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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SK 와이번스 조동화 코치

대단한미디어 입력 2018.09.19.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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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가을동화' 코치로 변신한 조동화


가을이 되면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인 조동화.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후반기와 포스트시즌만 되면 마치 약속한 땅을 만난 듯 그라운드 위를 날아다녔다. SK 왕조 시절을 보냈고 팀 창단 15주년 기념행사에서는 근속 감사패를 받았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보낸 성과였다. 시간이 흘러 또 다른 미래를 설계한 조동화는 19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지도자로서 다시 그라운드에 섰다. 선수 시절 ‘번티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센스 있는 플레이를 선보였던 조동화의 지도 스킬은 어떨까. 조동화의 제2막이 열렸다.


Photographer Mino Hwang   Editor Kwonhyang Pyo   Location SK Futurespark


#.아직 낯선 이름 ‘조동화 코치님’


“조동화 코치! 코치님!”


동갑내기 박정권과 이대수가 키득키득 웃으며 조동화 코치를 불렀다. 불과 며칠 전까지 같이 그라운드에 섰던 친구를 이름 대신 ‘코치님’이라고 존칭을 붙이려니 어색하면서도 즐거워 보였다. 옆에 있던 후배 선수들은 그런 선배들의 모습이 귀여웠던지 소리 죽여 웃었다.


조동화 코치 역시 낯설었다. 본인도 터지는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그래도 3주 정도 지나니 이 분위기에 적응했다. 그리고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정권이, 대수도 조금 있으면 같이 (코치) 할 건데 뭐! 강압적으로 시키고 있다”며 맞받아쳤다.


현역시절과 달라진 건 호칭뿐이 아니었다. 생활패턴이 완전히 바뀌었다. 첫 번째로 하루가 일찍 시작됐다. 이른 출근 때문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고 있다. 이제는 오전 6시 30분이면 자동으로 눈이 떠진다고 한다. 두 번째는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을 위한 삶이라는 것이다. 야구장에서만큼은 코치로서 선수들을 먼저 챙기고 있다.


평소 친분이 두터운 이들이 옆에서 그의 생활을 도왔다. 특히 먼저 지도자가 된 제춘모 코치가 든든한 조력자로 나서 조동화 코치의 연장선을 함께 이어나가고 있다.


“코치는 선수를 지도하는 것 외에 외적으로 하는 일이 있다. 보고서 쓰기, 스케줄 관리, 센스 있게 음료를 준비하는 등 그라운드 밖 코치실에서도 하는 것이 많다. 옆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많이 조언해줘서 제춘모 코치에게 의지하고 있다.”




#.잊지 못할 팬들의 선물 ‘가을동화’


지난 7월 16일, 조동화 코치는 프로 생활 19년 만에 은퇴를 선언했다. KBO리그 구단들이 전체적으로 육성 및 유망주 양성에 힘을 쏟는 분위기이기에 지난해부터 지도자로 전향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구단으로부터 먼저 코치 제안을 받았다. 시즌 중에 은퇴를 발표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컸지만,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한 편으로는 시원섭섭했다.


조동화 코치는 프로 통산 14시즌 동안 1189경기에 출전해 타율 0.250 191도루를 기록했다. 이름에 비해 기회를 많이 받지 못해 주로 대수비, 대주자, 대타자로 경기에 나섰다. 첫 정규타석을 채운 해가 2013시즌이었다.


하지만 외야 전 포지션을 아우르는 민첩함과 빠르고 정확한 주루 플레이로 그의 역량은 주전선수만큼 높이 평가받았다. 구단 내 도루 부문 1위를 다퉜으며 KBO리그에서는 최고의 ‘번티스트’라고 불리며 통산 희생번트 4위에 이름을 올렸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려든 도루와 번트가 그를 살린 것이다.


“프로에 들어와서 생존하기 위해 번트를 시작했다. 왜소한 체격 탓에 수비, 타격, 체력이 남들에 비해 떨어졌다. 훈련과 시합 중 제일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장기를 찾던 중 작전수행능력이 좋다는 것을 발견했다. 자부심이 생겼고 나의 것으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 FA 전까지 김민재 코치님의 기록을 깨는 것을 목표로 삼기도 했다.”


막판 스퍼트를 올리는 데에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였다. 중요한 경기, 특히 마지막 순위권 다툼 때와 포스트시즌에서 날렵한 플레이를 펼쳐 ‘가을동화’라는 별명을 얻었다. 가을이 되면 조동화 코치의 이름을 떠올리는 SK 팬들이 많은 이유다.


하지만 그동안 세대교체가 얼마나 이루어졌을까. 그의 빛나는 별명을 모르는 선수들이 꽤 많다고 한다.


“이젠 묻힌 별명이라… 같은 시기에 야구했던 또래 선수들이나 주위에서 가끔 이야기해주곤 한다. (웃음)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팬과 언론이 만들어준 소중한 별명이다. 한 선수가 선수 생활을 마무리하기까지 닉네임이 있다는 건 좋은 뜻이다. 가족에게도 좋은 별명이 남겨져 있다는 것이 뿌듯한 일이다. 기분 좋아지는 추억이다.”


