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야구in ①] '야구 개척자' 이광환 육성위원장의 57년 야구인생

서장원 2016. 12. 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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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서울 서장원기자] '야구 개척자'

이광환 KBO 육성위원장에게 어울리는 수식어다. 국내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한참 전인 1960년대 선수시절을 보냈고, 1982년 프로야구 원년 OB베어스 코치를 시작으로 프로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체계와 시스템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던 국내 프로야구계에서 최초로 투수 분업화를 시도하고 이를 도식화한 스타(★) 시스템을 만들어 현대 야구의 기틀을 다진 국내 프로야구계의 선구자다.

1948년 생으로 올해 68세인 이광환 육성위원장은 전국 방방곡곡 현장을 누비며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해 온 힘을 쏟고 있다. 전국 각지 중·고등학교에서 야구부가 창단되거나 사고가 터졌을 때마다 직접 현장에 달려가고, 틈틈히 서울대학교에서 야구부를 지도하고 있는 그는 서울대학교 학생들에게 체육 교양과목을 강의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프로야구계를 떠난 뒤에도 음지에서 보이지 않게 한국야구의 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있는 이광환 육성위원장을 만나 그의 57년 야구인생을 들어봤다.

Q.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한참 전부터 야구선수로 활동을 했습니다. 야구선수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광환 육성위원장 : 초등학교 4학년 때 합반 대항 야구 대회가 있었다. 거기서 눈에 들어서 야구를 시작하게 됐다. 꿈을 가졌다기보다 우연한 기회로 야구를 시작하게 된 거다. 마침 당시 담임선생님이 야구 부장이었다. 끌려들어갔다고 보면 된다(웃음).

Q. 지금도 우리나라는 야구를 하기에 좋은 환경은 아닙니다. 위원장님이 야구를 했을 땐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을 것 같습니다.

이광환 육성위원장 : 그렇다. 당시는 야구 장비가 국산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 미군이 쓰다가 버린 것들을 파는 시장에서 구입해서 사용했다. 야구공도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을 때였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 야구를 하면서 중간에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나?)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대학교 2학년 때 야구에 대한 회의를 느껴서 그만두려고 했었다. 사춘기를 겪던 시절이었고 주변 상황 또한 야구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었다. 또 가치관에 변화가 있던 시기였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대학 졸업 후 한일은행에 들어가 선수생활을 하다가 빨리 은퇴를 하게 된 것도 회사 상급시험을 보기 위해서였다. 시험이 어려웠기 때문에 야구에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또 당시는 프로야구팀도 없었을 뿐더러 야구선수로서 메리트가 없었다. 그저 하루빨리 회사 상급시험을 봐서 통과하는 것이 목표였다.

Q. 짧은 선수시절을 보냈지만 고등학교 선수시절 이영민 타격상을 수상할 정도로 타격에 재능을 보였습니다. 본인의 선수시절을 되돌아본다면.


이광환 육성위원장 : 대학시절에도 타격상을 받았고 실업팀에 와서도 신인상과 대회 최우수상도 받았다. 할 만큼 했다. 군대에 가서도 야구를 했다. 후회는 없었다. 제대하니 나이가 29살 이었다. 요즘이야 야구를 오래하지만 당시만 해도 29살이면 굉장히 많은 나이에 속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들 야구를 빨리 그만두고 회사 승진시험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 땐 그런 분위기였다.

Q. 선수 은퇴 후 프로야구 원년(1982년)에 OB베어스 창단 타격 코치로 영입되면서 프로 지도자로 데뷔했습니다. 원년이었던 만큼 체계적으로 훈련이나 교육 스타일이 정립돼있지 않았을 텐데, 당시를 회상해보자면.


이광환 육성위원장 : 선수를 은퇴하고 모교였던 중앙고등학교에서 야구부 감독 생활을 했다. 도와달라고 해서 봉사하는 마음으로 갔다. 월급도 없었다. 그러다가 1982년에 프로야구가 만들어지면서 OB베어스에서 코치를 시작하게 됐다. 당시에는 타격코치 뿐만 아니라 작전코치도 해야 하고 수비코치도 해야 했다. 분업이 되어있지 않을 때였고 팀에는 김영덕 감독과 나, 그리고 김성근 코치 셋 밖에 없었다. 김성근 코치는 투수코치니까 나머지는 다 내가 맡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땐 선수들도 많지 않았다.

Q. 86년부터 87년까지 일본 세이부와 미국 세인트루이스 구단에서 코치 연수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어떤 계기로 외국에 나가게 됐나요.


이광환 육성위원장 : 프로지도자로서 4~5년을 야구를 보다보니까 말이 프로야구지 실상은 유니폼만 바꿔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도나 시스템이 사실상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야구 역사가 오래된 선진국에 가서 시스템을 배워야 함을 느꼈다. 그래서 외국으로 떠났다. 특히 마운드 운용과 코칭 스태프 운용 방법에 중점을 두고 갔다.

