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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월드컵 기행]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입력 2010. 04. 14. 09:53 수정 2010. 04. 14.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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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하의 역대 월드컵 기행②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

▲ 어떻게 열렸나

우루과이에서 열린 첫 대회의 성공으로 고무된 FIFA는 두 번째 개최국을 찾아 고심했다. 1회 대회가 성황리에 끝난 만큼, 2회 대회에서는 더 많은 나라가 관심을 보일 것이란 장밋빛 기대도 함께 했다. 더해 그리 호의적이지 못했던 유럽도 이번에는 자존심을 낮추고 FIFA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라 생각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2회 월드컵 유치 신청서를 무려 13개 나라가 냈고 유럽의 참여도 적잖아 FIFA는 월드컵의 흥행 롱런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기대감을 품고 진행된 두 번째 월드컵의 개최국은 이탈리아가 아니라 스웨덴이 돼야 했다. 스웨덴은 2회 월드컵 개최를 앞두고 13개 나라와의 유치 경쟁에서 앞서며 개최권을 따냈다. 하지만 제2회 월드컵의 개최권을 획득한 스웨덴은 전후 문제로 냉랭했던 유럽 사회와 경제 한파 등으로 월드컵을 준비하는 데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더군다나 1회 대회에서 몬테비데오라는 하나의 도시에서 열렸던 월드컵을 스웨덴 내 여러 도시에서 분산 개최하도록 권유하던 FIFA의 요구도 무리하게만 느껴져 스웨덴은 개최를 포기하고 말았다.

이에 이탈리아는 무주공산이 되어버린 월드컵의 개최권을 따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당시 이탈리아의 절대 권력자 무솔리니는 1932년에 열렸던 FIFA 총회에 참석하는 이탈리아 대표에게 '반드시 개최권을 가져오라.'라고 엄포를 놓았고, 이탈리아는 로마, 플로렌세, 토리노, 밀라노, 볼로냐 등 8개 도시에 경기장을 준비하겠다고 큰소리치며 월드컵 개최에 박차를 가했다.

사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제 상황이나 여건이 월드컵을 넉넉히 치러내고도 남을 만큼 여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7개 도시에 무려 8개의 경기장을 준비하고 대회 유치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하기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당시 이탈리아를 지배하던 무솔리니가 전쟁으로 얻은 자금력이 풍부하긴 했지만, 엄청난 돈이 필요한 경기장을 8군데나 짓기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와 무솔리니는 왜 그런 경제적인 부담까지 감수하면서 월드컵 개최에 모든 걸 걸었던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월드컵이 '파시즘'의 엄청난 선전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유럽은 물론이고 아메리카 아시아, 심지어 아프리카까지 깊숙이 파고든 월드컵을 이탈리아가 개최하게 된다면, 그들의 정치적 신념이었던 파시즘을 세계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월드컵을 파시즘의 대대적인 선전의 장으로 만들 계획이었던 것이다.

이런 이탈리아의 속내를 모를 리 없는 FIFA는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순수한 스포츠 정신을 어길 것이 자명한 이탈리아에 개최권을 내준다면 FIFA는 물론 월드컵에도 치명적인 오점 남길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첫 대회의 성공적인 유치로 한껏 부풀어 있는 월드컵에 대한 기대도 외면하기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무려 8차례의 총회 끝에 FIFA는 결국 이탈리아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고, FIFA의 이 결정은 향후 월드컵의 세계화와 기초를 닦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얼룩졌던 월드컵이란 지울 수 없는 상처도 함께 내고 말았다.

FIFA는 이탈리아를 개최지로 선정한 데 대해 '이탈리아는 세계 축구 최강 중 하나이고, 축구의 양대 산맥인 남미의 우루과이가 1회 대회를 개최했으니 2회 대회는 유럽의 국가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프로 리그인 세리아의 AC 밀란, 유벤투스, 토리노 같은 클럽팀이 세계 클럽 축구계를 주름잡고 있어 월드컵 개최지로 손색이 없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FIFA의 적극적인 해명에도 불구하고 순수한 스포츠 축제인 월드컵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는 오명은 지울 수 없게 되었다.

