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2008년 새해 인사

2007. 12. 28.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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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 겸 FIFA 부회장은 2008년을 맞이하여 축구계에 몸담고 있고, 또 축구를 사랑하는 모든 축구가족의 행복과 건강을 기원하며 아래와 같은 새해 인사를 전했습니다. 다음은 정몽준 회장의 인사말 전문입니다.

<2008년 새해 所感>

2008년 새해를 맞는다.

어떤 사람이 "삶은 질문의 연속이며 그 질문에 답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했는데 과연 내 '축구 삶'은 어떠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행복한 나의 '축구 삶'

1993년 1월에 대한축구협회장을 맡아 4번 연임하고 있다. 42세에 취임하여 15년이 지났으니 내 삶의 중요한 시기를 한국 축구와 함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5년동안 축구협회장으로서 즐겁게 일했다. 축구인들은 물론이고 온 국민이 한국 축구를 아껴주신 덕분에 행복한 마음으로 일했다고 생각하며, 모두에게 감사드린다.

외국 언론은 한국 대표팀 감독의 자리를 두고 '독배(毒杯)'니 '무덤'이니 하는 표현을 쓰는데, 축구협회장도 그에 못지않게 어려운 자리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아시아 컵, 아시안게임 등 중요한 경기에서 성적이 부진하거나 탈락하면 회장에게 물러나라고 한다. 심지어 아마추어 팀에서 사고가 나거나 팀이 해체되어도 사퇴하라고 한다.

1964년 동경올림픽 때 한국은 아랍공화국에 10:0, 체코에 6:1, 브라질에 6:0으로 패하는 수모를 당하자 축구협회 회장을 비롯하여 협회 임원진은 즉각 해산됐다.

내가 취임한 후 1993년 10월, 미국 월드컵 최종 예선전이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을 때 우리팀이 일본에게 1:0으로 지자 어떤 언론은 이날을 '국치일'이라고 했다. 결국 마지막 경기에서 우리가 북한을 3:0으로 이기고, 일본이 인저리 타임에 1골을 허용하여 이라크와 2:2로 비기는 바람에 우리가 미국 월드컵 본선에 나가고 일본은 탈락하게 되었다.

일본의 한 신문은 성급하게 '일본 본선 진출, 한국 탈락'이라는 오보를 했다. 한국이 탈락한 것으로 잘못 안 국내의 한 주요 일간지는 취임한 지 6개월밖에 안된 나에게 미국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했으니 "축구협회장은 사퇴하라"고 했다.

2002년 월드컵 대회의 유치를 1994년에 시작할 때 그 배경이나 동기에 대해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되지도 않을 일을 하러 다닌다고 비난했다. 언론에서는, 유치에 실패하면 "이홍구 위원장과 정 회장은 이민을 가야할 것"이라고 했고, 나와 이 위원장이 삭발한 모습을 만평(漫評)으로 그리기도 했다.

2002년 월드컵 유치 신청을 한 한국을 방문한 FIFA 조사단과 함께

3년동안 전세계를 40바퀴 반 이상 돌면서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96년 FIFA 집행위원회에서 어렵게 공동 개최를 이끌어냈다.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고 난 이듬해인 1997년 대의원 총회에서"한 일이 뭐냐"며 회장 입후보를 한 사람도 있었고, 일부 언론은 흥미 본위로 예상 투표를 하여 내가 지는 것으로 보도했으나 투표 결과 상대방은 겨우 2표에 불과했다.

이것을 보고 한심하여 "2002 월드컵 준비만 잘된다면 내가 그만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무책임하다는 말을 들을까봐 그만 두기도 어려웠다.

1996년에 월드컵을 유치한 직후에 우리나라는 IMF 사태를 맞았다. 이런 와중에 우리가 월드컵을 개최할 수 있겠느냐며 2002월드컵을 일본에 모두 주자는 말도 나왔고, 실제로 어느 중앙 일간지의 간부는 칼럼을 통해 월드컵을 일본에 주어버리지 왜 우리가 부담을 갖느냐고 했다.

서울에 축구장을 짓느냐 마느냐는 의견이 서로 부딪힌 적도 있었다. 인천 경기장을 증축하자는 안과 잠실 올림픽 경기장을 개보수하여 사용하자는 의견이 나왔으나 기술적인 문제로 채택되지 않았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을 막 인수한 직후여서 무척 바쁜 때였으나 대통령 집무실에서 면담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 청와대 비서실은 IMF 사태가 한국전쟁 이후의 최대의 국난이라며 서울 월드컵 경기장의 건설에는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서울 축구장 건설이 어렵다는 분위기이지만 어렵게 김 대통령과 면담시간을 얻어냈다. 김 대통령은 집무실 바로 옆방의 원탁 테이블에 앉자마자 "서울에 경기장을 안짓기로 했다. 정 회장은 이해해주기 바란다고"고 말하며 바로 일어서려 했다.

