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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우의 MLB+] 휴스턴은 어떻게 WS 우승팀이 됐을까

이현우의 MLB+ 입력 2017. 11. 03. 14:42 수정 2017. 11. 03.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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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스턴 애스트로스(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 2013년까지만 하더라도 3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 팀이었던 휴스턴. 그랬던 휴스턴이 어떻게 4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을까. 2011년 말 짐 크레인 구단주와 제프 러나우 단장 부임 이후 구단 운영의 변화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엠스플뉴스]
 
때는 2010년, 아직 내셔널리그 중부지구에 속해 있던 휴스턴 애스트로스는 총체적 난국을 맞이하고 있었다.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있었던 짧은 전성기 이후 휴스턴은 점차 침체기에 접어들었다. 하지만 1962년 창단 이후 첫 전성기를 흘려보낸 팀은 리빌딩에 돌입할 적절한 시점을 놓치고야 말았다. 휴스턴의 로스터는 부상이 잦아진 랜스 버크먼, 장기 계약 이후 의욕을 잃은 카를로스 리 등 받는 연봉에 비해 형편없는 활약을 펼치는 선수들로 채워져 있었다.
 
반면, 당시 내셔널리그 중부지구는 전통의 강호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신시내티 레즈뿐만 아니라 밀워키 브루어스마저도 프린스 필더와 라이언 브론을 앞세워 강팀으로 발돋움하던 시기다. 하지만 현실적으론 포스트시즌 진출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시즌 전부터 이미 매각 의사를 밝힌 구단주 드레이턴 맥레인은 높은 매각 금액을 위해 당장 승리(win now)를 원했다.
 
그러나 주축 선수들이 이미 노쇠화된 시점에서 소소한 투자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2008시즌까진 그래도 근근이 5할 승률을 넘겨온 휴스턴은 이해 76승 86패를 기록했다. 이런 이도저도 아닌 행보가 2011시즌에도 이어졌고, 휴스턴은 마침내 56승 106패로 메이저리그 승률 꼴찌 팀으로 전락하고야 말았다. 당시 휴스턴의 상황을 요약하자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답이 없는 팀'. 
 
이것이 2011년 말, 현 구단주 짐 크레인이 구단을 인수하기 전 상황이다. 이런 팀에 필요한 인재는, 미래를 위한 전략을 짜고 그 전략을 강하게 밀어붙일 수 있는 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단주 크레인의 용인술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왜냐하면, 크레인이 부임과 동시에 영입한 사람이 제프 러나우였기 때문이다.
 
1. 제프 러나우
 
제프 러나우(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제프 러나우(Jeff Luhnow).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엔지니어링을 복수전공한 후 노스웨스턴 대학교에서 MBA(경영학 석사 학위) 과정을 마친 전형적인 엘리트다. 대학 졸업 후 5년간 글로벌 컨설팅 회사에서 근무한 뒤 곧바로 펫스토어닷컴의 마케팅 총괄 부사장을 역임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사업적인 수완 역시 매우 뛰어났다.
 
그런 러나우가 2003년부터 야구계에 몸담기 시작한 것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사장 윌리엄 드윗 주니어와의 인연 덕분이다. 당시 야구계는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일으킨 머니볼 혁명으로 데이터에 기반을 둔 분석을 할 줄 아는 인력이 필요했고, 드윗은 사위에게 소개받은 사위의 전 직장 동료인 러나우를 유망주 육성 부문 부사장으로 전격 발탁했다.
 
그러니까 러나우는 전형적인 '낙하산'식 인사였다. 하지만 기용 배경이 어쨌건 간에 그가 세인트루이스에서 거둔 성과는 그야말로 놀라운 것이었다. 러나우는 도미니카 공화국에 야구 아카데미 설립을 주도하고, 베네수엘라에도 유망주 육성 시스템을 마련했다. 한편, 하이메 가르시아, 앨런 크레익, 존 제이, 랜스 린 등 2011년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유망주를 발굴하기도 했다.
 
세인트루이스 시절 러나우의 업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역시 2009년 드래프트 신화다. 2003년 이후 승진의 승진을 거듭해 스카우트 부문 총 책임자로 올라선 러나우는 2013년 월드시리즈 25인 로스터에 포함된 주축 선수 가운데 무려 5명(셸비 밀러, 조 켈리, 맷 카펜터, 트레버 로젠탈, 맷 아담스) 2009년 드래프트에서 뽑아냈다. 드래프트 역사에 남을 대성공이었다.
 