이렇듯 어수선한 분위기와 정치적 이념이 곁들여진 대회로 얼룩지긴 했지만, 1934년 이탈리아 대회는 월드컵 역사에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게 된다.

첫 번째는 월드컵이 세계적인 축제로 발돋움하기 위한 최우선의 과제였던 유럽의 발길을 돌리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세계 대전의 후유증과 경제난으로 인하여 월드컵에 비교적 미미한 관심을 보였던 유럽 국가들은 이탈리아의 적극적인 홍보와 노력으로 월드컵에 눈길을 주기 시작했다. 우루과이 대회 때 프랑스를 비롯한 4개국만이 참가했던 것과 달리 이탈리아 대회에는 무려 12개 나라가 월드컵에 참가하면서 세계 사회의 중심이었던 유럽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이탈리아 월드컵이 향후 월드컵의 근간이 되는 틀을 마련한 대회였다는 점이다. 지난 1회 대회 때는 FIFA의 초청을 받은 13개국이 비대칭적인 토너먼트를 치렀지만, 이탈리아 대회 때는 지역별로 예선을 거쳐 본선에 올라온 16개국이 토너먼트를 펼치는 진정한 실력자를 가리는 대회로 거듭나게 되었다. 특히 지역 예선이라는 제도와 본선 진출국의 수(16개 나라)를 제한하게 되면서 세계는 월드컵에 출전하기 위해 긴 기간 동안 축구 전쟁을 치러야 했고, 이러한 경쟁 구도는 자연스레 월드컵의 '질'을 높이는 의외의 효과까지 가져오게 했다.

▲ 월드컵 이모저모

-실패로 끝난 우루과이의 복수극

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탈리아 월드컵은 성공적인 대회였다. 하지만, 그런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아쉬운 부분을 또 하나 찾는다면 전 대회 우승국인 우루과이의 불참과 축구 종주국인 영국의 여전한 냉소였다. 그중에서도 디펜딩 챔피언인 우루과이의 불참은 대회의 질을 더 끌어올리지 못하게 하였다.

우루과이는 자신들이 개최하였던 1회 대회에서 집단적으로 불참을 선언해 대회 자체를 무산시킬 뻔했던 유럽에 대한 앙금이 아직 남아 있었으며 그런 유럽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럽은 이러한 우루과이의 불참에 대해 '우루과이는 주력 선수들의 노쇠화로 전력이 많이 떨어졌다'라며 '망신을 당할 것이 두려워 참가하지 않았다'고 말해 우루과이를 조롱했다.

멋진 복수극을 꿈꾸며 보이콧을 선언했지만, 1회 대회보다 더 많은 참가국으로 성황리에 치러진 월드컵을 보면서 우루과이는 실패한 복수극에 심한 속병을 앓아야 했다.

-'죽음의 대회' 이탈리아 월드컵

지역 예선을 통과한 16개국이 본선에서 대결하게 된 이탈리아 대회는, 지금과 같은 조별 예선 리그가 없다. 예선 리그가 없이 토너먼트 넉다운제로 진행 되었던 대회였다. 본선에 오른 16개 나라는 곧바로 16강-8강-4강순으로 경기를 치루며 살얼음판을 걷는 일전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러한 경기 운영은 우승 후보들이 줄줄이 초반 탈락하는 이변을 가져왔을 뿐 아니라, 매 경기가 결승전을 방불케 할 정도의 치열함과 박진감도 함께 불러왔다. 시드 배정을 받은 8개국과 각각의 조에 편성된 또 다른 8개 팀이 1라운드부터 토너먼트를 치르고 8강 4강 결승까지 모두 토너먼트로 진행돼, 한 경기의 패배는 바로 탈락이기에 죽음의 대회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리만 미워해'

이탈리아는 자국에서 개최되는 월드컵을 위해 최강의 팀을 만드는 데 주력했다. 그러한 이탈리아의 강력한 의지는 결국 다른 나라의 선수를 빼오는 데까지 이르렀고, 그런 이탈리아의 의지의 가장 큰 피해자는 남미의 아르헨티나였다.

