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미디어] 'DUGOUT Interview' 김병현

조회수 2018. 5. 15. 17:3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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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진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 'Born to K'

올해로 창단 20주년을 맞은 메이저리그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는 포지션별 역대 최고 선수를 투표했다. 그중 김병현이 마무리 투수 부문에서 당당히 1위에 올랐다.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메이저리그 팬들은 애리조나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BK’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전설의 선수로 뽑힌 김병현은 11년 만에 체이스필드 마운드에 섰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Kwonhyang Pyo   Location Arizona Chase Field


#Return to K

오랜만에 찾은 애리조나다. 애리조나도 김병현이 반가웠는지 사막의 더운 공기 대신 시원한 바람으로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운동을 하러 온 것이 아니었기에 기분이 묘했다. 선수가 아닌 시구자로 나서는 것이었기에 흥미롭기도 했다. 김병현이 시구를 하다니. 어떻게 된 일일까?


1999년 2월 애리조나와 인연을 맺은 김병현은 고작 20세였다. 한국에서 건너온 까까머리 청년은 2달 만에 마이너리그를 씹어 먹고 메이저리그로 승격했다. 언더핸드 투수로서 95마일 강속구를 던지며 탈삼진 머신으로 등극했다. 메이저리그는 그의 ‘마구’를 극찬하며 ‘Born to K’, ‘삼진을 잡기 위해 태어난 사나이’라고 불렀다. 팬들은 애리조나의 우승을 이끈 영웅과의 재회를 꿈꿨고 올해 20번째 생일을 맞은 애리조나는 팬들의 투표를 통해 김병현을 소환했다.

시구자로 선정됐을 때 미국행을 망설였다. 아직 현역선수 생활을 연장하고 싶었기에 쉽게 승낙할 수 없었다. 보인 모습으로 자칫 은퇴선수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민하던 김병현을 일으켜 세운 건 <더그아웃 매거진>의 김지형 편집장이었다. 이번 미국 여행길에 동행했던 김 편집장은 그가 마운드에 설 수 있도록 응원하며 지지했다. 실제로 시구하게 된 이유로 “더그아웃 매거진 때문이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고 싶었다. 이게 가장 큰 이유다. 김병현은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살아본 적이 없었다. 무엇을 얻기 위해, 무엇을 위해 해본 적이 없었다”고 운을 띄웠다.

애리조나 입단 당시 그는 예상과 달리 메이저리그에 대한 동경이 없었다. 야구를 하면서도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더 열심히 뛰었던 것이 전부다. 야구를 하다가 돈과 명예를 얻은 것이지, 야구를 이용해 큰 꿈을 이루려고 하진 않았다. 한국 무대가 좁아 미국으로 건너가겠다고 생각한 적이 결코 없었다.

30여 년 동안 해온 야구 그리고 화려함만 비춰졌던 메이저리그. 큰 무대에서 야구를 했던 이유는 나를 위함이 아닌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 때문이었다. KBO리그 지명 예비 1순위였지만 먼 미국땅을 선택했던 것도 가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뉴욕 메츠와 시애틀 매리너스에서도 입단 제의를 받았으나 계약금을 가장 많이 준다는 이유로 애리조나를 택했다.

“어릴 적엔 야구를 잘해서 그거 하나 보고 살았다. 솔직히 그땐 메이저리그에 가는 건 중요하지 않았다. 고향팀이니까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에 가고 싶었다. 빨간색에 검은 바지… 그땐 집안이 부유한 편이 아니었기에 대학 장학금을 받으면 이 돈으로 걱정 없이 살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시 어려워졌고, 대학교 2학년 때 애리조나에서 큰돈을 준다고 하니까 메이저리그로 갔다. 이제 우리 집이 걱정 없이 살겠구나란 마음 하나로 간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체이스 필드. 마운드로 향하는 순간, 그를 기억하는 많은 팬이 ‘BK’를 연호했다. 20년째 연간권 회원인 애리조나의 광팬 수잔 할머니는 김병현을 보자마자 반가움을 적극적으로 표현했다. 그 역시 흰 머리의 수잔 할머니를 기억했고 “건강히 잘 지내고 있으니까 다행이다. 잊고 있다가 오랜만에 정정한 모습을 보니 좋다”고 인사를 전했다.

김병현의 신인 시절 때 애리조나 스카우트였던 89세의 로렌 할아버지도 만났다. 그의 아들은 김병현에게 최근 기력이 떨어졌다고 살짝 일러줬다.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여전히 매일 야구장을 찾아 야구를 보며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에 그나마 위안이 됐다.