현재 세인트루이스의 주축 선수 대부분은 러나우가 드래프트를 총괄하던 시절 뽑은 선수들이기도 하다(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단점은 있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 시절 자신의 상관인 존 모젤리악과 끊임없이 파워 게임을 벌였다. 세인트루이스의 프런트 오피스 직원들은 모젤리악과 러나우의 파벌로 나뉘었고, 대게의 경우엔 모젤리악보다 러나우를 미워하는 이들이 많았다(이런 관계는 훗날 세인트루이스의 휴스턴 내부 네트워크 해킹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러나우가 미움을 받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소위 '현장 출신'이 아니란 데서 비롯됐다. 대학까지 야구 선수였고 스카우트부터 차근차근 승진한 모젤리악과는 달리, 러나우는 학창시절부터 운동과는 거리가 먼 '책상물림'에 낙하산이었다. 게다가 현장 출신이 보기엔 지나치게 숫자에만 집착했다. 그래서 붙은 세인트루이스 시절 러나우의 별명이 바로 '회계사'다.
 
능력은 있되 인망은 잃은 러나우. 그에게 휴스턴 구단주 크레인의 단장 제의는 그야말로 가뭄에 단비와 같았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2. 단호함
 
제프 러나우(왼쪽)과 짐 크레인(오른쪽)(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이후 휴스턴에서의 행보를 살펴보더라도, 확실히 러나우에게서 인간적인 면모를 찾기란 어렵다. 그가 2017년 월드시리즈 MVP 조지 스프링어를 고의로 콜업하지 않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다. 2011년 드래프트된 스프링어는 23살이던 2013년 마이너리그를 폭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프링어는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인 24살에나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그 이유가 저연봉의 장기계약에 동의하지 않아서라는 얘기가 들렸고, 실제로 같은 해 5년 1000만 달러(+팀 옵션만 3년이 추가된다)에 동의한 존 싱글턴(당시 만 22세)이 데뷔하면서 무성했던 소문은 거의 사실로 굳어졌다. 한편, 2014년 드래프트에선 전체 1번인 *브래디 에이킨을 선천적 소형 척측 측부인대라는 생소한 질병을 근거로 염가에 계약하려다가 실패한 적도 있었다.
 
*이듬해 브래디 에이킨이 팔꿈치 부상으로 수술을 받게 되면서 '에이킨과 계약하지 않은 것은 옳은 선택이었다'란 여론이 형성된 적도 있지만, 문제의 핵심은 그게 아니다. 협상 만료 직전까지 계약금을 제시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러나우는 에이킨과의 계약을 뒤엎을 생각이 없었다. 러나우는 단지 에이킨의 계약금을 깎기 위해 선수의 건강상태를 공개해서 피해를 줬던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인간적인 면모와는 별개로 러나우에겐 리빌딩 팀의 단장에게 요구되는 장점도 있었다(아니, 어쩌면 둘은 동전의 양면일지도 모른다). 바로 자신에게 집중되는 비난을 견딜 수 있는 인내심과 비인간적일 정도의 단호함이다. 그러지 않았다면 시청률이 채 0.01%가 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팀의 미래를 위해 탱킹(Tanking)을 할 순 없었을 것이다.
 
휴스턴의 개막전 기준 연봉 총액 변화(자료=베이스볼프로펙터스)
 
탱킹은 '도박을 할 때 의도적으로 잃는 행위'에서 유래한 조어다. 메이저리그에서의 탱킹이란 쓸만한 선수를 유망주와 트레이드하고, 고의적으로 낮은 순위를 기록함으로써 드래프트에서 높은 지명 순서를 얻는 등 빠른 리빌딩을 위한 일련의 과정들을 말한다. 그렇게 하면 효과는 확실하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탱킹을 하는 팀은 드물다. 
 
팬들이 싫어할 뿐만 아니라, 입장 수입이 감소하는 등 재정적으로도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 하지만 러나우, 그리고 러나우에게 전권을 부여한 구단주 크레인은 이런 반발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휴스턴은 2011시즌부터 2013시즌까지 3년 연속 메이저리그 전체 꼴찌를 기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 휴스턴의 연봉 총액은 2610만 달러로 압도적인 꼴찌였다.
 
즉, 아예 대놓고 지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쓸만한 선수를 모두 유망주로 바꾸고, 3년 연속 드래프트 1순위 지명을 통해 유망주를 수집한 효과는 확실했다.
 
3. 드래프트와 트레이드를 통해 코어(core) 확보하기
 
카를로스 코레아(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개괄적인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 본격적으로 휴스턴이 로스터를 어떻게 구축했는지 살펴보자. 휴스턴의 월드시리즈 로스터에 포함된 25명 가운데 5명은 2011시즌부터 2014시즌까지 네 시즌 동안 있었던 '고난의 행군'을 통해 확보한 드래프트 지명권으로 뽑았다. 바로 스프링어(2011), 카를로스 코레아(2012)와 랜스 맥컬러스(2012), 데릭 피셔(2014)와 알렉스 브레그먼(2015)이다.
 
