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따뜻한 축구] 나도 많이 비겁했다

조회수 2017. 9. 4. 16:3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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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계절에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우리집은 평창동의 꼭대기에 있다. 시내에 나갈때면 두개의 길이 있다. 곧장 내려가서 성북동 고개를 넘어서 혜화동을 지나는 길과 오른쪽으로 돌아서 자하문 터널을 지나 청와대 광화문을 지나는 방법이다.



쭈욱 내려가는 길은 손석희 앵커의 집 골목앞을 지나가야 하고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김기춘 씨의 집을 지나가야 한다. 한동안은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사 차량과 백여명의 기자들이 김기춘씨 집 앞에서 뻗치기를 하더니 어느날은 손석희 앵커의 집앞으로 태극기 부대가 몰려와서 집회를 하기도 했다.



서울대학 병원 앞 큰 길에는 백남기 어른의 비극을, 광화문 쪽으로 돌아 가면 세월호의 비극을 아파하는 현수막과 푯말때문에 늘 마음이 답답했다. 이 일들에 관계되어 있거나 관심이 특별한 많은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냥 나처럼 살아가는 사람들도 이유없이 우울하고 무겁게 가라앉은 몇 해를 보냈다.

어느날 아내와 나는 청운동 주민센터의 사거리 신호등 앞 빨간 불에 멈춰 섰다. 키가 작은 아주머니가 사거리 주민센터 옆에 있는 작은 국수집에서 일인시위에 쓸 커다란 표지판을 들고 나왔다.

그날은 두꺼운 파커를 입고도 모자라  온몸을 모자와 장갑 머풀러로 단단히 감싸고 무장을 해야하는 유난히 추운 겨울 아침이었다.

시위판을 들고 집에 까지  다닐 수가 없으니 국수집에 맡기고 다니는 것 같았다. 그걸 꺼내고 문을 닫는 아주머니의 뒷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 국수집 주인은 괜찮을까?

세월호 가족의 아픔보다 국수집 주인이 먼저 걱정이 되는 순간 내몸에 배인 위선과 비굴함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 부끄러움을 잊을 수가 없었다. 못나고 이기적이고 어찌보면 잔인하기까지 한.

어느날 아내는 그 순간이 너무 미안했는지 그 분들에게 국수를 대접하고 싶다며 가게를 다녀왔다. 내가 나타나면 얼굴을 알게되니 귀찮다고 혼자서 들어 갔다.

가게에 들어가 눈치를 살폈는데 주인은 국수를 휘휘 삶더니  그곳에서 시위를 하는 세월호 가족들과 머리를 맞대고 점심을 드시더라고 했다. 가족처럼...

만약 세상에 나같은 사람들만 있었다면 세월호 가족은 그 긴 시간을 버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다행이 이렇게 구석구석에서 손잡아주고 위로해 주고 함께 해 주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세월호가 물밖으로 나올수 있었을 것이다.

총선이 시작되면서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이 출마를 했다. 나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세월호 가족들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그를 통해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작지만 후원금을 보내기로 했다. 그러나 결국 나나 아내의 이름으로는 보내지는 못했다.

알 수 없는 부담감때문에  남의 이름을 빌리기로 했는데, 더 슬픈 것은 우리에게 이름을 빌려준 그 친구도 자기 이름으로 못하고 전업주부인 애기엄마 이름으로 보냈다고 했다.

본인 이름으로 보내기에는 직장이 너무 번듯한 탓에....

세상을 바꾼 용감한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나처럼 비겁한 사람들도 많다. 촛불을 들면서도 행여 남의 눈에 띌까봐 얼굴을 가리고 나를 숨기는 이 못난 모습을 한 사람들 때문에 지난 수 년 동안의 혼돈은 더 깊어졌을 것이다.

침묵은 금이 아니고 나약함 일 뿐임을 배웠다. 지난 한 주는 대통령 취임 100일이라며 갖가지 얘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같은 사람에게 취임 100일이라고 해서 특별한 일이 있을리 없지만 그동안 알 수 없는 뭔가에 눌려있는 듯한 무거움이 많이 가벼워 진 것은 사실이다.

우선 청와대 앞을 지날 때면 경찰이 차를 세우면서 자동차 문을 내리게하고  "어디 가십니까?" 하고 묻던 일을 더이상 하지 않는다. 이제는 차를 세우지도 않을 뿐 더러 인사까지 해준다. 사실 그동안 은근히 스트레스였다.

"평창동에 간다!"고 한 들 안보내 줄 리가 없을 터인데, 우리집 기사아저씨는 청와대와 좀 더 가까운 부암동이나  청운동에 간다며 필요없는 거짓말을 했다.

그때는 왠지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공연히 주눅 들었던 게 부아도 나고 억울한 마음이 든다.