이탈리아는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아르헨티나 대표 선수로 활약한 몬티를 다시 빼오는 것을 시작으로 구이아타 오르시 등의 선수들도 설득해 이탈리아 대표로 집어넣어 버렸다. 상대적으로 아르헨티나의 전력은 곤두박질 쳤고, 결국 1라운드에서 스웨덴에 패하며 허무하게 월드컵을 마감해야 했었다. 아르헨티나는 이 대회에 1진이 아닌 2진을 투입했었는데, 이유는 이탈리아에 좋은 선수를 빼앗길 것이 두려워 일부러 주전급 선수들을 대거 불참시킨 것이었다.

또, 이탈리아는 남미의 축구 강국이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를 경계해 일부러 먼 거리에 있는 경기장을 배정토록 하여 정상적인 경기를 펼칠 수 없도록 조작했다. 13,000km나 이동해야 했던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선수들은 4주간의 기나 긴 배 여행을 비롯한 피로에 지쳐 제대로 된 경기를 펼치지 못하고 1라운드에서 허무하게 탈락하고 말았다.

-독일 대표 선수들 집단 구속

1934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는 인생에서 가장 우울한 시기를 보내야 했던 사람들도 생겨났다. 바로 독일 대표팀 선수단이다. 독일 대표팀은 1라운드에서 벨기에를 맞아 무려 5골을 쏟아 부으며 5-2로 대승하며 신바람을 냈지만, 2라운드에서는 체코에 1-3으로 패하며 망신을 당하고 말았다. 이에 화가 난 히틀러는 독일 축구 선수단을 집단으로 구속하고 말았다.

지금에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 그런 절대자의 권력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또, 유럽인들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자존심이 얼마만큼 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대목이다.

-프랑스, 두 대회 연속 오심에 울다.

지난 우루과이 대회에서 심판의 어설픈 오심으로 탈락했던 프랑스의 불운은 2회 대회에서도 그치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당시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던 원더풀 팀, 오스트리아와 맞붙은 프랑스는 최선을 다해 덤벼들었고, 최강이라던 오스트리아와 월드컵 사상 최초의 연장전까지 들어가는 기염을 토했었다.

투지를 앞세운 프랑스는 체력이 다한 오스트리아를 강력하게 몰아붙였고, 꿈은 현실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주심의 어이없는 오심이 또다시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연장 후반 3분, 오스트리아의 지알이 진델라의 패스를 받아 결승골을 성공시켰지만 이 골은 명백한 오프사이드였다. 선심이 정확하게 오프사이드 기를 들고 주심에게 알렸지만 네덜란드 출신의 주심 반 무어셀은 오스트리아의 골을 인정하고 경기를 끝냈다.

경기가 끝난 후 반 무어셀은 '밀라노에서 벌어진 스위스-네덜란드 전에서 스위스가 네덜란드를 3-2로 격파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아 그만 뼈아픈 오심을 자행했다.'라고 밝혀 더 큰 충격을 주었었다. 결국, 프랑스는 주심의 어설픈 판정으로 두 대회 연속 울어야 하는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 간추린 대회 기록

-대회 기간 : 1934.5.27 ~ 1934.6.10(15일)-참 가 국 :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벨기에, 브라질, 체코슬로바키아, 이집트,프랑스, 독일, 헝가리, 이탈리아, 네덜란드, 루마니아, 스페인, 스웨덴, 스위스, 미국-개최 도시 : 나폴리,로마,밀라노등 이탈리아내 8개 도시-총 득 점 : 70골, 평균 득점 : 4.12 골-총 관 중 : 395,000명, 평균 관중 : 23,235명-득 점 왕 : 스키아비오(4골·이탈리아), 코넨(4골·독일), 네예들리(4골·체코슬로바키아)-결 승 전 : 이탈리아 vs 체코( 2 : 1 연장전 포함, 이탈리아 우승)

글=손병하 기자( bluekorea@soccerbest11.co.kr)사진=게티이미지( www.gettyimag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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