특히 코레아와 맥컬러스를 동시에 뽑았던 2012년 드래프트 결과는 주목할만하다. 메이저리그 드래프트는 2012년부터 '슬롯 머니'란 제도가 적용됐다. 슬롯 머니란 드래프트 지명권(1~10라운드) 별로 사용가능한 최대 액수를 말한다. 이런 슬롯 머니를 모두 더한 값을 '드래프트 보너스 풀'이라고 하는데, 30개 팀들은 이 지정된 예산 안에서 1~10라운드 선수와 계약을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드래프트 보너스 풀을 한도(10%+) 이상 넘어설 경우 이듬해 지명권이 박탈되는 등 심각한 불이익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전까지 리빌딩을 하는 팀들이 소위 '돈질'을 통해 유망주를 수급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 막 리빌딩에 돌입하는 휴스턴으로선 이도저도 아닌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휴스턴은 처음 맞이하는 제도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러나우 단장은 당시 유력한 전체 1번 지명자 후보로 여겨졌던 바이런 벅스턴(現 미네소타 트윈스)를 지명하는 대신,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던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유격수 코레아를 전체 1번으로 지명했다. 전체 1번 지명자에게 쓸 계약금을 줄이고, 거기에서 생긴 여윳돈을 보태서 1라운드급 재능을 지닌 다른 지명자들에게 투자하기 위한 전략이었다.
 

 
이렇게 해서 얻은 선수가 바로 WS 7차전 선발로 나선 맥컬러스(2012년 드래프트 41번 지명)다. 그리고 코레아와 맥컬러스는 모두 휴스턴의 중심 선수로 자리 잡았다. 이런 드래프트 전략을 가리켜 '1+1 전략'이라고 한다. 일종의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나 할까. 지금와선 흔한 전략이 돼버렸지만, 당시로선 획기적인 시도였고 그것이 성공을 거뒀다.
 
물론 휴스턴이 드래프트에서 뽑은 선수가 항상 메이저리그에서 성공적인 활약을 펼쳤던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휴스턴이 뽑은 유망주들은 적어도 마이너에선 높은 평가를 받았고, 팀 전력이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하자 팀은 이들을 트레이드 카드로 사용해 즉시 전력감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반대로 즉시 전력감을 트레이드해 얻어온 유망주가 재능을 만개하기도 했다.
 
그렇게 휴스턴에 합류한 선수가 바로 크리스 데벤스키조 머스그로브, 브래드 피콕마윈 곤잘레스 등이다. 이들의 특징은 휴스턴에 합류하기 전까진 선발도 불펜도, 내야수도 외야수도 아닌 '어정쩡한' 선수들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휴스턴에서 이들은 훌륭한 스윙맨과 전천후 유틸리티로 활용되고 있다.
 
4. 부족한 부분 채우기
 
 
 
앞서 설명한 일련의 과정들을 통해 전력을 비축한 휴스턴은 2015시즌 마침내 86승 76패를 거두며 아메리칸리그 와일드카드 2위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메이저리그 정상급 2루수로 성장한 호세 알투베와 에이스 댈러스 카이클이 중심을 잡고, 코레아와 맥컬러스를 비롯한 젊은 피들이 서서히 수혈되면서 거둔 첫 쾌거였다.
 
하지만 인고의 세월 끝에 맞이한 첫 가을야구의 기쁨은 얼마 가지 않았다. 2016시즌을 앞두고 단행한 투자(2016년 개막전 기준 연봉 총액 9689만 달러)에도 불구하고 휴스턴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 원인은 투자 방식에 있었다. 2016시즌 휴스턴은 A급 선수를 영입하기보다는, B+급 선수를 여러 명 영입하는 '어정쩡한' 전략을 취했다. 
 
문제는 그렇게 해서 모은 자원들이 '모조리' 실패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더해 기대를 모았던 카이클-맥컬러스 선발 원투펀치도 부상 등이 겹치며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바로 리더십의 부재다. 대부분이 젊은 선수로 구성된 휴스턴에는 팀이 어려울 때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선수들이 없었다.
 
2017시즌을 앞둔 시점에서 휴스턴이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멘토 역할을 해줄 베테랑을 수집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영입한 선수들이 바로 카를로스 벨트란브라이언 맥캔이다. 여기에 오클랜드 시절 팀의 리더 역할을 맡았던 조시 레딕도 데려왔다. 성적은 그리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이 올 시즌 휴스턴에 이바지한 바는 '숫자'만으론 드러나지 않는다.
 