나는 가져간 자료를 보여주며 2002년 월드컵 같은 국가적 대사를 차질없이 준비하고 있다는 국제적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국제 사회에서 국가 신용도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1시간여의 대화 후에 "경기장을 안짓겠다는 결정은 보류하겠다"는 답변을 받아냈다.

당시 한국체육대학의 학장이라는 사람은 "경제가 어려운 판에 축구장을 짓겠다는 것은 축구인들이 우매하기 때문"이라는 내용의 칼럼을 써서 신문에 기고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같은 체육인이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을 안 원로 축구인들은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 사람은 나중에 조직위 사무총장 후보로 추천되었는데, 당사자나 추천한 사람이나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이었다.

경기장을 지을 것이냐 말것이냐와는 별도로, 특정기업에게 돔구장을 짓도록 하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유치위의 책임자가 공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서울시에 공문을 보내, 특정기업에 뚝섬의 서울시 부지를 팔고, 그 회사는 그 부지에 돔구장을 지은 후 월드컵 이후에는 야구장으로 사용하려 한 것이었는데, 서울시는 이런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계약을 했다.

그 계약은 파기되기는 했지만, 조순 서울 시장은 대학시절의 은사이신데 결과적으로 그분을 곤란하게 만들었으니 미안한 마음이었다.

월드컵 공동개최가 확정된 후 환한 얼굴로 거수경례를 하며 감사를 표하는 정몽준 축구협회장

아쉬운 두 번의 올림픽

올림픽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2승1패의 비교적 좋은 성적을 올리고도 8강 진출에 실패한 것은 아쉽다.

2004 아테네 올림픽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올림픽에는 23세 이하 선수만 참가할 수 있고 24세 이상은 와일드 카드라 하여 3명을 출전시킬 수 있다. 2004 아테네 올림픽 당시 한국은 와일드 카드로 이영표, 박지성 두 선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8월의 올림픽 본선 때는 히딩크 감독이 두 선수를 보내 줄 수 없다고 했다.

FIFA 규정에 의하면 우리는 얼마든지 두 선수를 불러올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무리를 해서 데려올 경우, 해외에 진출한 두 선수가 소속 팀에서 불이익을 당할지 몰라 지레 걱정이 되어 두 선수의 차출을 심하게 독촉하지 않았던 것이다.

한국은 8강전에서 만난 파라과이와 한번 겨뤄볼만 했으나 박지성과 이영표 선수가 빠진 가운데 결국 2:3으로 지고 말았다. 이 고비만 넘기면 4강에서 비교적 쉬운 상대인 이라크와 만나게 되어있어 올림픽 축구 결승 진출도 바라볼 수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아쉽다.

대표팀과 프로팀의 긴밀한 협조 필요

독일월드컵을 위해 2004년에 아시아 예선전을 가졌을 때 우리 대표팀은 비교적 약체로 평가되는 몰디브와 베트남에게 고전했다. 이들 팀을 얏본데다가 동계 훈련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코엘류 감독은 자기가 대표팀 훈련을 한 것은 72시간뿐이라고 푸념했다.

핌 베어벡 감독이 물러난 것은 성적이 나빠서가 아니었다. 프로연맹과 일부 구단의 책임자들은 1월에 카타르 전지훈련을 지원하기로 약속해놓고는 나중에 이사회에서 부결시켜버렸다. 베어백 감독은 약속을 지키지 않는데 큰 실망을 한데다가 2001년부터 우리 대표팀과 함께 했으니 할만큼 했다는 생각도 가졌기에 아시안컵 대회 후 8월에 감독 자리를 물러난 것이다.

일부 언론은 베어벡 감독이 물러났으니 베어벡 감독을 선임한 기술위원도 물러나라고 하는데, 일본은 우리보다 성적이 나빴는데도 기술위원은 물론이고 감독도 물러나지 않았다.

우리의 이웃 국가인 중국은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정부의 직접적인 관리 하에 수시로 소집하여 훈련하고 있으며, 일본도 대표팀 훈련에 많은 날짜를 할애하고 있다. 일본은 금년에 대표팀을 85일 소집한데 반해 우리는 48일에 불과했다.중동의 국가들은 왕실에서 국가 차원의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개인기의 열세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세계 수준과의 격차를 줄이는데 가장 필요한 것 중의 하나가 팀 워크인데, 이 팀 워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소집훈련이 필요하다는 의견에는 다들 공감한다.

