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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선수시절66] 정해성, 현역 시절부터 한결 같았던 뚝심의 사나이

조회수 2012. 12. 3. 13: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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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성(54)은 선수보다는 지도자로서 더 많이 알려진 축구인이다.코치로서 2002년과 2010년 월드컵의 영광을 함께 했으며, K리그 제주와 전남의 감독으로도 활동하는 등 지도자로서 큰 명성을 쌓았다.

그러나 선수로서의 정해성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그는 1984년부터 89년까지 럭키금성(현 서울)에서 활약하며 K리그 톱클래스의 선수로 인정받았었다. 현역 시절에도 뚝심과 리더십이 뛰어나 주장으로서 럭키금성을 이끌기도 했다. 주로 풀백으로 활약했던 정해성은 K리그 통산 118경기에 나서 2골-4도움을 기록했으며, 럭키금성의 1985년 K리그 우승과 1986년 및 89년 준우승에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다.

80년대 중후반 럭키금성(현 서울)의 리더 역할을 수행했던 정해성 ⓒ이상헌

핸드볼 MVP에서 축구 선수로

정해성은 서울교대 부설초등학교의 핸드볼 선수였다. 서울시 대회에서 MVP를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으나, 핸드볼부가 없는 한영중에 진학하면서 새롭게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대가 심해 몰래 축구를 해야만 했다.

"부산에서 살다가 서울로 올라왔는데, 교과서를 읽을 때 부산 사투리를 쓰니까 애들이 비웃더군요. 창피했죠. 여러 가지로 적응하지 못해 힘든 상황에서 가을운동회 때 제가 완전히 휩쓸었어요.(웃음) 마침 학교에 핸드볼부가 있었고, 교장 선생님은 저보고 올림픽 선수감이라고까지 하셨죠."

"그런데 한영중에는 핸드볼부가 없었고, 저는 축구를 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렸어요. 아버지는 제가 키도 작고 약해서 위험하다며 반대하셨고, 대신 야구를 하라고 하셨죠. 그래서 야구부에 가입해 1년 정도 했는데 별로 흥미가 안 생기더군요. 그래서 중2 말에 아버지 몰래 축구부에 가입했습니다."

1년여 동안 몰래 축구를 했던 정해성은 중3 말에 아버지에게 덜미를 잡혔다. 수학여행경비 2,500원을 축구화 사는데 사용한 것이 걸린 것이다. 결국 아버지도 축구를 하는 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축구화 한 켤레가 2,500원 정도 했어요. 그래서 수학여행을 안 가고 축구화를 산 거죠. 부모님께는 갔다 왔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고 의심스런 부분들이 들통나면서 걸렸죠.(웃음)"

"결국 축구를 하게 됐는데, 당시에는 제가 키도 작았고, 축구를 시작한 것 자체도 늦었기에 1년을 더 다녔습니다. 그 시절에는 유급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중앙고 유일의 우승을 이끌다

한영중 시절 정해성은 한영고 감독의 권유로 옥천의 죽향초로 내려가 축구를 하기도 했다. 선수가 부족했던 죽향초의 감독이 선배였던 한영고 감독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는 나이를 속인 부정 선수들이 득실거리던 시절이었고, 체구가 작았던 정해성은 영문도 모른 채 죽향초에서 축구를 해야만 했다. 결국 정해성은 9개월여를 그 곳에서 보내야 했고, 소년체전에서 팀의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같이 내려갔던 친구 두 명은 3일 만에 도망가고, 저는 거기서 9개월여 동안 있었어요. 그 이후에 대구에 있는 계성고에 입학했다가 너무 구타를 많이 당해서 결국 도망쳤죠. 이후에 중앙고로 전학 가게 됐습니다."

중앙고에서 정해성은 축구에 눈을 떴다. 1학년 때부터 경기를 뛰었고, 2학년 때 두각을 나타내 3학년 때는 팀의 주장으로 맹활약했다. 1977년 고교선수권에서는 중앙고 유일의 전국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어느덧 그는 고교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인정받았고, 대학 팀들의 치열한 스카우트 공세에 시달릴 정도가 됐다.

"고3 시절에 주장을 했는데, 당시 고교선수권 결승전에서 마산공고를 꺾고 중앙고 최초의 우승을 차지했어요. 학교에서도 난리가 나고, 동대문운동장에서부터 낙원상가를 거쳐 무등을 타고 학교까지 갔었죠.(웃음) 정말 행복했던 순간이었습니다."

