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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1인터뷰] 이만수 "프로야구 감독? 때가 되면 나도.."

류동혁 입력 2011. 07. 11. 13:06 수정 2011. 08. 29.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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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 이만수 코치는 정말 '무식한' 노력파였다. 11년간 평균 4시간만을 자고 훈련에 매진했다.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마음의 고향인 대구 야구장에서 모습.조병관 기자 rainmaker@sportschosun.com

"11년간 평균 4시간만 잤다."

고3 수험생의 대학합격 후기를 연상케 하는 익숙한 말. 그런데 이 말의 주인공이 SK 이만수 2군 감독이라면 얘기는 180도 달라진다.

그는 정말 '독하게' 훈련했다. 이 감독은 "남들보다 야구를 늦게 시작한 편이었어요. 대구중 1학년때 처음으로 배트를 잡았으니까. 당연히 남들보다 더 노력해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때까지 하루 평균 4시간만 자고 운동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프로야구 30주년 기념 레전드 올스타 투표에서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10일 인천문학구장 한 켠의 2군 감독실에서 그를 만났다. 야구계 선, 후배들의 질문에 구수한 경상도 사투리로 자신의 인생을 낱낱이 풀어놨다.

─87년인가 88년인가로 기억됩니다. 선배님이 찬스에서 병살타를 치니까 관중석에서 "그것도 못 치나" 하는 목소리와 함께 야구장 안으로 빈 맥주캔이 하나 날아들었습니다. 그때 선배님이 그걸 집어서 다시 던진 걸로 기억됩니다.(웃음) 그러자 관중석의 그 구역에서 캔이 우르르 다시 날아왔습니다. 마치 영화에서 화살이 무수히 날아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때 캔을 집어서 다시 던지신 이유가 궁금합니다.(삼성 류중일 감독)

▶(웃음을 참지 못한다) 아이코, 첫 질문부터 세네. 그때가 라이벌인 해태와의 경기였다. 1, 2차전을 모두 우리 팀이 졌지. 그래가 3차전은 무조건 이겨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3차전도 박살나고 있었다. 경기는 완전히 넘어갔고, 8회 1사 1루였는데 혼자 생각으로 '팬들이 있으니 2루타 아니면 홈런을 쳐야겠다'고 생각했었다. 볼카운트 1-2에서 한가운데로 들어와서 있는 힘껏 땡겼는데 와 이게 병살이 되버렸네. 빨랫줄같이 갔는데 유격수 정면으로 갔지. 너무 속상해서 터덜터덜 덕아웃으로 가고 있는데, 어떤 관중이 다 마시지도 않은 맥주캔을 던져서 등에 맞았다(무릎팍 도사에서 '온거(경상도 사투리로 가득 찬 것이라는 뜻)'라고 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장면이다) 아프기도 하고 열도 받고. 그때 이성을 잃어버리고 냅다 확 던졌지.

불난 집에 석유를 뿌린 것처럼 관중석에서 난리가 났부랬다. 그라운드에 소주병, 캔, 오물 다 던지는거야. 1대1만2000명으로 싸우는 것 같았다. 덕아웃에 들어가서 처음에는 씩씩거렸는데, 일이 점점 커지니까 나중에는 앞이 캄캄한거라. 결국 경기 끝나고 마이크 잡고 사과했지. 그때 뉴스에도 나오고 보통 세 경기정도 출전정지 당해야 할 일을 거의 한 달동안 경기에 나가지 못했네. 그 뒤에 경기에 나갔는데, 야유가 너무 심해서 담배 필터를 양 귀에 끼고 경기를 치렀다. 당시에 타율, 타점, 홈런 1위를 달리고 있었는데, 이후로 완전히 바닥을 기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맏아들 하종이(지금 29세)가 담임선생님하고 야구장을 찾았는데 너무 부끄러웠다. 정말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이었는데.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일이다.

