전규삼은 '송도'를 가드 명문으로 탄생시킨 주역이다. 1915년 개성 태생으로, 엄격한 지도자상보다는 따뜻하고 인간미 넘치는 가르침으로, 감독보다는 '할아버지'란 호칭으로 제자들에게 다가갔으며, 유희형, 김동광, 이충희, 강동희, 홍사붕, 신기성, 김승현 등 수많은 국가대표 가드를 배출해 한국농구의 발전을 도왔다.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일본 동경의 법정대학에 유학을 다녀온 후, 개성 송도고의 교사로 재직하며 농구지도자로서의 길을 걸어왔다. 이후 전옹은 한국전쟁을 피해 월남, 61년 인천에 송도중·고를 개교해 다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송도중고에서 본격적으로 농구코치로 나선 것은 66년의 일이었다.

조득준(1915~1958)·한일농구 장악한 당대 최고의 센터

조득준은 숭인상업을 졸업한 당대 최고의 센터였다. 국내에서뿐 아니라 일본과 캐나다 등을 상대하면서도 대단한 기량을 발휘했다. 특히 40년에는 조선농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출전한 캐나다 농구대표팀 초청경기에서 맹활약하며 팀의 29-27, 역사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또, 1938년부터 1940년까지 3대회 연속 전일본종합농구선수권대회를 평정하는 보전농구부의 주력센터였다. 더 대단했던 건 그 이후 일본 릿쿄대학으로 유학을 가서도 같은 대회에서 3년간 또 우승을 시킨 것이다. 그러나 조득준의 농구인생은 애석하게도 큰 업적만큼이나 짧았다. 58년 택시로 귀가하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84년 올림픽에서 여자대표팀을 은메달로 이끌었으며, 현재 서울 삼성 단장을 맡고 있는 조승연씨의 부친이기도 하다.

조동재(1921~작고)·아시아농구연맹 사무총장 역임한 국제통

조동재는 21년 서울에서 태어나 40년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나 학병지원을 거부하다 제적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하지만 뛰어난 어학실력 덕분에 해방후 정부의 국외홍보업무를 담당했고 54년 아시아재단 한국지부 창설때 초대총무를 맡아 각분야의 후원사업을 전개했다. 그는 특히 체육계를 위해 55년 저명한 농구지도자 존 번 박사를 초청하여 젊은 대학생 위주의 학생군을 조직하여 한국 농구의 근대화에 크게 이바지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농구협회 이사로 취임 국제 섭외업무를 담당했으며 68년-84년 약 16년 동안 아시아 농구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면서 한국 농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84 LA올림픽과 88서울올림픽 당시 경기운영 전반을 책임지는 등 체육계에 남긴 공적이 지대하다.

이병희(1926~1997)·농구를 사랑했던 정치인

이병희는 26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삼일중학- 육사-경희대를 졸업하고 정계에 투신하여 제6대부터 무려 7차에 걸쳐 수원에서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그는 64년 농구협회장을 맡아 뒤늦게 농구에 심취한 뒤 무려 16년 동안 4대에 걸쳐 회장을 연임하며 71년부터 아시아농구연맹회장과 세계연맹 부회장을 지내는 등 농구와 깊은 인연을 맺었고 농구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군출신으로 다혈질의 성격을 지닌 그는 70년 세계선수권대회에 단장으로 나가 브라질과의 경기도중 심판의 오심에 흥분하여 VIP석에서 코트로 돌진하며 욕설을 퍼부어 경비원이 출동하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신재숙(1916~)·한국농구인 동우회 창설자

신재숙은 16년 서울태생으로 중동학교와 보성전문에서 농구선수로 활약했다. 39년 일제시대에 직우농구클럽을 조직하는 등 운동을 계속하다 해방 이후 대한농구협회 재건 준비위원으로 참여하여 농구협회 초대이사를 지냈다. 58년 국제심판 자격을 획득했으며 62년 자카르타 아시안게임땐 농구국가대표 감독으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따냈다. 한국농구인 동우회를 창설하여 초대 부회장을 지냈으며 농구협회 경기위원장, 고문을 역임했다. 현존하는 최고령 농구인으로 지금도 KBL 자문위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윤덕주(1921년~2005년)·한국농구의 어머니

'한국농구의 대모' 윤덕주는 21년 대구에서 태어나 숙명여고를 다니며 농구선수 생활을 시작하여 일제 강점기 최고 스타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남7녀를 낳아 기르며 교사생활을 하기도 했다. 해방이후 농구협회에 관여하기 시작, 농구협회 부회장, 초등연맹 회장, 대한체육회 부회장, 어머니농구회 회장 등을 역임했고 각종 국제대회에 단장을 도맡아 선수들의 뒷바라지에 심혈을 기울였다. 여장부로 불릴 만큼 배포가 컸고 남자 못지 않은 주량을 과시하기도 했다. IOC 공로훈장을 비롯 서울시 문화상, 아산체육상, 조정순 체육상 등 수많은 훈장과 공로상을 받았으며 대한농구협회 명예회장을 지냈다. 타계 하루전에도 여자 프로농구 개막전을 관람하는 등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농구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윤세영(1936~)·프로농구 초석 다지다!

강원도 철원 출생의 윤세영 회장은 서울방송 회장이며, 제13대 대한골프협회 회장임에 앞서 한국 프로농구연맹의 초대 총재로서, 한국 농구가 프로화를 맞아 한 걸음 더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는데 일조했다. 서울고와 서울대를 졸업했고, 96년 프로출범을 준비하던 KBL의 총재를 맡아 2002년까지 이끌었다. 이후에도 KBL의 명예총재로서 농구계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국민훈장 무궁훈장, 일맥문화대상 사회체육상, 제5회 자랑스러운 한국인대상을 수상했다.