럭키금성 시절 ⓒ월간축구

고려대 진학..그리고 축구 인생을 마감할 뻔 했던 이야기

중앙고의 고교선수권 우승을 이끌었던 정해성은 '제2의 차범근'이라 불렸던 남강고의 이형노에 이어 고교랭킹 2위로 평가받았고, 고려대와 공군사관학교의 치열한 스카우트 경쟁에 휘말렸다. 아버지는 "군인이면 먹고 산다"며 공사를, 어머니는 고려대를 원했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성은 고려대에 입학했다.

"당시 3사 체육대회의 열기가 엄청났던 시절이었죠. 해군사관학교에서 좋은 선수들을 스카우트하면서 앞서나가자 공군사관학교도 스카우트에 열을 올리면서 저를 데려가려고 한 겁니다. 원래 저는 고려대로 가기로 되어 있었어요. 중앙고 선배이기도 한 최종덕 선배가 '넌 무조건 고대행이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죠. 그런데 공사에서 중간에 끼어들었고, 아버지를 공략했어요. 고려대는 어머니를 공략했고요.(웃음)"

"그런 상황에서 어머니가 어디 좀 같이 가자고 해서 따라나섰는데, 부산으로 저를 데려가시더군요. 공사 입학 시험이 끝나는 날까지 부산에 저를 잡아두셨고, 결국 고려대로 가게 됐습니다. 이것 때문에 부모님이 4개월여 동안 서로 말도 안 하실 정도였어요.(웃음)"

결과적으로는 고려대행이 정해성을 살렸다. 얼마 후 3사의 스카우트 경쟁이 과열됐다는 판단에 사관학교의 스카우트 금지령이 내렸고, 만약 정해성이 공사로 갔다면 입학이 취소되어 1년을 허송세월로 보낼 뻔 했다.

힘든 과정 속에 1978년 고려대에 입학한 정해성은 김정남 감독이 부임한 2학년 시절부터 풀백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원래 미드필더였지만, 당시 고려대는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았고, 김정남 감독은 자원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생각과 함께 정해성의 스타일이 풀백에 더 적당하다는 평가를 내렸던 것.

"1학년 때 연세대와의 정기전에 후반에 교체 투입됐는데, 당시에는 1학년이 정기전에 뛴다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어요. 0-1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투입됐는데, 너무 긴장하고 정신이 없어서 5분 정도 경기가 지체될 정도로 어리버리했던 기억이 납니다.(웃음)"

"2학년 때 김정남 감독님이 오셨고, 당시 고려대 멤버가 정말 화려했어요. 주장 오규상 선배(현 여자축구연맹 회장)를 비롯해 이길용, 이상용, 이태호, 이강조, 황석근 등 대단했죠. 1학년 신입생들도 좋은 선수들이 여럿 들어왔고요. 감독님께서는 저를 쓰고 싶은데 자리가 마땅치 않으니까 오른쪽 풀백을 권유하셨고, 저는 경기만 나갈 수 있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했어요. 오히려 더 편해졌죠. 미드필더는 공수를 모두 신경 쓰면서 힘들게 플레이해야 하지만, 풀백은 내 지역만 지키면 되었거든요."

풀백으로의 변경 이후 정해성은 좋은 활약을 펼쳤고, 대표팀 합류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엄청난 시련이 다가왔다. 동료들과 창경원(현 창경궁)으로 벚꽃놀이를 갔다가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은 과정에서 병으로 옆구리를 찔리면서 생사를 오갈 정도의 중상을 입었던 것.

"춘계대학연맹전 첫 경기를 이기고 동료들과 벚꽃놀이를 갔거든요. 거기서 연세대 선수들과도 만나서 안암동으로 같이 와 술 한 잔도 하게 됐는데, 동네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은 거예요. 그 과정에서 연세대 선수 하나가 불량배를 때렸고, 주위에서 말리고 무마해서 모두 헤어졌죠. 그런데 그 불량배가 패거리를 데리고 다시 왔고, 그 연세대 선수를 못 찾으니까 저에게 분풀이를 한 겁니다."

"깨진 병으로 제 옆구리를 찔렀는데, 당시에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옆구리를 손으로 틀어막고 고려대병원으로 갔는데, 운 좋게도 인근의 성균관대에서 데모가 벌어져 의사들이 비상근무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어요. 간신히 수술하고 8개월여를 병원에 입원해야 했죠."