죄를 짓지 않았음에도 미세한 두려움이 항상 공기처럼 나를 누르고 있었다. 그렇다고 새로운 대통령이 꼭 나를 편하게 하는 것 만은 아니다. 어느날 갑자기 눈부시게 하얀 와이셔츠를 입고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함께 만면에 웃음을 띄면서 떼로 나타났다.

이건 반칙이다. 민폐다. 우리들의 작은 생활에 혼란을 준다.

지난 6월쯤이다. 박찬호와 골프를 치다가 내가 물었다.

"찬호야, 너 장어구이 좋아하냐?"

"네, 진짜로 좋아해요."

"우리집 장어구이가 기가막히게 맛있어. 부석거리지 않고 쫄깃거리는게 우리집 별미야. 우리집에 와라!"

"와우...좋아요!"

이렇게 자랑질을 하다가 그 끝에 뜬금없이 일을 만드는 것은 항상 나다. 그러나 '밥은 여럿이 먹어야 맛있다!'며 일을 키우는 것은 아내다.

이럴때 모집책은 주워온 아들 배성재.

아내가 '밥먹자!'이러고 문자를 돌리면 더러는 넘치게 모아오기도 하는데 요즘은 실력이 많이 줄었다.

성재가 실력을 발휘하면 우리집은 늘 북적였다.
성재의 실력이 예전같지 않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아내는 내가 백수라서 호응도가 떨어진 거지 성재가 실력이 줄어든 것은 아니라고 했다.

그런가??

가뜩이나 모두들 바빠서 모이기가 쉽지 않은데 성재가 뜬금 없는 걱정을 했다. 우리 핵심멤버 중 두명이 청와대에서 밀고 있는 '얼굴 패권주의'에 못 따르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빼놓고 몰래 장어를 먹기에는 뒷감당하기가 쉽지않은 대단한 인물들이다.

아내도 그 얘기를 듣더니 청와대의 얼굴패권주의 방침에 주눅이 들었는지 "글쎄...."만 연발할 뿐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틀쯤 있다가 희소식이 들렸다.

고민거리 당사자인 김찬헌 PD가 스페인으로 출장을 간단다.

아무래도 고민할만 하다

성재는 신이났다. 요즈음 청와대의 방침이 얼굴이 안되는 의원들을 일본 중국 러시아에 특사로 내보내는 것이라며 찬헌PD의 출장도 청와대의 방침에 따른 것이라며 좋아했다.

말도 안되는 소리를.....

아내는 반색을 했다.

찬헌PD는 나보다 아내를 더 따르는 듯하다.

"그래? 잘됐네, 근데 화영이는?"

이화영 PD는 SBS 스포츠의 실력파다.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마녀피디'로 아주 유명하다.

이화영PD는 SBS스포츠의 실력파다.

평소 아내는 화영PD를 '일당 백을 해내는 보물'이라며 엄청나게 아끼는데 막상 청와대가 민다는 '얼굴패권주의'앞에서는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걱정 마세요. 예원이가 있으니 한명 정도는 커버가 됩니다."

"그래, 그러면 되겠다."

다른사진들과 다른점을 찾다면 이곳에는 장예원 아나운서가 있다.

그렇게 해서 미모의 장예원 아나운서가 이화영PD를 도와주는 것으로 정리가 되는 듯 하더니 그게 또 틀어진 모양이었다.

"큰일 났습니다, 예원이가 갑자기 대전출장이 잡혔데요."

"저런.."

그러더니 이번에는 아내가 해결책을 내놓았다.

"괜찮아 괜찮아, 세찌 여자 친구도 올거야!"

"그래요??? 그럼 두명은 커버 가능합니다!!"

아니 이화영 PD 가 문제라더니 왜 두명이라는 거지? 그럼 나도??

내앞에서 말을 못했을 뿐 나도 '걱정꺼리'에 끼어있었던 모양이다. 멀쩡한 사람을 걱정거리로 만드는 청와대. 며칠전 방송에서 유시민작가도 투덜거리는 것을 보니 피해자가 우리만은 아닌듯 하다.

아내가 얘기해줬다.

요즘 젊은친구들은 얼굴패권주의를 "안구 복지"라고 부른다고. 그런거 안해도 이전보다 나를 누르는 공기가 가볍고 답답해서 무거웠던 어깨도 가벼워 졌으니 와이셔츠 입고 떼로 나타나서 멀쩡한 사람들 기죽이는 일은 말아주시지요.

하하하

오래전부터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세월호 가족 얘기를 꺼내다 보니 분위기가 너무 무거워서 즐거운 반항[?]을 했는데 막상 쓰고나니 김정은이 나를 너무 철없이 만들어 버렸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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