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Interview] 서용빈 SPOTV 해설위원

조회수 2018. 6. 14.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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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운드계 천의 얼굴

1994년 LG 트윈스가 4년 만에 다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정상에 올랐다. 당시 프로야구는 LG의 돌풍을 보며 ‘신바람 야구’란 수식어를 붙였다. 그 중심에 외모와 실력을 모두 인정받은 서용빈 해설위원이 있었다. 현역 시절 엄청난 인기로 오빠부대를 이끌었던 그는 2018년 해설위원으로 깜짝 변신! 대학원 석사 과정을 병행하며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Kwonhyang Pyo   Location Great Media Office


눈 감으면 마동석? 눈 뜨니 서용빈

서용빈 해설위원은 2017시즌 종료 후 LG 트윈스 타격코치직에서 자진사퇴했다. 짧은 휴식기 동안 그가 곧바로 액션을 취한 것은 배움의 길이었다. 지난해 12월 우리나라 스포츠 지식의 집합체인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 스포츠 운동역학과 심리학 석사과정에 합격했다. 그리고 KBO리그의 꽃봉오리가 핀 4월 해설위원으로 그라운드에 다시 섰다. 눈을 감고 목소리만 들으면 배우 마동석인 줄 알았다는 서용빈의 해설! 그의 파격적인 도전과 변신은 좀 더 나은 지도자로서 복귀하기 위한 준비 단계라고 밝혔다.


어떤 계기로 대학원 과정을 시작하게 됐는가.

5년 전부터 지도자를 하면서 조금 생각하고 있다가 사퇴 후 전격적으로 도전하게 됐다. 그동안 생각이나 경험이 너무 광범위했다. 정리가 필요했고 궁금한 것들이 많았기에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대부분 모교의 대학원을 선택하던데, 한체대에 지원한 이유가 있는가.

안 그래도 지인들에게 한체대를 얘기했을 때 ‘들어가기 되게 힘들다’, ‘어떻게 들어가려고 하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 내가 한체대를 선택한 건 모든 스포츠가 있기 때문이다. 각 스포츠를 연구하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연관성을 찾을 수 있기에 응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다른 종목들은 어떻게 트레이닝 하고 운용되는지 궁금했다.


입학을 위해 면접을 봤을 텐데. 지원동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답했는가.

무식해서! 진짜로! ‘그 나이에 왜 학교에 와서 공부하려고 하냐’고 질문했을 때 ‘무식해서요. 그래서 배우러 왔습니다’라고 말했다. 거기서 내 대답은 정리가 다 됐다. 또 석박사 과정의 학위를 물어보더라. 별로 관심 없다고 했다. 그저 뭔가 알기 위해 왔기 때문이었다. 배우러 온 것이니 학위 욕심이 아닌 배움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학업과 방송을 병행하고 있다. 해설위원으로 깜짝 변신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SPOTV와 계속 얘기 중이었지만 막상 학교를 가니 ‘투잡’이 힘들었다. 학위를 위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러 들어간 것인데 몰입이 안 됐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해설위원을 하는 것이 배움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모든 것이 새로웠기에 ‘한 번 해보자’라며 결심했다.


데뷔전이 LG전이었다. 선수들의 반응이 궁금하다.

정신없었다. 수요일(4월 11일)에 계약하고 금요일(4월 13일)에 첫 중계를 했다. 아무런 트레이닝 없이 들어갔기에 당황했었다. 그러나 선수들은 모두 반가운 표정으로 맞아줬다.


서용빈 위원이 등판한 주말 3연전에서 LG가 2주 연속 싹쓸이 승리를 가져갔다. ‘승리의 요정’으로 등극했던데.

해설위원은 중립적인 입장이기에 민감한 부분이다. 자칫 오해받을 수 있기에 편파해설을 하면 안 된다. 좋게 봐주셨으면 한다. (웃음) 당시 (오)지환이가 삽질(?)하고 있었는데, 내가 갈 때마다 잘 쳤다. (채)은성이와 (양)석환이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중계를 하러 가면 잘해서 기분은 좋았다.