2017시즌 젊은 선수들의 멘토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던 카를로스 벨트란. 그는 만 40세 나이에 커리어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경험했다(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선수들의 캐미스트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은 러나우 단장, 더 나아가 휴스턴 프런트에게 커다란 변화가 왔음을 뜻한다. 숫자를 중시하는 단장이 이끄는 팀들이 '어정쩡한' 투자를 하는 이유는, 장기계약에 따른 필연적인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다. 경제적으로만 보면 한 선수에게 많은 돈을 투자하기보단 여러 명에게 적은 돈을 투자하는 게 당연히 이득이다.
 
여기에 기왕이면 만 33세 미만(전성기 끝자락)으로 계약기간을 맞추면 금상첨화다. 이런 관점은 '반년 렌탈'에도 적용된다. 당장 올해의 성적을 위해 올 시즌이 끝나면 FA가 되거나, 남은 계약금이 많은 베테랑을 떠안는 것은 '무모한 투자'다. 게다가 그를 위해선 오랫동안 키워온 유망주를 넘겨야 한다. 그리고 그런 트레이드를 한다고 해서 우승을 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휴스턴이 이번 트레이드 마감시한에도 과감한 트레이드를 하지 않았던 이유다. 하지만 트레이드 마감시한 때 적극적인 보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선수들이 불만을 드러내자, 휴스턴은 노선을 곧바로 바꿨다. 바로 이것이 저스틴 벌랜더를 영입하게 된 배경이다.
 
5. 팀 캐미스트리
 
저스틴 벌랜더(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벌랜더는 마지막 순간까지 휴스턴 이적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랬던 그가 약혼자인 케이트 업튼의 설득으로 휴스턴에 이적하기로 한 것은 잘 알려진 일화다. 하지만 벌랜더의 이적 결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을 한 명 더 꼽자면 그는 아마도 카이클일 것이다. 카이클은 마감시한 때 팀이 적극적인 보강을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언론을 통해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그만큼 월드시리즈 우승을 위해 팀이 더 강하지길 원했다. 카이클이 마감시한을 1시간 앞두고 벌랜더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하자고 설득했던 이유다. 이후 벌랜더는 인터뷰를 통해 카이클의 전화가 휴스턴 이적 결심을 도왔다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우여곡절 끝에 팀에 합류하게 된 벌랜더는 정규시즌이 끝날 때까지 5승 무패 평균자책 1.06을 기록했다. 
 
하지만 벌랜더의 이적이 휴스턴에 미친 영향은 단순히 뛰어난 선발이 합류한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벌랜더를 영입함으로써 구단은 선수들에게 이기고자 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8월 한달간 11승 17패에 그치며 서서히 내리막을 타고 있던 휴스턴의 클럽하우스 분위기가 180도로 바뀌었다. 마지막 한 달간 21승 8패를 기록하며 반등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포스트시즌은 정규시즌과는 또 다른 무대였다. 매 시리즈마다 휴스턴은 벼랑 끝 위기로 몰렸다. DS 4차전에서 크리스 세일의 교체가 조금만 빨랐더라도, 챔피언십시리즈에 진출하는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진출한 CS에서도 휴스턴은 5차전까지 뉴욕 양키스에 2승 3패로 뒤처져있었다. 7차전까지 간 월드시리즈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 원인으로 지목되던 것은 주축 선수들에 대한 지나친 의존도. 원투펀치와 상위타선은 여전히 강력했지만, 정규시즌엔 제 몫을 다해줬던 하위 선발과 하위 타선, 불펜 부진이 심각했다. 하지만 포스트시즌 경험이 쌓일수록 나머지 선수들도 조금씩 가을무대에 적응해갔다. 그리고 스프링어에 대한 A.J. 힌치 감독의 변함 없는 믿음은 월드시리즈 MVP로 돌아왔다.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메이저리그 최약체였던 휴스턴은 1. 명확한 비전과 단호한 실행력을 갖춘 리더를 영입해 전권을 위임하고 2. 당장 성적보다는 미래를 위해 내실을 닦는데 집중했다. 3. 어느 정도 전력이 강해지자 핵심 선수들을 뒷받침해줄 수 있는 베테랑 선수들을 모았다. 4. 망설인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우승을 위해 돈과 유망주를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휴스턴은 마침내 창단 첫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3연속 꼴찌 팀이었던 휴스턴의 성공 비결은 지금도 재기를 꿈꾸는 많은 약소 구단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현우 기자 hwl05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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