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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통제 없인 못 뛰지만.. 리베로는 내 운명"

입력 2013. 04. 04. 03:17 수정 2013. 04. 04. 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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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수비상 기업은행 남지연

[동아일보]

지난 시즌까지 GS칼텍스에서 뛰었던 리베로 남지연(IBK기업은행)은 팀을 옮긴 후 첫 시즌에 프로배구 V리그 여자부에서 수비상을 차지했다. 3일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V리그 시상식에 앞서 만난 남지연은 "6월 8일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인터뷰 사진을 찍는 게 꼭 웨딩 촬영 리허설을 하는 기분이다"라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IBK기업은행에 근무하는 남지연 씨(30·여)는 13년차 직장인. 강릉여고 3학년 때 LG정유(현 GS칼텍스)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업은행으로 옮긴 건 지난해. 3년 전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다. 마음도 지쳤다. 실적이 곤두박질쳤다. 남 씨는 "회사는 살아날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했지만 나 자신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며 "회사에 해가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 씨는 동료들 몰래 상사를 찾아 사직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상사는 새 일자리를 찾아보면 어떻겠느냐며 자리를 주선했다. 남 씨는 회사를 옮기면서 "정답 없는 문제는 없다"는 말을 되새겼다. 그 말이 힘을 발휘한 걸까. 남 씨는 올해 3년 만에 다시 자기 분야 1위 자리를 되찾았다.

남 씨는 보통 직장인들과는 조금 다른 일을 한다. 배구공을 받는 게 그의 직업. 2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그를 '국가대표 붙박이 리베로'라고 불렀다. '전문수비수' 리베로는 규정에 따라 공격은 물론이고 서브도 할 수 없고, 주장을 맡지도 못한다. 마치 눈에 띄지 않는 게 더 좋은 것처럼.

3일 서울 여의도 63시티에서 열린 프로배구 2012∼2013 NH농협 V리그 시상식을 앞두고 만난 남 씨는 "원래는 센터로 뛰었는데 고3 때 청소년 대표팀에 리베로로 뽑혀 우연히 리베로를 하게 됐다. 대표팀에 다녀왔더니 학교 코치님께서 '너 왜 이렇게 서브를 못 넣냐'고 하시더라. 대표팀에서 서브 연습을 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이상하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리베로가 내 운명일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남 씨의 취미는 만화 보기. 그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는 배구 만화 '리베로 혁명'이다. 그는 그만큼 '완벽한 리베로'를 꿈꾸며 살았다. 그러나 2010∼2011 시즌을 앞두고 고관절 부상이 찾아왔다. 리베로로서의 삶이 끝날 것만 같았다.

남 씨는 "그렇게 바닥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잘했을 때를 떠올려 보려 아무리 애써도 몸이 안 따라줬다"며 "요즘도 통증이 남아 있어 경기 전날 진통제를 꼭 먹는다. 그런데 약보다는 마음가짐이 더 도움이 됐다. 예전에는 병을 이기려 들었다면 이제는 병을 다스리며 병과 함께 사는 법을 배운 것 같다"며 웃었다.

남 씨는 이날 수비상을 탔다. 이 상만으로 기자단 투표(전체 27표)를 통해 최우수선수(MVP)로 뽑힌 기업은행 동료 알레시아(11표)나 신인상을 탄 GS칼텍스 후배 이소영(26표)보다 눈에 띄는 존재가 되기는 힘들다. 남자부 MVP 레오(22표·삼성화재), 신인상 양준식(19표·KEPCO)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운동선수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걸 잊는다. 그래서 사소한 실수 하나에 '저건 선수도 아니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최고의 회사원, 학생, 주부가 될 수는 없는 법. 적어도 남 씨는 자기 분야에서 국내 최고다. 그런 의미에서 남 씨야말로 눈에 띄지 않아도 묵묵히 제 몫을 다하며 사는 우리 보통 사람들에게 '희망의 증거'라 할 것이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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