아직 초반이지만 편파해설이 아니라는 것으로 점수를 따고 있다. 해설위원마다 색깔이 다른데 본인의 해설 스타일은 어떠한가.

(지도자로서) 능력이 없어서 나왔다. 처음에 해설은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첫날 사고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었지만, 사실 5회가 끝나니까 그제야 야구가 보이더라. 저 선수가 치고 있구나, 저 선수가 던지고 있구나! 어느 정도 트레이닝이 된 다음에 들어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해 스스로 화도 났었다.


첫 해설에 대한 반응은 어땠는가.

카카*톡이 50통 정도 와있었다. 대부분 지인이었는데 ‘처음인데 괜찮다’, ‘잘 하고 있다’ 등의 응원 메시지였다. 그런데 배우 안재욱은 전화해서 3~40분 동안 트레이닝을 시키더라. 이럴 땐 이러고 저럴 땐 저러라고. (야구인에게 배우가 지도한다?) 방송이니까!


몇몇은 ‘마동석이 해설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연관검색어에 ‘서용빈 마동석’이 뜬다.

비슷하단 얘기를 들었다. 모니터링을 하면서 나도 들어봤는데 비슷한가? (웃음) 이닝이 종료되고 마동석 씨의 광고가 나왔나보다. 그것을 보고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뭐… 재밌게 봐주시니까 그런가보다 하고 있다.


신바람을 이끈 내가 바로 서용빈

24년이 지나도 ‘서용빈’ 하면 따라붙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신인 3인방!’ LG는 1994년 무서운 신인 서용빈, 유지현, 김재현으로 구성된 3총사의 등장으로 최고 전성기를 누렸다. 당시 서용빈은 스타급 인기를 얻었지만, 사실 2명의 동기들에 비해 낮은 2차 6순위(전체 41순위)로 LG에 입단했다. 하지만 피나는 노력과 인내로 신인 최초 사이클링히트, 최다 안타 그리고 데뷔 첫 해 1루수 부문 골든글러브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LG의 꽃미남을 넘어 KBO리그 꽃미남이라고 불렸다.

구리숙소에서 (김)재현이와 방을 쓸 때였다. 당시 핸드폰이 보편화됐을 때가 아니었다. 우리 방으로 전화가 미친 듯이 왔다. 하루는 재현이에게 ‘야! 전화 끊어’라고 소리칠 정도로 전화벨이 울렸다. 그땐 야구장을 찾는 학생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원정경기를 가면 숙소로 중·고등학생들로부터 전화가 왔다. 광주면 광주, 부산 가면 부산! 안내 데스크에 전화해서 ‘저희 방 전화 좀 끊어주세요’라고 부탁했었다. (웃음)


평생 따라다닐 수식어다. 역대급 조화였다.

몇 년 전 일을! 20년이 지났는데. (웃음) 그땐 정신없이 지나간 해였다. 진짜 야구만 했던 해였다. 당시 야구장-숙소-야구장-숙소만 다녔다. 게임이 끝나면 버스 타고 구리에 있는 숙소에 들어가서 저녁을 먹고 개인훈련을 했다.


외모로만 평가받지 않고 실력으로 인정받았기에 그 가치가 더 높았다. 연습벌레였다고 하던데.

그땐 스프링캠프에 가면 야간훈련이 있었다. 아침 7시 산책을 시작으로 저녁 8시30분에서 9시쯤 훈련이 종료됐다. 간단하게 야식 먹고 새벽 1~2시까지 개인적으로 스윙 연습을 했다. 매일 4시간 정도 잤던 것 같다.


체력소모가 심했을 텐데.

그래서 죽을 뻔 했다. (웃음) 당시 룸메이트이었던 김기범 형이 ‘너 그렇게 하다 죽는다’라고 했다. 캠프 중간쯤 쉬기 전날이었다. 그날은 야간 훈련이 없어서 저녁을 먹고 잠깐 잤다가 일어나서 연습해야지 하고 누웠다. 그런데 눈을 뜨니 다음날 오후 12시였다. 12시간을 더 잔 것이다! 선배가 어려울 때였는데 ‘왜 안 깨웠느냐’고 성질을 냈다. 기범이 형이 ‘너 피곤해서 좀 쉬라고 놔뒀다’고 하더라. 진짜 그 정도로 몸이 피곤했던 것이다.