#Shape of BK

국제무대에서의 김병현을 잊지 못한다. 1999년 방콕아시안게임에서 왜소한 체격이었지만 6이닝 동안 8타자 연속 삼진 처리하며 무실점 호투했다. 애리조나 시절 대표팀에 있을 때도 미국을 상대로 7이닝을 소화하며 탈삼진 15개를 잡았다. 그 역시 안타 맞은 기억이 없다고 한다. 주위에서 그 경기를 말해주면 “아~ 그랬구나”라며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찬란했던 날들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흘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김병현이라는 한국 언더핸드 투수의 존재감을 전 세계에 알리면서 뜨겁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야구의 성지인 메이저리그로부터 끊임없이 러브콜을 받았다.

도착한 미국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본 것과 달랐다. 뜨거운 사막이 펼쳐진 애리조나를 보고 첫 마디가 “멕시코야?”였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 말도 안 통했고 아는 것이 없어 산책조차 어려웠다. 할 수 있는 건 야구밖에 없었다.

야구밖에 몰랐던 그는 다른 마이너리그 선수들과 달리 아주 짧게 마이너리그의 눈물 젖은 빵을 먹었다. 더블A와 트리플A에서 한 달씩 보낸 뒤 바로 메이저리그로 직행했다. 두 달 만에 마이너리그를 초토화시킨 김병현은 데뷔전에서도 미국 전역을 놀라게 한 투구를 선보였다. 당시 공포의 중심타선으로 불린 ‘알폰소-올러루드-피아자’를 삼자범퇴 처리했다. 이에 대해 미국 언론은 “충격적”이라고 표현했다.

김병현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소름이 돋을까? 그런데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김병현은 “솔직히 기분은 좋았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선발 투수였다. 트리플A에서 한 달 동안 3승 무패를 기록했다. 삼진은 이닝보다 많았다”고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보직 결정은 감독과 코칭스태프의 몫. 그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이를 인정했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았다. 김병현은 이어 “선발 투수를 했으면 더 좋은 길이 있었지 않을까. 선발 투수가 제일 잘 던지는 투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 당시엔 기본 7회까지 던졌다. 잘 던지면 9회까지 완봉도 하고 했으니까”라고 여운을 남겼다.


하지만 마무리 투수로서 좋았던 적도 있다. 동양인 최초로 양대 리그 우승반지를 가지고 있는 선수라는 것. 이건 야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일이다. 이에 대해 김병현은 “사람들이 많은 데서는 뿌듯하다고 얘기하지만, 혼자 있을 때는 웃는다고 해야 하나? (웃음) 여기 와서 느끼는 건데 팬들이 아직까지 기억해줘서 감사하다. 체이스 필드를 다시 밟기 전까지 잊고 살았는데… 많은 일이 있었고 친구들을 만나니 조금씩 생각이 난다. 그때 정말 힘들게 받았던 것인데…”


지나고 보니 다 추억이다. 당시 미국 현지 언론 ESPN은 물론 메이저리거들이 인정한 ‘마구’였다. 배리 본즈는 “내가 본 투수 중 가장 공이 더럽다”며 혀를 찼다. 블라디미르 게레로는 삼진을 당한 후 “저런 공을 던지는 투수는 메이저리그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다.

무서울 것이 없었을 것 같은 김병현은 “럭키였다고 본다. 신생팀이었고 다소 약한 팀이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냉정하게 말해 별생각이 없었다”라며 웃었다. 이어 “지금 돌이켜 보면 내가 잘하는 걸 보여줄 수 있는 큰 무대였다고 생각한다. 지방에서 상경하면 동대문야구장으로 갔는데, 아… 우리가 정말 힘들게 운동했다는 것, 각 학교의 3대 선수가 누구라는 것 등을 보여주고 인정받고 싶었다. 이게 내 만족이었던 것이다. 이것 빼고는 그 외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며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Welcome to BK’s World

전 세계 야구팬들은 김병현을 ‘매력적인 선수’라고 말한다. 두둑한 배짱이 수많은 덩치들을 이겨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그는 상대에게 굽힘이 없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물러섬이 없었고 당당했다.