공수주에서 골고루 제 역할을 해내며 묵묵한 해결사로 꼽혔다. 그의 희생정신은 항상 선수들에게 귀감이 됐고, 이를 보상받은 듯 2014시즌 종료 후 FA 자격을 얻었다. 조동화 코치는 다른 곳이 아닌 원구단인 SK와 4년 총액 22억 원에 계약했다.


뜻깊은 자리의 주인공이 된 날도 있었다. 2015년 팀 창단 15주년 기념행사에서는 김원형 코치와 함께 팀 15년 근속 감사패를 받았다. 의리와 믿음을 모두 인정받은 영광스런 자리였다.




나름대로 실속 있게 선수 생활을 했다. 다만 인간적으로 아쉬운 점과 팬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남았다.


“FA 기간 성적을 못 냈다. 화려한 마무리보다 평소 생각했던 마무리를 하고 싶었다. 김재현 선배님처럼 멋있게 은퇴하고 싶었는데 제 몫을 다 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구단에서 대우해줘서 FA 계약을 했고, 나에게 기대했을 텐데… 주장을 했는데 생각했던 목표치도 못 가고 마무리해서 많이 아쉽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형’


은퇴를 준비하면서 동생 조동찬에게 가장 의지했다. 가장 오랫동안 야구한 사람이었기에 친동생을 떠나 함께 고민하며 조언을 얻으려 했다.


어린 시절 일터에 나가신 부모님을 기다리며 동생 조동찬과 공터를 찾아 그리 뛰어다녔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딱히 놀 거리가 없었던 터라 그저 뛰는 것이 전부였다. 조동화 코치는 자신의 어린 모습을 “잘 뛰는 사람 중에 남미와 아프리카인이 많은데 그들처럼 허허벌판에서 계속 뛰는 것과 같았다”고 돌려서 묘사했다.


달리기가 일상이었던 조동화는 초등학교에서 육상선수로 뛰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의 권유로 야구를 시작했다. 하도 뛰어다녀서 축구부에 가입하려고 했는데 집과 거리가 있어서 가까운 학교에 소속된 야구부에 노크했다. 그날 바로 입단 테스트를 받았고 그 자리에서 합격했다.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기 3일 전이었다.


프로에 입단하기 전까지 마운드에 섰다. 하지만 고등학생 조동화의 신장은 175cm에 58kg이었다. 아무리 세게 던져도 힘이 없어서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다. 살길을 찾아야 했다. 안정적인 대학 진학도 있었지만, 과감히 프로에 도전했다. 대신 포지션 변화는 분명히 필요했다.


“그 당시 투수를 해야지만 지명권이 높았기에 단순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집안 형편이 안 좋았기에 결정 권한이 거의 없었다. 또 동생이 워낙 잘했다. 지금 생각해도 동생은 되겠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친동생이지만 무조건 프로 가겠다는 느낌이 왔다.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테스트를 받는 중에 SK로 옮겨왔고, 발이 빠르니까 야수로 바꿔보자 했고 좋게 봐주셔서 합격했다.”


2000년 1월 쌍방울이 해체되면서 자연스레 SK에 인계된 조동화는 신고선수로 입단 계약을 했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지만, 욕심 부리지 않고 모두의 행복을 위해 당차게 걸었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나 자신을 알았다. 학교에서는 잘했지만 크게 봤을 때는 별로였다. 대학에 도전하고 싶었지만, 아버지께서 가정형편을 생각하라고 하셨다. 당시 감독님이 배팅볼 투수를 제안하셨는데 그러기엔 아쉬움이 남았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마지막 희망으로 쌍방울에 입단 테스트를 받았다. 만약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부모님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다.”


무명생활이 있었지만, 그에게도 꽃길이 열렸다. 상무 체육부대 제대 후 1군에서 자리를 잡았다. 2007시즌에는 첫 두 자릿수 도루를 달성했으며 필요할 때마다 화려한 수비와 적시타를 때려내는 해결사로 떠올랐다. 팀 주장으로서 후배들에게 존경받는 선배로 꼽혔다.


#.닮았지만 정반대인 ‘형제’


조동화 코치와 조동찬의 형제애는 야구판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두 살 터울이기에 가끔 치고받고 싸울 법도 한데 조씨 형제는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남다르다. 형이 동생을, 동생이 형을 존중하는 모습을 모두가 부러워하고 칭찬한다.


두 사람은 어렸을 때부터 매일 붙어 다녔다. 그래서 그런지 야구 스타일도 비슷하다. 하지만 은근히 다른 점이 많다.


“어렸을 때 어머니께서 달걀 장사를 하시면서 가끔 용돈을 주셨다. 꾸깃꾸깃한 5000원을 주시면 나는 한 판에 50원짜리 오락으로 다 썼다. 동생은 1000원씩 하는 햄버거를 콜라도 없이 다 사 먹었다. 그런데 형 주려고 꼭 하나씩 남겨주더라.”


야구하는 데에도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조동화 코치는 좌투좌타에 외야수이며 조동찬은 우투우타에 내야 유틸리티다. 보여지는 면 외에도 운동하는 취향, 스타일이 다르다.


