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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스볼 비키니] 커브가 외국인 투수 잔류를 결정한다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 입력 2018.03.20.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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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클 찰리'와 '찰리 아저씨'의 차이가 명품 용병 판가름

[주간동아]

7년간 몸담아온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된 후 kt 위즈로 이적한 더스틴 니퍼트.
이제 '야구는 투수 놀음'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야구는 외국인 투수 놀음'이라고 쓰니 좀 더 사실에 가까워 보입니다. 

먼저 지난해 한국 프로야구 개막전 선발진 명단을 확실한 근거로 내세울 만합니다. 프로야구 10개 팀 모두 외국인 투수에게 개막전 선발 마운드를 맡겼습니다. 올해 역시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시즌 전체를 놓고 보면 개막전도 144경기 중 하나일 뿐이지만 개막전부터 지고 싶은 감독은 없습니다. 개막전은 올 시즌 잘 풀리게 해달라고 비는 '고사(告祀)' 성격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승리 청부사' 노릇을 하니 당연히 몸값도 비쌉니다. 올해 한국 무대에서 뛰는 외국인 투수 20명의 계약 총액은 평균 105만8500달러(약 11억2730만 원). 한국야구위원회(KBO)에 따르면 올해 각 구단 연봉 상위 27명(1군 엔트리 숫자)이 평균 2억5560만 원이니까 외국인 투수는 이보다 4.4배 더 받는 셈입니다. 

그런데 좋은 외국인 투수를 구하는 건 생각처럼 쉽지 않습니다. 이번에는 재계약 성공 확률을 근거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 뛰어도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이 생기지 않는 투수와 재계약하지 않는다는 건 구단 측에서 효용가치가 떨어졌다고 판단한 것일 테니까요(물론 선수가 일본 등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곳으로 떠나는 사례도 있습니다).

한국에선 밋밋한 커브가 통한다

장기적으로 보면 외국인 투수 4명 중 1명만 재계약에 성공합니다. 2007년부터 2016년까지 10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 무대를 밟은 외국인 투수는 총 130명. 이 가운데 25.4%(33명)가 이듬해에도 같은 팀에서 뛰었습니다. 지난해 한국 무대에서 활약한 외국인 투수 22명 중 31.8%(7명)가 올해도 같은 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섭니다. 

이 7명은 지난해와 올해 같은 팀에서 뛰는 선수만 포함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롯데 자이언츠를 떠나 두산 베어스에 합류한 조쉬 린드블럼(31)과 7년간 몸담은 두산을 떠나 kt 위즈에서 뛰게 된 더스틴 니퍼트(37)는 여기서 빠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두산이 니퍼트가 뛰던 자리에 린드블럼을 선택했고, 한국을 떠날 뻔한 니퍼트를 kt에서 고용한 것. 과연 어떤 팀의 선택이 옳았을까요. 

이 질문은 '어떤 외국인 투수가 한국 무대에서 성공했는가'로 바꿔 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공을 측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바로 재계약 여부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겁니다. '어떤 구종을 잘 던지는 외국인 투수가 (재계약에) 성공할까.' 정답은 '커브'입니다. 

세이버메트릭스(야구통계학)에서는 특정 구종을 던졌을 때 실점 확률을 낮추거나 높인 결과를 토대로 '구종가치(Pitch Value)'라는 값을 계산합니다. 예컨대 빠른 공(속구)으로 스트라이크를 잡았으면 실점 확률이 내려갔다는 뜻에서 속구 구종가치가 올라가고, 슬라이더를 던져 안타를 맞았으면 내려가는 식입니다. 

한국 프로야구 구종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2014~2016년 기록을 살펴보면 재계약에 실패한 투수는 커브가 약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통계적으로 외국인 투수 재계약 여부와 유의미한 상관관계를 나타냈습니다. 재계약에 실패한 투수들의 커브 구종가치를 계산해보면 이들은 커브를 100개 던질 때마다 1.37점을 내줬습니다. 구종가치에 따라 계산할 때 커브는 재계약 여부에 통계학적으로 유의미한 영향을 끼치는 '유일한' 구종이기도 했습니다. 

