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별의 풋볼씬] 장크트파울리 U-23 박이영, 꿈을 향한 '1만 마일'의 여정

김한별 2015. 10. 21.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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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탈코리아=함부르크(독일)] 열 다섯 살 소년이 꿈을 꿨다. ‘언젠가 꼭 유럽에서 축구선수를 해야지.’ 스물한 살 청년은 유럽에서 축구를 하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18,287km 여정을 떠났다. 꿈은 7년만에 현실이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떠난 유럽 3개국 테스트 끝에 그는 독일 분데스리가 2부리그 FC 장크트파울리 U-23팀에 입단했다. 주인공은 ‘박이영(21)’. 국내 축구팬들에게는 낯선 이름이다. 그는 연령별 대표팀 명단에도 K리그 선수명단에도 이름을 올린 적 없는 무명선수였다.

Scene#1. 맨체스터에서 품은 유럽 축구의 꿈

박이영은 거여초등학교 4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어렸을 적 살던 동네에 축구부가 없어 제 발로 축구부가 있는 학교를 찾아갈 만큼 어려서부터 축구 없인 살지 못했다. 거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인중에 진학한 박이영은 보인중 3학년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프리미어컵’ 한국 대표로 영국에 가게 되었다.

“보인중이 워낙 축구 명문이잖아요. 당시 3학년 선수가 16명정도였는데 저는 그 중 후보 선수였어요. 그 대회에서 교체로 2~3경기를 뛰었는데 생애 처음으로 해외 선수들이랑 붙어본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요. 영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에 ‘유럽 어디서든 축구를 해야겠다. 축구 선수 생활을 하면서 한 번은 유럽에서 꼭 뛴다’ 속으로 다짐했어요. 그런데 그 꿈을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다 잊고 살았죠.”

박이영은 보인중 졸업 이후 서울체고에 진학했다. 그는 서울체고 축구부의 마지막 세대다. 1학년이었던 2010년 겨울, 팀이 2012시즌을 끝으로 해체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학진학을 위해 전학도 고려했지만 박이영은 결국 서울체고에 남았다.

“후배들도 떠나고 더 이상 신입생도 없었죠. 3학년 당시 주말리그는 동기 선수 16명으로만 소화했어요. 완전 ‘외인구단’이었죠. 축구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어요. 정말 간절하게, 절박하게 뛰었어요. 그런데 졸업이 다가오는 데도 대학 진학에 관한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어요. 12월이 되어서야 한 수도권 대학 팀에 자리가 났고, 진학을 고려하던 중 필리핀리그에서 뛸 한국인 선수를 모집한다는 애기를 들었죠.”

Scene#2. 필리핀에서의 프로 생활, 잊었던 꿈을 다시 찾다

박이영은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필리핀 리그(United Football League) 로 떠났다. 첫 소속팀이었던 팀 싸커루 FC(Team Socceroo FC)는 필리핀 2부리그 소속이었다. 주축 선수들이 한국인 선수로 꾸려진 ‘팀 싸커루’는 한 시즌 만에 1부리그 승격에 성공했고 박이영은 이듬해 같은 팀 소속으로 필리핀 1부리그를 경험했다. 수비형 미드필더인 박이영은 당시 리그 24경기에서 21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했다. 휴식기가 지난 후 박이영은 리그 상위권 팀인 파창가 딜리만 FC(Pachanga Diliman FC)로 이적해 컵대회를 소화했다. (*우기가 있는 필리핀은 상반기 동안 타이트하게 시즌을 치르고, 후반기에는 컵대회를 치른다)

“필리핀리그 수준 낮은 것 맞아요. 하지만 갓 스무 살이었던 제가 경험을 쌓기에는 좋은 곳이었어요. 필리핀에도 남미, 유럽 선수들이 많이 들어와 있거든요. 심지어 2부리그에도요. 첫 시즌이 지나고 돌아보니, 2부리그에는 ‘피지컬이 좋은 선수는 있어도 공을 잘 차는 선수는 없구나’ 느꼈죠. 이듬해 1부리그에서 뛰어보니 수준이 또 달랐어요. 필리핀 국가대표 선수들도 뛰고 있었으니까요. 전반기 지나고 돌아보니 해볼만하다 싶었고 시즌이 끝나고 나니 ‘내가 이 곳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다 배웠다’라는 후련한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제 나이는 만 스무 살이었고 잃은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축구도 한층 성장했죠. 한국에서는 패스 타이밍이 늦다고 혼 났던 플레이가 ‘여유 있다’, ‘생각하고 볼을 찬다’라는 평가로 바뀌니까 시도할 수 있는 게 많았어요. 정말 원 없이, 마음껏 플레이 했어요. 외국에 나가면 시야가 넓어진다고 하잖아요. 축구를 보는 눈도, 세상을 보는 눈도 뜨였죠.”

그리고 박이영은 필리핀에서 그간 잊고 살았던 ‘유럽 축구의 꿈’을 다시 마주했다. 스페인 출신의 한 동료가 건넨 말이 그를 깨웠다.