일본을 먼저 갔는데 당시 일본 역시 완전한 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다. 마운드 운용 시스템을 10이라 치면 일본은 5밖에 안되어 있었다. 이후 미국에 가서야 ‘이거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과 미국에 있으면서 그 나라 모든 구단의 풀시즌을 기록했다. 일본에서는 하루에 12개 구단을 기록하는데 1시간 이상이 걸렸다. 미국 메이저리그에는 당시 총 26개 구단이 있었는데 모든 구단을 기록하는데 2시간 이상이 걸렸다. 기록을 해보니까 답이 나와 있었다. 그것을 토대로 한국에 돌아와서 투수 분업화를 시도했고 스타(★) 시스템을 만들어냈다. 선수들과 기자들에게 설명을 하기 위해 이를 도표화시킨 거다. 당시에는 구단들이 선발투수 예고를 잘 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나 혼자 선발투수 예고를 했다. 구단에 우리 전력을 먼저 상대팀에게 가르쳐줬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웃음). 그런데 전력을 속이면 결국 스스로 망가진다. 분업화 없이 잘 던지는 투수만 던지니까. 미래를 위해서 이런 시스템으로 가야하는데 단순히 이기기 위한 야구만 했다. 선수들도 처음에는 매일 던지던 투수가 4~5일씩 휴식을 주니 “감독님. 저 그렇게 쉬면 감 다 잊어버립니다”라고 말하더라. 코치도 선수도 구단도 선진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Q. LG트윈스 감독을 맡으며 당시 관리 야구가 주류였던 프로야구에 자율 야구를 선보였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또 자율 야구를 바탕으로 LG트윈스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고요.


이광환 육성위원장 : ‘자율’은 선수들이 경기에 임하는 과정, 시즌이 끝나고 해야 하는 것 등 체계적인 시스템의 기반 하에 포함돼 있는 것이다. 분업화를 통해 자신들이 할 일이 정해져 있으니 자연스럽게 자율성이 보장되는 것이다. 선수들을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감독을 하며 시스템 도입 전에는 경기 시작 두 시간 반 전에 경기장에 나왔다. 하지만 시스템 도입 후에는 최소 4시간 전에 경기장에 나와 식사법부터 개인연습 훈련까지 체계적으로 관리를 시작했다. 나오는 순서도 예전에는 선수, 코치, 감독 순이었다면 시스템 도입 후에는 거꾸로 감독, 코치, 선수 순으로 경기장에 도착하도록 바꿔버렸다. 감독과 코치가 먼저 경기장에 나와 선수가 어떻게 할 것인가 계획을 세우고 선수들에게 이를 전파했다. 선수들의 도우미 역할을 한 거다. 거기다 코치들에게 배팅볼까지 던지라고 시켰다. 그러다보니 선수위에 군림하던 지도자들이 선수들의 도우미 역할을 한다며 반발이 일었다. 어찌됐든 나는 선수위주의 야구를 했다. 프로 선수들이다. 결국 야구는 선수들이 잘해야 하는 거다. 지금 프로야구는 이러한 체계가 확립됐지만 당시엔 사람들이 ‘자율’이 선수들을 내버려두는 거라며 폄하했다.

Q. 2008년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한 우리 히어로즈 초대 감독으로 선임됐는데, 당시 위원장님의 수제자 중 강정호가 있었습니다. 강정호는 어떤 선수로 기억하고 있습니까?


이광환 육성위원장 : 우리 히어로즈 감독도 가고 싶어서 간 것은 아니었다(웃음). 당시 8개 구단 중 한 구단(현대)이 없어질 위기에 처해있었다. 7개 구단으로는 야구가 되지 않는다. 난리가 난거다. 관계자가 와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1월이었다. 다른 팀 같았으면 벌써 시즌 개막 준비를 할 시기다. 이 문제도 지지부진하다가 내가 선수를 처음 본 것이 2월 15일 이었다. 무슨 훈련이 됐겠는가. 선수들도 팀이 없어져 마음에 상처를 받은 상태였다. 이 같은 상황 때문에 선수 파악도 제대로 못하고 시즌에 돌입했다.