─요즘 포수가 경기중 공 받을 때 "나이스 스트라이크!"라는 혼잣말도 쉽게 못합니다. 감독님 현역 시절엔 포수가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일부러 말장난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실제 그랬는지 궁금합니다. 또 그 당시에 타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요.(삼성 현재윤)

▶옛날엔 포수가 경기 중에 소리지르지 않고 타자들을 말로 훼방놓지 않으면 경기 끝나고 감독, 선배들한테 따귀, '빠따(방망이의 비속어)' 무지하게 맞고 그랬다. 그래서 마스크를 쓰면 선배고 후배고 보이는 게 없었다. 당시 김봉연 유두열 김우열 윤동균 김용희 선배에게 하도 그래서 경기 중에 방망이로 맞을 뻔한 경우도 많았다. 그래도 지지 않고 "그래 죽여라 죽여" 그랬다. 워낙 잘 치는 선배들이었지만 화가 많이 나서 제대로 타격을 하지 못했다. 이제 완전히 프로화가 됐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된다.

(당시 에피소드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를 알려달라고 졸랐다) 음. 김봉연 선배가 나한테 가장 많이 당했다. 김 선배 큰 동서가 복싱선수로 유명한 김기수씨였는데, 나와도 친분이 있었다. 그래서 일부러 경기 중에 "어제 기수형 만나서 맛있는 거 마이 먹었는데, 형하고는 안 친한가봐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면 김 선배가 "뭐 진짜야?" 그랬었다.

─선수 시절 언제 들어가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개인훈련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자기관리에 철저하신지.(삼성 김용국 코치)

▶남들보다 늦은 중학교 1학년 때 야구를 시작했다. '이왕 시작한 거 끝장을 보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밤 12시에 자서 새벽 4시에 일어났다. 한양대 졸업할 때까지 11년 동안 그랬다. 지금도 새벽 5시에 일어난다. 2군 감독하고부터 컴퓨터에 2군 10개팀, 우리팀 전력분석을 상세하게 해놓고, 일기와 일지를 쓴다.

─메이저리그 코치 경력이 있으신데 메이저리그 투수와 국내 투수의 차이점을 말씀해주세요.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면 투수 중 누가 가장 잘 될지 예상해주세요.(삼성 최형우)

▶메이저리그 투수는 너무나 공격적이다. 도망가는 게 없다. 그리고 힘으로 던지기 때문에 볼이 무겁다. 대부분 투심이라 똑바로 날아가는 직구가 거의 없다. 반면에 우리 선수들은 포심을 많이 던진다. 기술로 던지기 때문에 볼이 약간 가벼운 대신 빠르다. 지금도 좋은 투수들이 많은데, 조계현의 현역 시절이 메이저리그 가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현역시절 싸움닭이라 불릴 정도로 공격적이었고, 몸쪽 직구 구사능력과 스플리터까지 갖췄기 때문이다.

─프로야구 30년 최고의 스타로 선정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선수생활 중 가장 기뻤던 순간과 가장 힘드셨던 순간을 하나씩 꼽아주십시오.(LG 박용택)

▶1982년 프로야구가 생겼을 때 가장 기뻤다. 사실 프로야구가 출범하지 않았으면 무조건 미국을 가려고 했다.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라.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다) 삼성 시절 우승도 한 번 못했네. 제일 안타깝다.

─만약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어떤 포지션을 하셨을 것 같나요.(LG 이진영)

▶난 포수가 재일 재미있어. 사실 대구중 시절 투수로 뛴 적이 있다. 문교부 장관기 우승을 하기도 했다. 힘이 좋아서 맨날 직구만 던졌는데, 볼이 상당히 빨랐다.(기자가 아무리 그래도 직구 하나만으로 그것도 초짜 투수가 우승할 수 있었겠냐고 딴죽을 걸었다. 그러자 답답하다는 듯) 아니야. 진짜 빨랐다니까. 근데 감독님이 하루에 매일 150개씩 던지라는 거야. 팔꿈치가 펴지지가 않더라고.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감독님을 찾아가서 투수 안하겠다고 말하면서 울었다.