몸이 성하지 않았을 것 같다. 어떻게 관리했는가.

햄스트링이 올라오면 쥐가 나는 느낌이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찢어졌던 것 같다. 그런데 정신이 몸을 지배하도록 단련돼있어서 참고 했다. 연습 경기가 잡히면 새벽 6시에 일어났고 오전 산책을 하면서 오늘 해야 할 일들을 생각했고 밤늦게까지 스윙을 했다. 보여줘야 한다는 불안함 때문에 그 과정을 시즌 때도 똑같이 일 년 내내 했다. 나만의 루틴이 됐던 것 같다. 난 아침을 무조건 먹으니까, 사우나에서 샤워 하고 아침식사 후 스트레칭 개념으로 가볍게 웨이트 트레이닝 하고 그날 뭘 해야 할까 생각하며 야구장에 나갔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에서 장훈의 눈에 띄었고, 그때 그의 칭찬으로 자신감을 얻었다던데.

말 한마디로 초능력이 나오는가? (웃음) 당시 장훈 선배가 인스트럭터로 왔는데 왼손 타자들만 봐줬다. 왼손 타자들을 모아놓고 어드바이스 해주는데 나만 안 해주는 것이다. ‘이 사람이 내가 지명을 낮게 받은 걸 알고 있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대단한 분이 지명 순위가 높고 낮음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래서 ‘저도 해주십시오’라고 먼저 질문했다. 그러자 장훈 선배가 ‘너는 그대로 해라. 특별히 얘기할 게 없다’고 말했다. 그게 와전된 것 같다.


현역 시절 서용빈에게 그라운드는 놀이터였다.

토미 라소다 감독(당시 LA 다저스 감독)이 일본에 왔을 때 난 엑스트라를 하고 있었다. 펑고를 받고 있었는데 스태프에게 누구냐고 물은 뒤 ‘쟤는 메이저리그에 와도 잘하겠다’고 말했다고 하더라. 수비는 자신 있었다. (웃음) 김성근 감독님은 3루수가 부상으로 공백이 생겼을 때 ‘용빈아, 너가 3루 봐라’며 연습시켰다. 진짜 3루수로 나갈 뻔 했다. 그런데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셨는지 결국 출전하진 않았다.


뒤로 빠질 것 같은 공도 척척 잡아냈다.

수비 범위가 넓어 2루까지 가서 잡았다. 웬만하면 내가 다 잡아 버리니 수비코치가 말릴 정도였다. 2루수가 ‘OK’하면 2루수한테 주라고 하셨다. 느린 타구들은 뛰어갈 시간이 있으니까 가서 잡았던 것이다.


3번 1루수는 홈런을 많이 쳐야한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데 서용빈은 밀어치는 타법으로 짧은 안타를 생산해냈다.

내가 그것밖에 안 되는데 어떡하는가. 3타수 3안타, 4타수 4안타를 치다가 한 타수가 더 오면 홈런 한번 쳐볼까란 생각도 해봤다. 하지만 그때마다 폼이 무너져서 마음처럼 안 되더라. 다리를 들고 치면 확실히 타구가 좀 더 멀리 가기에 타격 폼에 변화를 주려고 했다. 그런데 김용달 코치님이 ‘3할 치고 있는데 왜 다리를 들고 치느냐’며 말렸다. 홈런 칠 파워가 안 됐기에 장타 욕심은 없었다. 홈런보단 1루로 나가기 위한 안타,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안타가 중요한 순간 빛을 발했다. 특히 1994시즌 한국시리즈에서 결정적인 활약을 했다.