이 사건으로 인해 정해성은 축구부에서 제명되고, 김정남 감독도 사퇴하면서 이차만 감독이 새롭게 부임했다. 시간이 지나고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정해성은 축구부 복귀를 희망했으나 학교에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병원에서 8개월여를 보내고 나왔더니 축구부에서 쫓겨났더군요. 그 해 겨울에 눈이 많이 왔는데, 하숙집에서 미아리까지 살살 뛰어봤어요. 뛸 만해서 병원에 갔더니 조깅 정도는 가능해도 심한 운동은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고 운동을 시작했고, 다시 축구부에 들어가기 위해 체육위원회 사무실 앞에서 1주일간 무릎을 꿇고 있었어요. 체육위원회에서는 절대 반대였지만, 제가 이렇게까지 하자 지금은 돌아가신 김상겸 위원장님께서 허락을 해주셔서 동계훈련부터 참가할 수 있게 됐죠. 본격적으로 운동해도 몸에 문제가 없을까 하는 생각에 겁도 났지만 느낌은 괜찮았고, 무엇보다 너무 억울하니까 악에 받쳐서 더 열심히 했어요. 그 사건이후 너무 힘들었던 상황에서 부모님마저 교통사고로 돌아가셔서 마음의 상처도 컸었어요.그래서 더 죽기 살기로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다시 축구를 하게 된 그는 다시 주전으로 활약했고, 1982년에는 제일은행에 입단해 2년여를 보냈다. 그리고 1984년부터 럭키금성의 창단 멤버로서 프로의 길을 걸었다.

85년 K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는 정해성(왼쪽)과 동료들

프로의 세계에 뛰어들다

새로 창단한 럭키금성에서의 출발은 좋지 않았다. 정해성은 단 두 경기만 뛰고 여름을 지날 때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할렐루야와의 첫 경기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현대(현 울산)와의 두 번째 경기가 문제였다.

"당시 현대에서 뛰던 최강희 감독이 퇴장 당하면서 우리가 수적 우위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제 쪽에서 뚫리면서 한 골을 내줬어요. 결국 2-3으로 역전패했죠. 그 이후부터 경기에 나서지 못했습니다.(웃음)"

당시에는 한 시즌이 끝나면 8~10명 정도가 방출되는 시절이었고, 정해성도 더 이상 밀려나면 끝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진주에서의 여름합숙훈련 때 당시 박세학 감독에게 어필하기 위해 삭발을 하면서 의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삭발을 했음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더군요. 시즌 말미에 감독님 방을 찾아갔죠.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만약 거기서 못하면 그만두겠다고 사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해성은 현대전에서 다시 기회를 잡았다. 공교롭게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그 팀이었고, 그의 역할은 현대의 키 플레이어 허정무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이었다.

"현대전을 하루 앞두고 당시 트레이너였던 고재욱 선배님이 오셔서 내일 경기 준비하라고 하시더군요. 축구화를 꺼내 닦으면서 흥분한 마음을 가라앉혔죠.(웃음) 그런 상황에서 감독님께서 부르시더니 '할 수 있겠어? 내일 허정무를 잡아'라고 하셨어요."

"당시 허정무 감독님은 제가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수준이었어요. 그래도 막아야 살 수 있으니까 어쩌겠어요. 저를 뚫으면 뒷다리를 걸고 난리도 아니었죠. 감독님과 나중에 만났을 때 서로 그 경기 이야기를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나네요.(웃음)"

결국 현대전에서 0-2로 졌지만, 정해성은 어느 정도 인정을 받으면서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방출 명단에서 연봉 동결 명단까지 올라온 셈이었다. 프로의 냉정함을 새삼 깨달은 정해성은 첫 시즌을 마친 후, 동계훈련에 사활을 걸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처럼 열심히 운동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오직 살아남아야겠다는 생각만으로 운동했어요. 그리고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특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것이 악역이긴 했지만 상대 에이스를 막는 킬러 역할이었죠."

럭키금성에서는 정해성에게 상대팀의 잘하는 선수는 다 맡겼고, 그는 대우(현 부산)의 조광래, 정해원, 현대의 허정무, 포철(현 포항)의 조긍연 등을 거머리처럼 마크하면서 인정받았다.

피아퐁(중앙)과 함께 태국 잡지에 소개된 정해성(좌). 오른쪽은 박항서

럭키금성을 우직하게 이끌다

이후 정해성은 럭키금성의 듬직한 주전 멤버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85년에 럭키금성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끈 정해성은 86년 후반기부터는 주장을 맡아 준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당시 럭키금성은 황소축구단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고, 이에 걸맞게 화려하지는 않아도 끈끈한 축구를 구사했다. 정해성도 '황소'의 이미지에 정말 잘 맞는 선수였다.

"원래 박항서 감독이 주장이었다가 86년 후반기부터 제가 물려받았어요. 그 무렵에는 다른 팀도 마찬가지지만, 출신 학교별로 선수들이 나눠지는 경향이 있었거든요. 주장으로서 팀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일부러 휴가에도 다른 학교 출신 후배들과 놀러가고 그랬습니다. 대우나 포철처럼 팀 분위기가 화려하지는 않지만, 럭키금성만의 우직한 팀 컬러가 있었죠."