김영수(1942~)·농구 국제화 이룬 프로농구 수장

김영수 KBL 3대 총재는 인천 출신으로 서울고-서울대를 졸업하고 65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지검 검사, 국가안전기획부 제1차장, 제14대 국회의원 등의 요직을 거친 뒤 김영삼 문민정부 때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과 문체부 장관을 지낸 정통관료 출신이다.하지만 96년 프로농구 출범때 주무부서였던 문체부 장관으로 행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인연 덕분에 2003년 만장일치로 KBL 수장에 추대되었다. 총재 취임후 한중 올스타전, 한일 챔피언전 등 리그의 국제화에 힘썼으며 유소년 농구교실 육성 등을 통한 저변 확대와 200만 관중 돌파를 목표로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다. 김총재는 또 한국 청소년 문화연구소 이사장을 겸임하여 청소년 문제에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김원길(1943~)·여자농구 부흥 이끈 WKBL CEO

김원길은 경기고-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코스트대학원 과정을 수료, 엘리트코스를 거쳐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서화작가협회장, 도덕운동협의회회장 등을 맡아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경기고 재학시절 복싱-럭비를 했으며 을지로에 있던 한국체육관서 복싱을 연마, 경기에 출전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2000년 한국여자농구연맹 2대 총재로 부임해 제6구단을 창단하는 등 여자농구 활성화에 큰 공을 세웠고 WKBL의 모든 경기를 일일이 관람하는 등 열성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2006년에는 여자농구 100년 역사서인 '96년만의 덩크슛'을 발간하고 여자농구 인터넷 중계를 정착시키는 등 여자농구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박신자(1941~)·한국인 첫 세계대회 MVP·美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

박신자는 미국 테네시주 '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유일한 아시아 선수로 60년대 한국여자 농구의 대명사로 불린다. 그는 41년 서울에서 태어나 숙명여고-숙명여대를 나와 이화여대 대학원, 미국 스프링필드대학 체육학과를 나온 석사학위 소지자이기도 하다. 숙명여고 2학년때 국가대표로 선발된 이후 상업은행에서 은퇴할 때까지 12년간 아시아 농구여왕으로 군림하면서 63페루 세계선수권대회 4위, 67체코 프라하세계선수권 준우승, 67도쿄 유니버시아드 우승 등 화려한 성적을 거뒀다. 특히 11개국이 출전한 67세계선수권대회땐 한국을 2위로 이끌었으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이례적으로 준우승팀에서 대회 MVP를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68년 결혼후 코트를 떠났던 그는 70년대말 지도자로 변신, 신용보증기금 창단감독으로 복귀하였고 88서울올림픽땐 한국 여성 유일의 농구 담당관으로 행정과 외교분야에서 탁월한 솜씨를 발휘하기도 했다.그는 이러한 공로로 농구선수론 드물게 국민훈장 석류장과 5.16 민족상을 수상했다.

김영기(1936~)·한국농구계에 큰 획을 긋다

배재고와 고려대 법대를 졸업했다. 국가대표로 56년 멜버른 올림픽과 64년 도쿄 올림픽에 출전했다. 현역생활은 농업은행과 기업은행에서 보냈고, 빼어난 농구 센스와 개인기를 앞세워 대표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비록 국가대표 시절에는 우승과 연이 닿지 않았지만, 국가대표 감독으로서의 김영기는 우승뿐 아니라 대한민국 농구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이름을 남겼다. 69년 한국남자농구 역사상 최초로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끈 것이다. 또, 70년에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대표팀에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프로농구 출범의 주역으로 KBL전무이사와 부총재를 거쳐 2002년부터 2004년까지 KBL 총재로서 농구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김상하(1926~)·농구 르네상스 연 수장

김상하는 26년 출생으로 경복고와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49년 합자회사 삼양사에 입사한 이래 줄곧 (주)삼양사에 몸담아 현재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사이 12년이나 대한상의 회장을 역임했고 산업연구원 이사장, 한일경제협회 회장등을 지낸 기업인이다. 하지만 그는 경복고 재학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고 85년부터 3대에 걸쳐 12년 동안 대한농구협회 회장으로 재임하며 농구계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특히 농구대잔치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해마다 3억원이상 출연하여 협회 기금을 50억여원이나 조성하였으며 프로농구 출범당시엔 설립준비위원장을 맡아 KBL 탄생의 한몫을 담당했다.

신동파(1944~)·백발백중! 대한민국 슈터의 전설

대한민국 슈터의 전설로 남아있는 신동파. 그는 대한민국 슈터의 시작이었다. 1944년 함경남도 안변 출생으로 63년 휘문 고등학교를 졸업해 연세대학교를 거쳤다. 67년에 중소기업은행에 입단한 신동파는 62년부터 73년까지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한국 뿐 아니라 필리핀, 중국 등에도 그 맹위를 떨쳤다. 특히 69년에 아시아남자선수권대회에서, 70년에 아시안게임에서 대한민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또, 한국이 처음으로 세계대회에 발을 내디뎠던 70년 유고슬라비아 세계선수권대회 8경기에서 평균 32.6득점으로 대회통산 역대평균득점 2위에 이름을 올렸다. 은퇴 후 태평양화학, 여자국가대표팀, SBS 농구단 감독을 역임하였으며, 2002년 9월에 대한농구협회 부회장직을 맡았다. 대한민국체육상, 국민훈장 석류장, 체육훈장 백마장,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상했다.

(사진= 69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대표팀과 김영기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