팀에 대한 애정도 강하게 표현했다. 이 모습이 마운드에서 드러났는데, 콜로라도 로키스 시절 LA 다저스 켄트의 옆구리를 맞히는 사건이 발생했다. 후에 김병현이 켄트에게 고의사구를 던진 이유가 그가 콜로라도를 비하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날을 기억한 김병현은 “그 전날 맞았어야 했는데 전날 던진 투수들이 못 맞혔다. 켄트가 잘 피하더라고”라며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고 껄껄 웃었다. “다음날 맞혀라”는 특명을 받은 김병현은 “내가 선발이니 ‘그럼 내가 맞힐게’라고 말했다. 솔직히 나도 첫 회에 잘 던지고 싶었는데 어쩌다 맞혀버리니까 ‘어? 맞혔네?’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이 사구로 벤치클리어링이 있었다. 김병현은 “솔직히 상황이 되면 싸우는 것이고, 아니면 얘기하는 것이고. 다 그런 거 아닌가?”라고 시원하게 말했다.

가끔 다소 강한 어필로 인해 언성을 사기도 했다. 그런 야유에 고개를 숙이기보다 맞받아쳤다. 언론에 대한 불만도 거침없이 표출했다.


“미국에 와서 성향이 바뀐 것도 있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바뀐 점도 있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땐 표현을 거의 안 하고 살았다. 그런데 이런 점이 팀 동료들의 불만이었다. 화나면 집어 던지고 기쁘면 파이팅 하는데 나는 항상 무덤덤했기 때문이었다. 경기에서 지면 졌구나, 이겨도 그다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랬더니 왜 감정 표현을 안 하냐며 같이 하지 않으면 좋은 팀 동료가 아니라고 했다. 처음엔 신경 안 썼는데 자꾸 얘기하니까 언제부터인가 나도 표현하게 되더라.”


지금 생각하면 본인이 생각해도 과격했던 적도 있었다. “너무 오래 돼서 기억이 나지 않지만 기억에 남는 일이 있다”며 한 사례를 들었다. 경기 전 애국가 제창 때 일이 터졌다. 당시 베테랑 선수들은 애국가가 나올 때 클럽하우스에 있기도 했다. 김병현에게도 자유롭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이 말은 성적에 따라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너무 화가 나서 의자를 집어 던지며 “안 해”라고 소리쳤다. 욕도 시원하게 해줬다는 후문이다.

그는 선수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좋은 팀 동료를 운운하면서 정작 그들은 상대방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고 내키는 대로 행동하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김병현은 그들에게 배운 대로, 그들이 원하는 대로 감정표현을 정확하게 해준 것이다.


물론 화만 냈던 것은 아니다. 외모와 상관없이 귀여운(?) 표현도 있었다. 많은 한국팬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인터뷰일 것이다. 제1회 WBC에서 스즈키 이치로가 한국을 향해 “30년 동안 일본을 이기지 못하게 해주겠다”고 말하자 김병현이 “그냥 만화를 많이 봐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라고 맞받아쳤다. 다소 엉뚱함에 웃음이 나오지만 이를 본 한국팬들은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 당시 인터뷰는 농담한 것이라고 밝힌 김병현은 “일본 사람들이 만화를 많이 봤으니까. 별 의미 없었다”며 무덤덤한 듯 말하더니 “한국 사람들은 무례하게 말하지 않는다. 솔직히 이치로가 진짜로 그렇게 말했는지도 모르지 않나”고 덧붙였다.

화제의 인터뷰 주인공들은 메이저리그에서 맞대결을 펼쳤다. 마운드에는 투수 김병현이 섰고, 타석에는 타자 이치로가 나왔다. 그때 다소 장난스러운 그의 행동이 웃음을 자아냈다. 김병현은 이치로가 타석에 들어서자 일본투수 노모의 투구폼을 살짝 따라 했다. 기싸움의 일종이었을까?


“내가 인정하는 선수를 상대하기에 기분이 좋았다. 평소 노모의 폼으로 한 번씩 던져봤던 것이고 일부러 너무 흉내를 내려고 한 건 아니다. 한쪽 팔을 올려 토네이도를 그려야지! (웃음)”


그날 경기에서 김병현은 이치로를 포수 뜬공으로 돌려세웠다. 아웃카운트를 잡았지만 찝찝함이 남았다. 김병현은 “솔직히 말하면 좋은 공이 아니었다. 이치로를 만나서 기분은 좋았지만 냉정하게 삼진으로 잡고 싶었다. 그전엔 좋은 폼이었는데… 조금씩 무너질 때 만나서 아쉬웠다”고 속마음을 털어놨다.