이렇듯 화려하지는 않지만, 팀의 살림꾼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리더십까지 갖춘 정해성에 대한 평가는 높았다. 이미 K리그에서는 톱 클래스의 선수로 인정받은 것. 그러나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다. 정해성 본인도 큰 욕심은 내지 않았다.

"물론 대표 선수에 대한 욕심이야 없을 수는 없고, 실제로 86 멕시코 월드컵 출전에 대한 꿈이 있기도 했어요. 그러나 그런 욕심보다는 K리그를 통해 제 이미지를 바꾸는 것에 더 신경을 썼죠. 사실 고려대 시절 그 사건으로 인해 축구계에서는 저를 술 마시고 싸우는 문제아로 인식하는 분들이 많으셨거든요. 제가 열심히 뛰어도 언젠가는 사고칠 거라는 선입견을 갖고 계셨죠."

"제가 33세에 은퇴했는데, 10여년 동안 그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 노력했어요. 당시로는 33세면 엄청난 노장이었고,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가능했기에 제 이미지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뀔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젊은 선수들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한 번의 실수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평생 따라다녀요. 그걸 회복하기란 정말 힘들어요. 자기 관리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은퇴..그리고 지도자로서의 시작

줄곧 럭키금성에서 팀을 위해 헌신한 정해성은 1989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89시즌에도 28경기나 뛰면서 팀의 구심점 역할을 했기에 갑작스런 은퇴라 할 수 있었다. 프로에서 6년을 뛰면 재계약금을 줘야하는 제도가 오히려 그의 발목을 잡았다.

"89시즌까지 해서 6년을 뛰었어요. 팀으로서는 더 뛰게 하려면 재계약금을 줘야하는 상황이었죠. 당시 저는 좋은 결과를 냈었고, 연봉 인상도 100% 이상 가능했죠. 내심 재계약금을 받으면 아파트를 사겠다는 계획까지 세웠는데, 구단에서 부르더니 1년 더 하면 뭐하냐고, 지도자를 시작하라고 하더군요."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된 정해성. 그러나 팀원들을 잘 이끄는 그의 리더십은 지도자로서 큰 무기였다. 다만 현역 시절의 경험만으로는 좋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는 것도 불변의 진리였다. 그래서 정해성도 팀에 독일 연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990년에 2군을 맡아 지도해보니 선수 때의 경험만으로는 안 되겠더군요. 더군다나 제 또래 중에 86 월드컵에 나갔던 명성 있는 선수들이 많았잖아요. 그들과 지도자로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공부밖에 없었죠."

"마침 단장님이 재계약금을 못 주고 은퇴시킨 것이 미안하셨는지 격려금 2천만원을 주시길래 이 돈은 안 받을 테니 독일로 연수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던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정해성은 독일 분데스리가의 한자 로스톡과 샬케04, 보쿰 등을 돌며 8개월간 선진축구의 지도 시스템을 경험했다. 돌아와서는 이 경험을 토대로 럭키금성 2군 선수들을 지도했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며 지도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당시 우리는 훈련 프로그램 하나도 체계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았어요. 독일 연수를 통해 어떤 훈련 프로그램이 있고, 주말에 경기를 하기 위해 1주일간 어떻게 준비하는지, 선수들의 특성에 맞게 어떤 훈련을 실시하는지, 경기 전 워밍업은 어떤 형태로 하는지 등을 작은 거 하나 놓치지 않고 체크했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훈련 프로그램이 전부가 아니고, 우리 선수들에게는 어떻게 적용시킬지의 여부였어요.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죠. 2군 선수들에게 새로운 훈련 프로그램들을 적용시켰는데, 반응도 좋고 성과도 있었어요."

그리고 기회는 빨리 찾아왔다. 당시 정규리그와 컵 대회를 병행하는 형태의 시즌이었고, 럭키금성은 컵 대회 성적이 좋지 않아 리그에 전념하려는 상황이었다. 정해성은 고재욱 감독을 찾아가 2군 선수들에게 기회를 한 번 달라고 부탁했고, 고민하던 고 감독은 컵 대회 유공(현 제주)전을 준비해보라며 기회를 줬다.

"선수들을 불러서 기회는 왔다. 이제 너희가 살기 위해서는 뭔가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게 기회를 잡아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는데, 시작한 지 5분도 되지 않아 유공에게 골을 내줬어요. 다행히 한 골을 넣어 1-1로 전반을 마무리하고, 후반에 3골을 넣어 4-1로 이겼습니다."