장타력을 가진 타자도 아니었고 타점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대신 찬스에서 강했던 것 같다. 통틀어서 MVP가 될 수 있었는데 김용수 선배가 4게임 퍼펙트를 했다. 그래서 준MVP를 받았다. (김)용수 선배가 아니었으면 MVP였는데. 마무리 투수니까 마지막에 나오잖아! 1점이라도 줬음 내가 받았을 수도 있었겠지! (농담)


그리고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당시 턱시도 의상이 화제를 모았다.

난리 났었지! (웃음) 그땐 시상식에 오는 선수들이 겨울이니까 모직 원단에 더블버튼 정장을 입고 왔었다. ‘뭐야~ 야구선수들은 다 이렇게 입어야 하는 거야?’라며 턱시도를 알아봤다.


<당시 상황 재현>

- 김재현 : 형, 턱시도 입고 나갈 거예요? 말이 돼요?

- 서용빈 : 너도 입어!

- 김재현 : 괜찮겠어요?

- 서용빈 : 뭐 어때! 시상식에 멋있게 입고 가면 되지.

이젠 보편화됐지만 당시엔 아직 보수적이었다. 다음 시즌부터 조금씩 변화가 일었다. 선수들은 정장도 다르게 입었고, 때론 턱시도도 걸쳤다.


프로 생활을 하면서도 흔하지 않은 경험을 데뷔 첫 해 다 해봤다.

좀 더 경험한 다음에 그런 활약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라는 생각을 한다. 당시 그 순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앞만 보고 달렸던 때다. 정신없이 야구만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숨만 쉬어도 환호! 이것이 바로 서용빈 효과

2002년 8월 14일 잠실 SK 와이번스전은 서용빈으로 인해 뜨거웠다. 그의 입대 전 마지막 경기였다. 야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은 그의 등번호 ‘62번’을 세긴 노랑수건을 들고 그를 배웅했다. 2년 2개월 후 팀에 복귀했을 때 팬들은 그를 반겼지만 예전 서용빈의 100% 경기력을 기대하지 않았다. 대신 그라운드에 선 ‘서용빈’이란 존재 자체가 그 가치를 대신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스승이자 해설위원으로서 후배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군대 가기 전 경기를 기억하는가.

뭉클했다. 이광환 감독님이 아쉬워했다. (한숨) 영장 나온 걸 걱정하실까봐 얘기하지 않았다. 나중에 감독님이 아신 후에 도움을 못 준다는 것에 대해 엄청 화를 내셨다. 시즌 초반에 날아다녔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그러나 주장인데 2군행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갑자기 떨어졌다. 이래저래 맘이 편하지 않았다고 말씀드렸고 감독님은 입대할 때까지 맘 편히 야구하라고 주문하셨다.


군 생활 기간 동안 팬들은 서용빈을 기다렸고, 돌아왔을 때 환영했다.

그랬던 것 같다. 잘하는 선수들도 많은데…. 만족시켜드릴 만큼 활약하지 못 했는데도 아껴주셨다. 장타와 타점은 많지 않지만 중요할 때, 결정적일 때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기억을 많이 해주셨던 것 같다.


아쉬운 점은 제대 후 2군에서 머문 시간이 길었다. 하지만 불평 없이 묵묵히 기회를 기다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 지도자들이 형, 선배 같은 역할이라고 얘기했다. 그런 것에 약간 실망했다고 해야 하나? 김연중 단장님이 ‘용빈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라’고 했고 내가 안 하겠다고 얘기했다. 신체적 능력이 떨어진 것도 있었지만, (야구) 외부적인 것들이 식상했다.


서용빈의 은퇴를 아쉬워하는 팬들이 많았다. 구단 입장에서도 안타까워했다.

김정민 코치와 함께 은퇴식을 해줬다. 예정에 없던 방송도 잡아줘서 MBC에서 중계했다. 5회가 끝난 후 중계석에 올라가서 허구연 해설위원이랑 인터뷰도 했다. 내가 했던 것에 비해 혜택을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보다 기록이 좋고 잘했던 선수들도 많은데… 그런 쪽으로는 팬들에게 미안하면서도 부끄럽다.


일본 연수 후 친정팀으로 돌아와서 스카우트와 코치로서 활약했다.