선수 차출에 대해 FIFA 규정이 있고, 협회와 프로연맹간의 협약도 있다. 그러나 협약의 문자에 얽매인다면 협회와 K리그 모두 곤란한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원칙과 규정을 기본으로 하면서 현실에 맞도록 융통성을 발휘하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축구 발전 위해 단계별 리그가 필요

한국 축구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프로 리그를 정점으로 하는 여러 단계별 리그를 창설하여 활성화시켜야 한다.

K리그, N리그에 이어 지난해 K3리그가 시작됐다. K3 리그에는 모두 10개 팀이 참가, 각 팀당 18경기씩 모두 90경기를 소화하여 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한 것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내년에는 부천 등 16개 팀이 참가하여 더 흥미있는 리그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유치원 축구대회를 처음으로 개최한 것도 의미가 크다. 축구를 접하는 시기를 앞당기고, 즐기는 축구를 보급하기 위해 수도권의 유치원 12팀, 클럽 14개 팀이 참가한 가운데 열린 유치원(U-6) 축구대회는 언론과 학부모, 선수들에게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08년도에는 전국대회를 가질 예정이다.

2008년에는 또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이 참가하는 대학 리그와 여자 축구 시범 리그가 진행될 예정이다.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 10개 팀이 참가하는 대학 리그는 5월부터 10월까지 홈 앤드 어웨이 방식으로 각 대학 캠퍼스 운동장에서 진행되며, 2009년부터는 전국 권역별로 확산시킬 계획이다.

여자 축구 시범 리그는 2007년 10개 팀이 참가했던 여자 대학생 클럽 축구를 15개 팀으로 확대하고 대회 기간도 늘여서 본격적인 여자 리그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할 계획이다.

우리보다 10년 늦은 1993년에 프로리그를 시작한 일본의 경우, 1부리그 18개 팀, 2부 리그 15개 팀, 3부 리그 18개 팀이 있는데 프로 첫해부터 2부에서 1부 승격제를 실시했다. 1999년부터는 1-2부간에 2.5팀이 업다운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2-3부간에는 2000년부터 매년 1~2팀이 올라가는 승강제를 실시하고 있는데 2016년까지 2부에 22개 팀을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다.

1년전 1월 영국 FA 컵 대회에서 영국 최정상인 프리미어 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5부 리그의 버트얼비온팀과 0대 0 무승부를 기록했고, 20여 일 전에는 칼링컵 준결승전에서 4부 리그의 위컴이 프리미어 2위를 달리고 있는 첼시와 1대 1을 기록한 것은 영국 축구 전체를 활성화시켰다.

최근의 새로운 현상은 전국의 지자체들이 축구를 포함한 체육 일반의 활성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 축구인들이 뜻을 모아 노력하면, 어려움을 극복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유소년교육과 인프라확보야말로 제2, 제3의 박지성을 배출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축구 인프라 확보에 더욱 박차

지금의 축구 인프라는 과거와 비교 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2002월드컵을 하면서 6개의 축구전용구장이 생겼으며 2002 월드컵 잉여금 650억 원의 종잣돈에 지자체 출연금 3천5백억 원을 더하여 전국 3곳에 축구센터를, 14곳에 축구파크를 조성, 모두 61면의 축구장을 건설하고 있다.

전국적으로 보면, 2002년에 284면의 잔디축구장이 있었는데 현재 총 614면으로 늘었고 교육인적자원부의 지원으로 2010년까지 각급학교에 443면의 인조잔디구장을 건설하게 된다. 교육부와 교육청과 협조하여 축구부가 있는 학교부터 우선적으로 인조잔디구장을 설치토록 하여 주말 리그에 활용하고 있다.

어느 원로 축구인께서는 최근 10년간 발전한 것이 지난 100년간 축구 발전한 것보다 많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평가해주시는 것이 고맙기는 하지만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축구 환경을 만들기 위해 우리 모두 더 노력해야 한다.

후임회장에 대하여

축구라는 종목이 국제화되었기 때문에 축구협회장은 외교의 중요성과 전문성으로 인해 대부분 장기 재임이 많다.

아벨랑제 전 FIFA 회장은 1998년 물러날 때까지 24년간 회장에 재임했으며, 현재의 블래터 회장은 1981년부터 1998년까지 19년간 사무총장을 하다가 1998년부터 지금까지 회장을 맡아오고 있다.

아르헨티나의 그론도나 회장은 1987년부터 지금까지 20년간, 브라질 텍세이라 회장은 1989년부터 18년간, 말레이시아의 전 국왕인 술탄 아마드 샤 회장은 1986년부터 21년간 협회장을 맡고 있다.

나는 내년 말까지 마무리를 잘하고 2009년 초에는 물러날 생각이다. 내년까지 재임하면 16년간 일하게 된다.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오랫동안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그동안 도와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후임회장을 내가 선출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분이 되었으면 좋은가, 생각해본다. 우선, 후임 회장은 축구를 사랑하고, 국민 누구나 "저 분이면 우리 축구를 발전시킬 수 있겠구나" 하는 신뢰를 줄 수 있어야 한다.