"사실 독일 갔다 왔다고 해도 한 달만에 팀을 얼마나 바꿀 수 있었겠어요. 상대가 방심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구단에서는 독일 갔다 오더니 달라졌다며 다음 해에는 1군 코치로 승격을 시켜줬죠.(웃음)"

"독일에서의 성과에 대해 만족했기에 이후에도 시간이 조금만 있어도 해외로 나가 훈련 프로그램도 살피고, 코칭과 시스템, 현대 축구의 흐름 같은 것도 확인하게 됐어요. 축구는 계속 진화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계속 배워야 합니다. 스스로 개발하지 못한다면 선진축구를 모방이라도 해야 한다는 거죠. 우리 선수들에게 어떻게 접목시키느냐는 계속 연구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현실에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잠시 쉬고 있는 지금도 조만간 스페인으로 나가볼 예정이에요."

이후 정해성은 허정무 감독을 보필해 95년 포항, 96년부터 98년까지 전남,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AFC 아시안컵을 함께 했다. 이어 2002년에는 히딩크 감독과 함께 2002 한일 월드컵에 나가 4강 신화에 일조했다.

코치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그는 2003년부터 부천(현 제주)을 맡으면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허정무 감독과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춰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을 일궈냈고, 곧바로 전남의 감독으로 부임해 올해 8월까지 활동하는 등 정상급 지도자로서의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사실 현역으로 뛸 때에는 은퇴하면 축구계를 떠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생각했던 대로만 흐르지 않더군요. 선수들에게도 그런 이야기를 해줍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준비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다고...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말이죠."

인터뷰 중인 정해성 ⓒ이상헌

지도자 및 선수들을 위한 조언

마지막으로 정해성은 후배 지도자들과 선수들에게 조언을 한 마디 남겼다. 조언의 핵심은 소통과 신뢰, 책임감이었다.

"지도자는 선수들과의 소통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사람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내던지고 앞장선다는 신뢰를 안겨줘야 하죠. 사실 성적이 좋고 팀 분위기가 밝을 때는 상관없어요. 그러나 힘들 때 서로 으샤으샤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서로간의 신뢰가 최우선입니다."

"또한 감독은 팀 관리자로서의 역할이 중요해요. 현재는 팀마다 스태프가 상당히 전문화되어 있어요. 따라서 감독이 모든 것을 다 떠맡을 필요는 없어졌죠. 다만 각각의 전문가들이 만들어오는 것들을 종합적으로 하나로 정리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에요. 또한 선수들과 코치들, 구단과 언론을 모두 아우를 수 있는 자신만의 철학과 배짱도 갖고 있어야 하죠."

"그리고 선수들을 지도할 때 잘하는 선수라고 특별대우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건 팀도 망치고, 그 선수도 망치는 길이에요. 요즘 선수들을 보면 정신적인 면이 약해요. 어렸을 때부터 자기의 잘못은 스스로 책임지고 이겨나갈 수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지도자가 먼저 특별대우를 해주니 재능 있는 선수들이 뭔가 잘못해도 남 핑계만 대면서 나약한 선수로 전락하게 되는 겁니다. 결국 그런 선수들은 성인 레벨로 왔을 때 시련을 만나면 견뎌내질 못하죠."

"선수들에게 조언한다면 어느 시점이 되면 '축구 아니면 안돼'라는 확고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런 확고한 생각이 들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 축구에 전념해야 하죠. 그러나 그 전까지는 조금은 더 즐기면서 축구를 할 필요가 있어요. 사실 즐기면서 축구하라는 것이 말은 쉽지만, 기술 습득보다도 어려운 부분이죠. 그러나 어린 시절에는 즐기면서 축구를 하는 것이 자기 것을 만드는데 훨씬 도움이 됩니다."

열변을 토한 정해성은 미래에 대한 계획도 밝혔다. 그는 유소년 축구에 대한 구상과 함께 지도자로서의 마지막 도전도 생각하고 있었다.

"저도 이제 젊은 나이가 아니죠. 지금까지를 돌아보면 쉬지 않고 너무 달려가기만 했어요. 그렇기에 지금의 휴식기는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었고요. 충전의 시간을 통해 부족했던 부분을 준비하면서 다음 기회에 제 모든 것을 시도하고 도전해볼 겁니다."

"그 이후에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일을 해보고 싶어요. 축구를 통해 얻은 것이 많았기에 다시 되돌려줄 수 있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재능 있는 어린 선수들을 발굴해 발전시키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고, 최종적으로 제가 하고 싶은 일이기도 합니다."

글=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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