그 밑바탕은 삼진입니다. 한국 무대 데뷔 첫해 커브를 잘 던진(구종가치가 높았던) 투수는 마이너리그 AAA에서 뛰었을 때보다 한국 프로야구에서 삼진 비율이 올라가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통계학적으로 역(逆)도 참입니다. 그러니까 AAA보다 한국에서 삼진 비율이 올라간 투수는 커브 구종가치가 높은 경향도 보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 미국 선수들이 던지는 엉클 찰리(Uncle Charlie·야구 속어로 '커브')가 한국 투수들이 던지는 커브와 특징이 다른 게 이유일 개연성이 적잖습니다. 신동윤 한국야구학회 데이터분과장은 "2015년 내국인 투수의 평균 커브 발사각(공이 투수 손끝을 떠날 때 지면과 이루는 각도)은 +2.1도, 외국인 투수는 +0.9도였다. 2014년 마이너리그 AAA 평균 발사각은 +0.8도였다"면서 "(이는) '좋은 커브'와 '나쁜 커브'의 차이가 아니라 '미국 커브'와 '한국 커브'의 차이일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발사각이 크다는 건 회전이 많이 걸린다는 뜻이고 그러면 낙폭도 더 커집니다. 

요컨대 미국에서는 평범한 커브가 한국 무대로 건너온 외국인 투수에게는 삼진 비율을 높여 성적을 끌어올리고 재계약으로 가는 다리를 놓아주는 구종으로 기능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산이 옳은 선택을 한 게 됩니다. 지난해 기록을 기준으로 린드블럼은 커브를 던질 때마다 이득(+1.45)을 본 투수인 반면, 니퍼트는 손해(-1.07)였으니까요. 물론 구종가치는 '능력'이 아닌 '성과'를 측정하기 때문에 올해는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키다리 아저씨

롯데 자이언츠에서 두산 베어스로 이적한 조쉬 린드블럼. [동아일보]
외국인 투수의 성공을 결정하는 또 한 가지 요소는 '키'입니다. 키가 189cm 이상인 외국인 투수는 평균 1.8년 동안 한국 프로야구 무대에서 활약했습니다. 5명 중 4명은 재계약에 성공했다는 뜻입니다. 이들이 재계약에 성공한 제일 큰 이유는 범타처리율(DER)이 189cm 미만 외국인 투수보다 10% 정도 높았다는 것. 

이 결과가 재미있는 건 세이버메트릭스라는 낱말을 세상에 등장하게 만든 미국야구조사협회(SABR) 연구 결과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SABR는 1990~2007년 기록을 토대로 투수 성적에 키가 끼치는 영향은 없다고 결론 내렸습니다. 다른 메이저리그 연구 결과를 보면 키가 크다고 투수가 더 빠른 공을 던지는 것도 아니고, 커브 낙폭이 더 커지는 것도 아닙니다. 국내 투수까지 포함하면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키에 따라 유의미한 성적 변화가 나타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걸까요. 미국에서는 평범한 '엉클 찰리'가 한국에서는 외국인 투수 재계약을 보장하는 무기가 됐듯, '키 큰' '외국인 투수'가 아직 한국 타자들에게 익숙지만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시즌 개막을 앞두고 메이저리그에서는 거꾸로 '찰리 아저씨'처럼 회전이 많이 걸린 커브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낯섦이 때로는 가장 위협적일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는 역대 최장수(8년) 외국인 투수 니퍼트(203cm)나 어느덧 한국에서 네 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린드블럼(195cm) 모두 그림자만으로 어떤 사람인지 상상해야 하는 '키다리 아저씨'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익숙한 상대죠. 결국 이들이 겨우내 어떤 '낯섦'을 준비했는지가 두산이 옳았는지, kt가 옳았는지를 증명할 겁니다. 지금까지 얘기는 어디까지나 '과거에는 이랬다'는 거고, 미래의 정답은 언제나 시간만이 아는 법이니까요.

이 기사 중 일부는 석사학위 논문 '의사결정나무 분석 기법을 활용한 프로야구 외국인 투수 재계약 확률 예측'에서 인용했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 황규인 동아일보 기자 ki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