“팀 싸커루에 파블로(Pablo Arguelle calles)라는 스페인 동료가 있었어요. 스페인 하부리그에서 선수 생활하다가 영어도 배울 겸, 축구도 할 겸 필리핀리그로 온 친구였어요. 한 날은 그 친구가 저보고 “유럽 한 번 가봐. 너 유럽에서도 통할걸? 게다가 너 어리잖아”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선 ‘나 왜 유럽 안 가고 여기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열다섯 살 이후 잊고 살았던 ‘유럽 축구’에 대한 꿈을 파블로가 찾아준 거죠.”

박이영은 필리핀 생활을 차츰 정리하고 유럽 진출을 준비했다. 팀 동료 파블로가 스페인 에이전시에 박이영의 프로필과 하이라이트 영상을 메일로 보냈지만 답변은 없었다. 2014년 컵대회를 마지막으로 한국에 귀국한 박이영은 모든 수단과 인맥을 동원해 해외 진출 루트를 찾았다. 기회는 우연히 왔다. 필리핀리그 진출 이후 프리시즌동안 한국에서 훈련했던 아마추어 축구클럽 TNT FC 모임에 가던 중 외국인 멤버 세바스찬(Sebastien Neumann)을 만났고 사정을 이야기 했다. 세바스찬은 박이영의 유럽 도전을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그는 박이영의 프로필과 영상을 연결 가능한 모든 루트에 전달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언제든 비행기를 탈 수 있게 짐을 싸놓고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포르투갈 프리메이라리가의 CS 마리티무에서 연락이 왔다.

Scene#3. 스물 세시간을 날아 포르투갈 마데이라로

박이영은 홀로 비행기에 올랐다. CS 마리티무는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에서도 비행기로 2시간여 떨어진 마데이라제도에 있는 팀이다. 마데이라로 가는 길은 멀고도 길었다. 비행기 안에서 수없이 마음을 다스렸다.

“솔직히 선수 혼자서 테스트를 보러 간다는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상황이죠. 유럽 구단 관계자들이 바보도 아니고. 에이전트가 없는 것부터가 프로페셔널 하지 못하잖아요. 그래도 저는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유럽에서 축구 하는 것이 제 ‘꿈’이었으니, 이렇게 무모하게라도 부딪혀 보고 싶었어요.”

시차에 적응할 새도 없이 박이영은 CS 마리티무에 합류했다. 박이영에게 주어진 시간은 15일이었다. 첫 유럽 테스트는 녹록하지 않았다. CS 마리티무엔 영어에 능통한 코칭스텝이 없었다.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으니 답답했다. 가진 능력의 전부를 보여줘도 아쉬운 상황인데 훈련이 끝나면 매번 아쉬움이 남았다. 테스트 마지막 날, 그가 CS 마리티무에 들은 답변은 ‘다른 선수를 찾아보겠다’였다.

“그 말을 듣고선 한동안 멍했어요. CS 마리티무 말고는 연락을 받은 곳이 없었기 때문에 여기가 전부라고 생각했거든요. 어떤 결과든 순종하겠다고 항상 다짐했지만 막상 실패하니 막막하더라고요. 그래도 한국에 돌아가고 싶진 않았어요. 유럽 선수들과 직접 부딪히면서 배우고 느끼는 바가 컸거든요. 특히 훈련 자세요. 훈련 몰입도가 상상을 초월했어요. 웃으며 장난 치던 선수들이 훈련이 시작되면 미친놈처럼 변하더라고요. 매일 훈련이 신선한 충격이었어요. 한 번 더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당장 플랜B는 없는데다 하루 하루 체류비가 드는 상황이었으니 임시 거처를 찾아야 했어요. 문득 오스트리아에 살고 계신 이모가 생각났고 곧장 짐을 싸 오스트리아 비엔나로 넘어갔죠.”

Scene#4. 수백 통의 메일 끝에 닿은 슬로바키아

박이영은 오스트리아에서 지내는 동안 동유럽 축구팀들 중 각국 2부, 3부리그 클럽팀의 명단과 메일 주소를 모두 검색했다. 그리고 매일 백 통에 달하는 메일을 동유럽 구단 관계자들에게 보냈다. 초조하게 답장을 기다리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나에게 기회를 줄 수 있는가?’라고 적힌 메일 속 진심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를 수없이 바란 밤들이 지났다.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 몇 팀이 답장을 보내왔다. 박이영은 포르투갈에서 한 차례 낙방을 경험했기에 즉시 전력 감으로 뛸 수 있을 가능성이 있는 곳을 기준으로 팀을 고민했다. 그리고 슬로바키아 3부리그 소속인 ‘OFK 테플리츠카 나드 바홈’(OFK Teplička nad Vahom, 현 슬로바키아 2부리그)에서 두 번째 도전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어렵게 만든 기회였는데, 테스트는 오래가지 못했어요. 3일간 훈련을 한 후 슬로바키아 2부리그 팀과 연습 경기가 있었어요. 그 경기에서 세 번 큰 실수를 범했는데, 모두 실점으로 연결됐어요. 저 때문에 세 골을 먹고 진 거죠. 지금껏 축구 하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경기가 끝나고 웃음이 나오더라고요. 너무 어이가 없어서요. 게다가 저는 입단 테스트 중인 선수였잖아요.”