#BK’s Best Friend

메이저리그에서 정상급 마무리 투수로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애리조나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는 일에 공헌했다. 당연히 구단에서 보물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어디에나 남이 잘되면 배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메이저리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김병현은 팀 동료들에게 적지 않은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같은 메이저리거라고 하지만 매일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자리싸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실력을 인정받아 등판 기회가 많았던 김병현은 그들의 눈엣가시였다.

“불펜으로 전화가 오면 ‘BK 준비해’라고 말했다. 영어를 몰랐을 땐 나가라고 하면 던지는 것이었는데 1~2년이 지나면서 선수들끼리 얘기하는 것이 들렸다. 벨만 울리면 ‘또야? 너 나가래’라며 비꼬듯 말하더라. 98이닝을 던지고 중요한 게임에서 나가니까 싫었나 보다. 그 당시엔 통역도 없었기에 불펜에 들어가 있으면 고립돼 있었다. 답답했다”며 안 좋았던 기억 탓에 인상을 찌푸렸다.

야구장에 있는 시간이 외롭다 보니 야구가 재미없어졌다. 가장 힘들었던 시기로 꼽을 정도로 싫었던 시간이었다. 불펜에 있을 땐 선수들이 얘기하는 것이 들려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영어가 짧아 말을 못 하는 답답함에 화도 났다. 부상당했을 땐 빨리 보여줘야 하는 건 야구밖에 없다는 생각에 몸을 험하게 다뤘다. 잘할 때와 못할 때의 대우가 하늘과 땅 차이였기 때문이었다.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던 김병현은 조용히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구석에서 잠을 청하고 혼자 밥을 먹는 것이 편했다. 야구장에 가면 등판했을 때만 집중했다.

이 사연을 알 리가 없는 구단 관계자들은 어디에서나 잠을 자는 김병현을 그저 귀엽게 기억했다. 그는 “사람들은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 같다. 알아도 모른 척하고. 실속을 챙길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런 것으로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얘기하고 표현했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결혼하고 애가 생기고 나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라고 깨달았다. 그때와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영어를 완벽하게 해서 대화를 하든지, 아니면 구단에 얘기해서 해결책을 찾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당시엔 아프더라도 경기 나가서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이 돌아올 것이란 생각에 아픈 거 참고 했었다. 그다음부터 밸런스가 깨지고 몸이 더 안 좋아졌다”며 후회했다.

그래도 아예 ‘친한 동료’가 없었던 건 아니다. 김병현이 태어난 1979년에 데뷔한 투수 마이크 모건이 그의 ‘절친’이었다. 김병현은 가장 친한 선수로 1초의 망설임 없이 그의 이름을 말했다. 그리고 가장 보고 싶은, 꼭 만나고 싶은 친구라고 덧붙였다.

월드시리즈에서 홈런을 맞고 주저앉았던 이유도 모건 때문이었다. 경기 전 모건이 김병현에게 “여러 팀을 돌아다녔는데 이 팀에 와서 우승반지 낄 수 있겠다”며 좋아했다. 그런데 김병현이 홈런을 맞고 동점에 이어 역전까지 허용했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 낙심할 모건의 얼굴이 떠올랐다.

“혼자 너무 많이 던졌고, 졌으면 그다음 년도에 좋은 성적 보여주면 되는 것인데 모건 아저씨가 생각났다. ‘나 우승반지 하나는 챙겨보자’고 얘기했었는데. 말은 안 통해도 매일 장난치는 유쾌한 아저씨였다”며 그 시절을 회상했다.

모건은 다음 시즌부터 볼 수 없었다. 애리조나가 재계약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제 은퇴를 한 모건은 모든 야구선수와 관계를 끊고 잠적했다. 다만 김병현에게는 “유타에서 큰 주유소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이것이 모건과의 마지막이었다.


#The Story of BK

야구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지 달려갔다. 2009년 트레이너를 만나기 위해 LA에서 마이애미까지 직접 운전해서 찾아갔다. 다시 한번 잘해보자고 마음을 잡았기에 비행기가 아닌 자동차를 선택했다. 중간에 하루 이틀 쉴 법도 한데 그 의미가 퇴색될 것 같아 쉬지 않고 55시간 동안 달렸다. 주차장에서 3시간 잔 것이 전부였다. 물론 혼자 운전한 건 아니다. 당시 불펜포수였던 스티브와 번갈아 가면서 운전대를 잡았다. 김병현은 우스갯소리로 “스티브가 엄청 밟은 것”이라며 추억했다.