팀에 가서 선수단을 보니 캐처(포수)가 부진했다. 그래서 코치에게 물어보니 2군에 캐처를 곧잘보는 선수가 있다고 하더라. 1군으로 데려오라고 했다. 그 선수가 강정호였다. 캐처를 시켜보니까 소질이 있었다. 그래서 내야도 한번 해보라고 했더니 글러브로 공을 잡고 송구하기까지 동작이 매우 빨랐다. 국내에서 제일 빨랐다. 당시 유격수 자리에 황재균이 있었는데 어깨가 좋은 황재균을 3루로 보내고 강정호를 유격수로 기용했다. 이를 두고 팬들에게 욕을 많이 먹었다. “강정호는 감독의 황태자”라며 편애한다는 소리도 나왔다. 또 당시 3루를 보던 정성훈을 LG에서 FA로 데려간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정성훈이 이적할 때에 대비해서 포지션에 변화를 준 것이다. 순수하게 팀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강정호를 예뻐하고 황재균을 미워해서 포지션 변경을 시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후 두 선수 모두 해당 포지션에서 뛰지 않았냐. 내가 보는 눈이나 다른 팀 감독들이 보는 눈이나 다 비슷한 거다.

Q. 감독직을 수행하며 한편으로는 제주도에 사비를 털어 야구박물관을 건립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이광환 육성위원장 : 과거 미국에 있으면서 놀랐던 점이 미국에는 크고 작은 야구 박물관이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야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카디널스 스프링 캠프 당시 호텔 앞 조그만 해변가에 야구 박물관이 있었다. 가보니까 100평도 되지 않는 단층 건물에 야구 선수들에 대한 소개나 물건들이 전시돼있었다. 엄청난 쇼크를 받았다. ‘우리나라는 스포츠는 있어도 스포츠 문화는 없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걸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LG 감독시절 선수들에게 돈보다 더 귀한 게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야구 박물관을 건립하게 됐다. 우리나라도 스포츠 문화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야구 박물관이 있음으로 해서 선수들과 야구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교육적 효과를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다. 직접 운영하다가 15년 전에 서귀포시에 기증했다.

Q. 2010년부터 서울대학교 야구부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맡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광환 육성위원장 : 당시 내가 경기운영위원장(감독관)에 내정이 되어있었다. 그런데 총재가 갑자기 날 부르더니 ‘우리도 앞으로 지도자들을 해외로 내보내야 하고 우리나라 지도자들도 교육이 돼야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나에게 아카데미를 맡아달라고 하더라. 3번을 고사했지만 할 수 없이 아카데미를 맡게 됐다.

서울대학교에 아카데미 설립을 확정하기까지 6개월의 시간이 걸렸다. 서울대학교에서 굳이 만들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력 끝에 결국 베이스볼 아카데미를 설립할 수 있었다. 이곳을 통해 지도자들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난 1월부터 베이스볼 아카데미에 내려오던 예산 지원이 끊기면서 베이스볼 아카데미는 더 이상 운영되지 못했다. 이후 인적 인프라의 중요성을 깨닫고 서울대학교 야구부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남들은 나를 서울대학교 감독이라고 부르지만 나는 감독이란 생각을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새로 야구단에 들어온 애들을 대상으로 야구를 설명해주고 있다. 하지만 단체적인 부분만큼은 엄격하게 다스리고 있다. 협동, 희생, 인내심이 부족한 사람들은 모두 내보냈다. 나는 야구부 아이들이 야구를 통해서 실력도 실력이지만 이 같은 정신을 배우길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Q. 오래전부터 여자야구, 유소년야구 발전을 위해 많은 힘을 쏟고 있는데,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십니까.

이광환 육성위원장 : 내가 2006년에 처음 육성위원장을 맡으면서 내세운 육성방안 3가지가 있다. ‘유소년야구’, ‘여자야구’, ‘티볼 보급’이다. 특히 티볼은 그 당시만 해도 국내에 전무한 상태였다. 티볼 협회가 있었지만 제대로 운영되지 않았다. 관계자들을 불러 티볼은 야구의 씨앗이니 같이 보급하자고 말했다. 이후 전국 1500개 학교에 티볼 강습을 다녔다. 또 김영삼 대통령을 티볼 협회 총재로 모셔 티볼 보급을 위해 힘썼으며 초등학교, 중학교 교과과정에도 티볼을 넣었다. 이렇게 시작한 것이 10년 만에 티볼은 전국적으로 보급이 됐다. 전국교대대항티볼대회도 만들었다. 만든 후 현재까지 매년 성황리에 개최되고 있다.

여자야구는 1976년 여자야구연맹을 만든 후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고, 유소년야구는 내가 육성위원장으로 왔을 때만 해도 리틀 야구팀이 총 20여개였다. 지금은 그 수가 160개로 늘어났다. 내가 내세웠던 세 가지 목표는 달성했다.

Q. 프로야구 현장 복귀에 대한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광환 육성위원장 : 전혀 없다. 그건 노욕이다. 젊은 감독들이 잘 하고 있지 않나. 난 할 만큼 했다. 자기 나이에 맞게 할 일이 다 있는 거다. 지금하고 있는 육성 관련 일은 해왔던 일이고 나이가 들어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 일도 곧 정리를 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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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포츠서울 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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