은퇴 후 다른 일을 하려고 했는데 구단에서 프로그램을 만들어 먼저 제안했다. 2007년에는 연수를 했고 2014년에는 정식 코치로 다녀왔다. 내가 알기로는 NPB에 코치로 등록된 사람이 나와 김기태 감독님밖에 없을 것이다. (웃음)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경험이 없는 어린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기본적인 원리와 지속성을 강조했다. 그 다음해에도 그렇게 했다. 2016년이 타고투저라고 해도 LG가 처음으로 2할9푼 대를 쳤다. 2년 동안 노력해서 완숙미를 다져갈 때 장타 욕심 탓에 타격 폼들이 무너졌다. 정립이 되기 전에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래도 이형종은 서용빈 코치를 만나면서 타자로서 우뚝 섰다.

(이)형종이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시작했다. 타자는 처음이었기에 아주 기본적인 원리만 가르쳐주며 훈련을 많이 시켰다. 형종이가 워낙 감각적으로 뛰어나니까 자기 스타일로 응용을 한 것이다. 발전 속도도 빨랐다. 형종이가 타자로 전향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육성군 담당이었다. 당시 양상문 감독님에게 ‘형종이를 비밀병기로 강하게 준비시키고 있겠다’고 말했었다.


가장 아픈 손가락은 누구인가.

지환이다. 해외연수를 마치고 국내연수를 할 때였다. 전력분석원, 스카우트, 원정기록원을 3개월씩 다 경험하는데, 신인 지명 시기에 스카우트였다. 그때부터 지환이를 봤고 신인 시절부터 같이 걸어왔다. 1군에 올라와서 2016년까지 매년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더 빨리 잘할 수 있었는데… 아직까지도 부족함이 보이니까 아쉽다.


더그아웃 밖에서 만나는 제자들을 보면 어떤 기분인가.

답답하기도 하고… 이 녀석은 이렇게 해야 하는데 하는 욕심도 있다. 그런데 지금 잘하고 있으니까 괜찮다. (웃음) 부산에 가서 작은 이병규도 봤는데 아프지 않고, 열심히 하더라. (정)의윤이도 FA 계약해서 좋고. 다 아픈 손가락들이다.


팀을 떠난다고 했을 때 선수들이 많이 아쉬워했다. 그중 누가 눈에 밟히던가.

의외로 (유)강남이가 되게 아쉬워했다. 강남이를 예뻐한 게 아니라 귀여워했다. 덩치에 비해 되게 귀엽다. (웃음) 강남이는 올해 무조건 잘할 줄 알았다. 데이터로 봤을 때 타구속도, 발사각도 등 모든 메커니즘이 정립돼 계속 상승하고 있었다. 예전에 좋았던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했었는데. 더 잘할 수 있는데 음지에 머무는 친구들에게 계속 눈길이 간다.


항간에 류중일 감독 체제로 바뀌었기에 자진사퇴한 것이란 소문이 있었다.

아니다. 능력이 없으면 스스로 물러나는 것이 맞다. 그리고 50세 전에 무조건 대학원에 간다라고 생각해왔다. 코치로서 능력이 부족해서 나온 것도 맞지만 지난해 성적이 좋았어도 사퇴하려고 했다. 그래야지만 50세 이전에 대학원을 마무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장으로 복귀할 계획이 있는가.

지금 공부하는 이유가 더 좋은 지도를 하기 위해서다. 더 고급스런 기술을 전수하고 싶기에 학교를 다니는 것이다.


이젠 중계석의 꽃이 된 서용빈

몇 년 간 동고동락했던 제자들이 이젠 멀리서 해석해야 하는 선수가 됐다. 아직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제자들이지만 평정심을 가져야 하는 것 또한 서용빈 해설위원의 몫이다. 해설위원은 중립을 지켜 어느 한 편으로만 치우치지 않아야 한다. 만약 개인감정이 가미된다면 이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편파중계가 된다.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서용빈 위원은 현장에서만큼은 현실에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대신 그만의 색깔이 묻어나는 독특하고 참신한 해설을 준비하고 있다.