─기분이 안좋아도 항상 밝은 모습이던데, 그렇게 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지요.(한화 이희근, 롯데 조성환)

▶고등학교 때까지 잘 웃지 않았다. 사실 내가 당시에 굉장히 무섭게 생겼었다. 눈도 쫙 째졌지, 얼굴은 거무스름하지, 덩치 크지, 여드름 팍팍 나 있지. 근데 지금 와이프를 김시진 감독 소개로 만났다. 김 감독 동기동창이다. 와이프가 어느날 "좀 웃어라. 무서워 죽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웃을 일이 있어야 웃제"라고 되받아쳤는데, 와이프가 다시 "당신 인상 보면 말 안들으면 맞아 죽을 것 같다. 너무 무서워서 도망도 못 가겠다"고 했다. 그때부터 충격받고 웃기 시작했다. 근데 화이트삭스 코치 시절 갑자기 장모님이 돌아가셨다. 와이프더러 "빨리 한국에 가라"고 했는데, 당시 팀과 계약연장이 진행되는 시기여서 여권문제 때문에 출국을 하지 못했다. 결국 와이프는 장모님 돌아가신 지 일주일이 지난 뒤에야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그때 정말 웃기 싫더라. 근데 신기한 건 경기장에 나가니까 자연스럽게 또 웃게 되더라. 습관이 참 무섭다.

─미국에서 코치 연수하실 때 배우신 것들 중에 한국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시면서 적용하는 건 어떤게 있나요.(한화 정민철 코치)

▶나도 그랬지만, 선수생활 30년 하면서 매일 단점만 지적받았다. 그래서 미국 코치 초창기 시절에도 마이너리그 선수들 단점만 얘기했다. 그러니까 팀의 감독이 나를 부르더니만 "넌 왜 단점만 얘기하냐. 이제부터 장점을 봐라. 그렇지 않으면 너하고 함께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 근데 보여야 말이지. 10일 동안 완전 벙어리였다. 근데 이후에 신기하게 보이더라. 예를 들어 실책을 해도 글러브질이 빠른 선수가 있더라. 스윙은 퍼져서 나오지만, 배트 스피드가 빠른 게 보이더라.

─(짧고 간단하게)언제 감독해요.(한화 강석천 코치)

▶와 질문 한 번 시원하네. 나도 짧게 얘기할게. 때가 되면 하겠지.

─홈런 치고 그라운드를 돌 때 기쁨을 많이 표현하셨잖아요. 팬들이 참 많이 좋아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그 때문에 상대 투수들의 공에 많이 맞으셨는데 세리머니를 계속한 이유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KIA 이강철 코치)

▶현역 시절 빈볼 내가 다 맞았을 것 같다. 사실 그러면 안됐었는데. 근데 홈런 치면 내가 좋은거야. 어쩔 수가 없는거라. 두번째는 팬도 좋아하더라. 당시에 상대투수는 생각 못했다. 투수들에게 미안하다.

─팬서비스 차원에서 팬티 퍼포먼스를 하셨잖아요. 10년 후에 만약 감독 자리에 있더라도 팬 요구가 있다면 팬티 퍼포먼스를 또 하실건가요.(넥센 김민우)

▶연지곤지 찍고 여장하고 세리머니를 할 날이 있지 않겠나. 당분간은 아니겠지만.

─독실한 크리스찬으로 유명합니다. 요즘도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있나요. 후배 선수들에게 성경책 선물도 하고 전도를 권유하고 있는지.(두산 신경식 코치)

▶선수 시절에는 늘 그렇게 해왔는데. 감독으로선 못 하겠더라. 선수들이 불교나 무교라고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할까봐.

그는 프로야구 초창기 대구 삼성을 대표한 간판 타자. 그러나 SK 유니폼을 입고 있다. '대구에 내려가면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이 감독은 "포근한 느낌이다. 여전히 고향이다"라고 했다. 재차 독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해 무릎팍도사에서 '삼성과 현역 시절 막판 서운한 감정이 있었다'고 했는데"라고 묻자 "그때는 선수들의 연봉이 체계적이지 않던 시절이다. 아무리 잘해도 기존 연봉의 최대 25%밖에 올리지 못했다. 그래서 신경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연봉문제 때문에 '이기적인 선수'라는 얘기도 들었고. 그러나 지난 일이다. 이런 얘기는 삼성도 불편하고, 나도 불편하다. 내 나이가 벌써 50이 넘었다.(54세) 더 이상 앙금은 없다. 내 인생을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그에게 또다른 질문 하나를 던졌다. "1군 수석코치에서 2군 감독으로 두 차례나 보직이 변경됐다"고 하자 "2군 감독 경험은 소중하다. 나에게는 '러키'다"라고 덧붙였다. 인천=류동혁 기자 sfryu@sports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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