뭐 하나에 꽂히면 무조건 해야 하는 성격이다. 그가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꽂혀있는 것이 바로 야구다. 하지만 매번 이기는 야구가 아닌 가끔 한 번씩은 지는 야구를 좋아한다. 김병현은 “지면 이기려고 또 하게 된다. 이기기만 하면 재미가 없어서 다른 재밌는 것에 한눈을 판다. 남들이 안 된다고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는 건 자신감 덕분이다. 그는 “오랫동안 야구를 했다. 마운드에 올라가면 그분이 들어오신 것처럼 자신 있었다. 잘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뭔가 이긴다는 확신이 들면 기분이 좋았다”고 덧붙였다.

‘강심장’을 가진 투수들이 오른다는 마지막 마운드에 대해 “마무리 투수는 져도 괜찮다. 어떻게 매일 이기는가. 맞으면 또 쳐! OK! 또 쳐봐! 이렇게 부딪혀야 한다. 안타 하나 맞고 뒤돌아서 안 될 것 같단 생각을 하면 안 된다”며 “나는 (김)선우 형이 집요하다고 말했는데, 지면 못 하는 것을 꼭 하고 싶어 하는 성향 때문인 것 같다. 마무리 투수로서, 운동선수로서 잘 맞는 성향이 아니었을까 싶다”며 자신했다.

물론 프로 무대에서 20여 년 동안 야구를 할 수 있었던 건 운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진지해진 김병현은 “운동뿐 아니라 모든 일이 계획대로 이뤄지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는 건 없다. 열심히 하다 보면 그 방향대로 쌓여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더 좋은 실력을 갖춘 선수가 있었는데 가는 도중 힘들다며 도망갈 수도 있고, 또 다른 재밌는 것을 발견해 옆으로 빠질 수도 있다. 반면 잘하지 못했는데 열심히 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혼자 달리고 있는 선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도 3년이란 방황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생각이 많아졌다. 김병현은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미국에 갔다 돌아왔는데 모르는 사람들이 아는 척하는 것이 싫었다. 사회의 일원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아직 사람을 맞이한다는 것에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땐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한국야구를 접하면서 선배들에게 사회를 배우고 다른 경험을 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야구뿐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했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야구와 공부를 병행했었다면 살면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들이 많아져서인지 대학생 때로 돌아가고 싶단 마음이 크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미국에 안 갈 것”이라고 재차 말했다. 김병현은 “미국이든 일본이든 한국에서 잘하고 갔어야 했다. 한국에서 선배들에게 제대로 야구와 몸 관리하는 법, 혼자 이겨내는 법, 인간관계 등을 배웠더라면 더 좋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솔직히 마무리가 아닌 선발을 했다고 해도 계속 잘했을 것이란 보장이 없지 않은가”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미국과 일본, 한국야구를 경험하면서 가장 좋았던 시절은 한국에서 야구를 했을 때라고 말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넥센 히어로즈와 KIA 타이거즈에게 미안한 마음이 많다고 전했다. 지금이라도 원했던 것을 찾을 수 있을까란 기대에 부활의 기회를 노리고 있다. 최근 도미니카 리그에서 김병현의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그의 여전한 실력으로 그곳에서 선수 생활을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미니카를 ‘기회의 땅’으로 삼지 않았다.

김병현은 “젊은 선수들이 어렵게 생활하면서 운동하는데 내 고집대로 하면 자리가 하나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던질 수는 있지만 내 마음이 안 좋았다”며 “언론의 말대로 방출이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구단에서 계약하자고 했어도 내가 못 한다고 했을 것이다. 난 결심했으니까”라고 귀국한 이유를 털어놨다.

한국으로 돌아온 김병현은 광주로 내려가 후배들의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그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후배들을 보면서 집착이 생겼다. 안 되는 선수들에게 어떻게 도움을 줄까 고민했다. 점점 좋아지는 선수들을 보며 뿌듯했다. 그들을 지도하면서 생각도 바뀌었다. 야구선수를 그만두면 야구판에서 조용히 사라져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젠 아니다. 계속 야구 쪽에 남아 여러 가지 일을 하며 재미를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김병현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며 “그냥 잊고 살아주면 고맙겠다. 어느 날 야구를 한다고 하면 하나 보네. 사라지면 조용히 사나보다고 생각했으면 한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아직 현역 은퇴는 아니라고 쐐기를 박았다.

                               더그아웃 매거진 85호(5월호) 표지


위 기사는 대단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8년 5월호(85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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