대한축구협회 회장을 역임하신 분들이 누구인가 살펴보면, 여운형 선생(2대), 신익희 선생(7대), 하경덕 박사(5-6대), 장택상 총리(12대), 장기영 부총리(19-21-23대), 윤보선 대통령(9대) 등이 있다.

여운형 선생은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에 활동한 당대 최고의 국제적 지식인이며 체육인이었다. 여운형 선생은 배재학교를 졸업한 후 계몽가의 길로 나서 이 땅의 청년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식민지 치하에서는 아무 힘도 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 영역을 국제적으로 넓혔다.

그는 중국 혁명을 주도하고 있던 손문 선생을 만나 조선 독립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고, 멀리 소련의 레닌을 찾아가 조선 독립을 역설했다. 그런가 하면 베트남의 독립운동가인 호치민 그리고 일본의 재야 사상가들과도 만나 교유하며 세계 정세를 논했다.

그는 운동을 좋아하여 직접 야구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으며, 43세 때인 1929년에 상해 복단대학 축구단을 인솔하고 싱가포르, 마닐라 등을 순회하며 식민정책을 성토하는 연설회를 가졌다.

1934년 49세의 나이로 조선체육회 회장 겸 축구협회장에 취임하여 체육 발전에 앞장섰고, 해방 직후 좌우로 나누어진 국내 정치 세력을 한곳으로 모으려는 노력을 기울인 정치인이었다.

이밖에도 신익희 선생, 장택상 총리, 장기영 부총리, 윤보선 대통령 등 역대 회장은 우리나라 건국 이후 역사의 격동기에게 좌우를 망라하여 정치, 사회, 문화계의 존경을 받는 분들이었다.

5-6대 회장이었던 하경덕 박사는 일찍이 1930년대에 하버드대학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당시의 최고 지성인으로, 서울신문 사장 등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나의 전임자인 최순영, 김우중 회장도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었다.

나는 아시아를 대표하는 FIFA 부회장을 4회 연임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FIFA 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중책을 맡아 북경 올림픽 축구경기를 총괄하게 되었다. 우리의 이익을 도모한다기보다는 세계 축구의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면서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해 FIFA와의 긴밀한 관계 유지가 중요하다.

협회에는 유능한 직원이 많이 있다. 이들이 FIFA나 AFC 등 각 대륙연맹 그리고 국제적인 축구인들과 많은 교류를 갖고, 중요한 대회를 유치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할 것이다.

글로벌 스포츠시대

흔히 글로벌 경제라고 하는데 스포츠도 마찬가지다. 우리 나라 프로 축구의 경쟁자는 국내의 프로 야구가 아니라 영국의 프레미어 리그나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의 프로 리그인 것이다.

문자 그대로 글로벌 스포츠시대를 맞아 스포츠에 재능이 있는 젊은이들이 축구를 하도록 야구, 농구, 씨름, 골프 등 다른 종목과 경쟁해야 하며, 다른 나라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도 남다른 각오와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선배 축구인들이 60~70년대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아시아 축구 강자의 자리를 지킨 강인한 정신을 오늘에 되살려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많다

새해에 우리는 북한, 투르크메니스탄, 요르단과 함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조 예선을 갖는다. 3월26일에는 우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경기를 갖고 6월22일에는 북한팀이 우리 나라에 와서 경기를 한다. 3월의 평양 경기때에는 우리 응원단이 철도로 판문점을 통과하여 평양으로 갔으면 한다.

올해 아시안 컵 대회때도 확인했지만,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동남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 FIFA 랭킹이 우리보다 낮지만 개인기는 우리와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고, 축구 열기는 우리보다 훨씬 높다. 자칫 방심했다가는 일을 그르칠 우려가 있으므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대한축구협회는 국내외에서 활동 중인 축구인들을 뒤에서 도와주는 기구라고 생각한다. 일선 지도자들이 더 나은 환경에서, 더 좋은 조건으로 축구를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협회의 중요한 일이다.

축구인들이나 축구팬들께서는 우리 협회가 생각하지 못했던 점이나 좋은 의견이 있으면 주저말고 연락주시기 바란다.

우리의 삶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내년에도 우리 축구인들은 다른 체육단체들이 부러워할 정도 서로 협력하여 더 많은 일을 하기를 기대한다.

한 경기를 승리했다고 자만심에 빠지거나, 한 경기를 패했다고 낙심한다면 큰 선수가 될 수 없다.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겸손한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새해를 맞아, 축구가족 모두에게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기를 기원한다.

2002 월드컵 유치후 가진 협회 직원 축구시합 후 헹가래 받는 모습. 1996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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