해설위원이 됐을 때 누구의 조언이 와 닿았는가. 도움이 된 점이 있는가.

김재현과 최원호가 가장 많이 조언했다. (양)준혁이 형도 좋은 말을 많이 해줬다. 전부 욕 빼고 다 하라고 했다. 욕만 하지 말라고. (웃음)


경기는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말하는 연습도 하는가.

해설은 몸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말로 표현하는 것이다. 고급스런 말하기를 위해 스피치학원을 다녔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학교를 간다. 수강 신청한 수업 외에도 교수님들에게 양해를 구해 청강하고 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까먹는 나이가 돼서 특별한 일이 없으면 수업을 마치고 자습하며 최대한 학교에서 시간을 보내려고 한다. 교수님을 만나고 각 과마다 박사학위 취득을 위해 상주하는 사람들을 만나 의견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듣고 있다.


해설위원이 된 후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을 것 같다.

계속 팀에 있었기에 나 혼자 움직이는 것이 처음이다. 모든 걸 내가 해야 한다. 대학원도, 해설도 새로운 삶이라 불안정한 상태였다. 육체적으로는 많이 움직이지 않지만 정신적으로 피곤했나 보다. 대학원에 들어가니까 공부했던 사람보단 베이스가 낮다보니 누구보다 집중해서 수업을 들어야 한다. 오후 12시부터 8시 30분까지 이어진다. 9시간 동안 집중하는 것이다. 해설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3연전은 매뉴얼이나 시스템을 몰라 당황해서 어떻게 해설을 했는지 모르겠더라. (웃음) 남들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위로해주지만 난 아니다. 하려면 잘해야지! 조금씩 편안해지고 있다. 일은 다르지만 내가 했던 분야니까.


가끔 해설위원들이 선수들에게 기술적으로 조언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은 코치가 있으니까 따로 얘기하진 않는다. 사전 인터뷰도 훈련에 방해가 될까봐 운동장이 아닌 사이드에서 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미리 양해를 구하고 훈련시간에는 지장을 안 주려고 한다.


본인만의 독특한 해설이 있었는가.

김치찌개에 비유해서 타격을 설명한 적이 있다. 느닷없이 ‘김치찌개 좋아하세요?’라고 질문했다. 캐스터도 당황하고 PD도 당황했었다. 윤영주 캐스터가 좋아한다고 대답했고 또 뭐 넣는 것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돼지고기라고 했고 나는 멸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치찌개에는 뭐가 꼭 들어가야 돼요?’라고 또 질문했다. 당연히 김치! ‘타격할 때도 반드시 해야 할 게 있다. 김치찌개를 끓일 때 반드시 김치가 들어가듯이 타격이나 투구할 때도 반드시 해야 하는 동작들이 있다’며 ‘돼지고기와 참치 같은 건 서있는 자세, 템포, 리듬 등의 개인성향’이라고 설명했다. 그것이 팬들에게 좀 색달랐나보다.


새로운 서용빈으로 일어섰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은데 계획과 목표는 무엇인가.

주어진 환경에서 지금까진 뭣도 모르고 앞만 보고 왔다면 이젠 생각하고 정리하는 시간이라고 본다. 이 기간은 더 성숙된 지도자의 길로 가는 발판이라고 말하고 싶다. 크게 욕심은 없지만 그라운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들에게 좋은 지도를 하기 위해 선택했기에 나빠지진 않을 것 같다. 좀 더 좋은 지도를 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는 것이 목표다.


***

당장 현역선수로 복귀하더라도 뒤지지 않는 탄탄한 근육을 자랑한다. 선수 시절부터 지금까지 그가 스스로 결심했던 다짐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첫째, 배 나오지 않기! 둘째, 야구장에 갈 때 술 냄새 풍기지 않기! 그가 진정한 프로라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스스로 증명하고 있다. 24년 동안 계속….



                     더그아웃 매거진 86호(6월호) 표지

위 기사는 대단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8년 6월호(86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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