“OFK에서는 이틀 정도 더 지켜보기를 원했어요. 하지만 한 경기에서 세 골이나 내준 선수에게 무슨 관심이 남아 있겠어요. 사실 제가 혼자서 유럽 구단을 알아보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이모부께서 보시곤 안쓰러웠는지 독일에 있는 토마스(Thomas Schultze)라는 축구광 사업 파트너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테스트 자리를 알아봐 줄 수 있는지 물어보겠다고 하신 적이 있거든요. 마침 그 토마스 아저씨한테 연락이 온 거예요. 자기 지인 중에 독일 5부리그 코치가 있는데, 만나보겠느냐고요. 그 주 주말에 함부르크로 떠났어요. 속으로 다짐했죠. 여기가 마지막 도전이라고.”

Scene#5. 마지막이란 마음으로 함부르크로

함부르크에서 박이영은 ‘조니’(Jean-Pierre Richter)라는 코치를 소개 받았다. 그리고 이틀간 독일 5부리그 FC Suderelbe에서 트레이닝을 하며 기량을 점검 받기로 했다. 유럽에 온 이후 가장 만족스러웠던 이틀간의 트레이닝이 끝나고 맞은 수요일 아침, 토마스 아저씨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조니 코치가 너를 장크트파울리 U-23팀에 추천했어. 호텔 앞으로 차 가져갈 테니 훈련 준비해서 내려가.” 결코 놓쳐서는 안 되는 기회가 찾아 왔다.

“유럽에 온 이후 가장 간절해졌던 순간이었어요. 훈련장에 도착해서 훈련복을 받고 개인 캐비닛에 짐을 푸는데 그 낯설면서 설레는 기분은 참… 장크트파울리에서는 3일간의 테스트 기간을 제안했어요. 약속한 3일이 지나고 일주일을 더 보자고 하더라고요. 긍정적인 답변이라 기뻤지만 매일 피가 말랐죠. 하루를 망치면 이대로 끝이니까요. 일주일이 지나고 들은 대답은 ‘일주일을 더 보자’였어요. 일주일을 또 하루살이로 살았죠. 그리고 두 번째 일주일이 끝나는 날 코치가 저를 부르곤 말했어요. ‘우리는 너와 계약 하고 싶다. 에이전트는 어디 있나?’ 온몸에 소름이 돋았죠.”

Scene#6. 당신을 도전하게 만드는 축구선수

박이영은 현재 FC 장크트파울리 2군이 속해있는 레기오날리가(4부리그)에서 시즌 12경기 중 8경기에 출전해 1도움을 기록 중이다. 그를 함부르크로 이끌어주고, 손흥민의 에이전트인 티스 블리마이스터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박이영을 소개한 토마스 아저씨는 현재 박이영의 독일 홈스테이 호스트 가족이 되었다.

박이영의 꿈은 유럽에서 축구를 하기 위해 그가 날아온 1만 마일보다 더 멀고 높은 곳을 향해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라고 말한 박이영은 여전히 도전 중에 있다. 어쩌면 그의 도전은 끝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밀레른토어(장크트파울리 1군 홈 경기장)에서 멋지게 데뷔해야죠. 그리고 태극마크도 달아보고 싶어요. 제게 국가대표는 먼 이야기였거든요. 목표로 잡지도 못했어요. 그런데 독일에 와있으니, 장크트파울리 경록이나 함부르크 2군 동수, 영재가 올림픽 대표로 차출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 보게 되잖아요.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이 대표팀에 가는 것을 보면서 ‘내 이름을 조금씩 알리면 한 번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까. 국가대표 그 근처에라도 닿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소망이 생겼어요. 그리고 앞으로 축구를 하면서 사람들에게 동기부여를 주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제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도전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pilogue 인터뷰 말미에 물었다. 당신을 계속 도전하게 만드는 힘은 무엇이냐고. 두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무겁게 인터뷰를 이끌던 박이영이 그제서야 자기 나이에 꼭 맞는 웃음을 지었다. "저는 축구 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아무리 힘든 순간이 와도, 힘든 운동을 해도 축구를 할 수 있다면 다 버틸 수 있어요."

"저는 축구 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온 것뿐이에요. 물론 유럽에서 뛰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남보다 조금 발버둥을 쳤죠. 한참을 발버둥 치다 멈춰서 뒤를 돌아보니 조금씩 나아가고 있더라고요. 그때 느꼈죠. ‘아, 꿈이 아니라 현실이구나.’ 제 꿈을 더 이상 꿈 속이 아닌 현실에 두고 저는 따라만 왔어요.”

눈 앞에 꿈이 꿈처럼 이뤄진 현실에 사는 청년이 웃고 있었다.

글=김한별
사진=김한별, 박이영, Yong Jin J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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