“나는 무턱대고 하는 스타일이다. 많이 하면 잘하는 줄 알았기에 나가서 열정적으로 운동했다. 친구들과 달리 청바지를 입은 적이 없다. 항상 트레이닝복 혹은 유니폼을 입었다. 쉬는 시간에 놀고 즐기면 야구 실력이 줄어드는 줄 알았기 때문에 힘들어도 나가서 뛰었다. 고지식한 운동 패턴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반면 동생은 뭘 해야 하는지 파악하고 효율적으로 행동했다. 아들이 야구한다고 하면 동찬이 같은 교육방침으로 가르칠 것이다.”




#.형제가 합친 우승반지 ‘9개’


매일 같이 놀던 형이 갑자기 없어지니 궁금했나 보다. 조동찬은 형이 어디에 있나 찾아다녔다. 다행히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에서 훈련했기에 금방 찾아냈다. 운동에 집중하느라 형 조동화 코치는 동생이 찾아왔다는 것을 곧바로 눈치 채지 못 했다. 조동찬은 형 모르게 7개월 동안 담벼락에 붙어 형이 운동하는 모습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3학년에 진학했을 때 형을 따라 야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어딜 가나 형은 동생을 챙겼고, 동생은 형을 따랐다. 머리가 컸으니 형에게 대들기도 할 텐데 절대 반항하지 않았다. 부모님의 철저한 교육 덕분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조동찬에게 “혹여 형이 나쁘게 행동하더라도 이를 똑같이 따라서 하면 안 된다”고 일침을 가했다. 그렇다고 형이 불량 청소년이었던 건 아니다. 가끔 거친 행동이 조심스러웠기에 주의를 줬던 것이었다.


프로에 입단한 조동화 코치는 동생부터 챙겼다. 고등학생인 조동찬이 자신보다 덩치가 컸기에 그와 비슷한 체격인 정상호와 이진영에게 야구용품을 부탁해서 동생에게 가져다줬다. 이 대물림을 최정-최항 형제에게도 알려줬다고 한다.


“처음으로 마무리훈련에 갔는데 프로 선수들은 이렇게 야구 하는구나 라며 신기했다. 한두 살 터울 선수들에게 장비를 받았고, 쇼핑가면 나의 것보다 동생 스파이크나 용품을 사서 박스포장해서 보내줬다. 동찬이가 형이었어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둘 다 우승하고 FA로 큰돈을 받았을 때 어렸을 적 추억을 더 생각했다.”


형제가 같이 운동을 시작해도 프로까지 가는 경우는 드물다. 그 어려운 일을 조동화-조동찬 형제가 이뤄냈다. 어려운 형편에서 형제가 똘똘 뭉쳐 꿋꿋하게 한 길만을 걸었다. 그리고 한 팀에서 19년, 17년을 몸담으며 각 구단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조동화 코치는 조동찬을 인생의 동반자이자 야구인으로서 남다른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3주 만에 찾은 ‘아픈 손가락’


조동화 코치에게 지도자 직을 제안한 이는 염경엽 SK 단장이었다. 염경엽 단장은 2군과 잔류군을 오가며 훈련하는 방법, 기술, 생활 등을 익히라고 주문했다. 코치로서 기초 매뉴얼부터 습득하라는 뜻이 담겨있었다.


조동화 코치 역시 의욕이 불타올랐다. 그가 프로에서 성공적으로 이행했던 기술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파악한 선수들의 성향에 따라 개인별 맞춤훈련을 진행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압박이 아닌 소통으로 다가가겠다고 약속했다.


현재까지는 계획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조동화 코치는 더운 날씨 속에서 정신적인 스트레스까지 받는 선수들의 마음의 짐을 덜어주려고 대화를 시도했다. 이젠 선수들이 먼저 다가와서 상담요청을 하고 있다. 가족 문제, 깊게 가면 여자친구와의 관계, 사회적 문제 등 거리낌 없이 풀어내고자 귀 기울이고 있다.


박정권, 이대수 등 고참 선수들은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쌓인 내공이 있기에 스스로 감정조절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가장 걱정되는 선수들은 30대 초중반의 중고참 선수들이었다. 질풍노도의 시기이기에 정신적인 어려움이 많다고 귀띔했다.


“최근까지 소통하고 몸으로 부딪혔던 사이 아닌가. 긍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해준다. 다만 야구 때문에 힘든 건 팀 사정과 개인의 실력으로 자기가 감수해야 된다. 그래서 야구 이야기 말고 사적인 내용으로 푼다. 얼마 전 후배 5명이 찾아왔다. 2명은 아직 갈팡질팡하고 있는데 3명은 잘 이겨냈다고 연락이 왔다. 나 때문이 아니라 좋은 결과가 나서 좋다. 후배 이야기를 들으면서 옛날 생각이 나서 나도 힘을 얻었다. 서로 뿌듯한 것 같다.”


#.아는 느낌 찾은 가을의 비룡군단


그의 옆에 든든한 동료들이 남아있기에 선수들에게 다가갈 용기가 생겼다. 그들로부터 받는 긍정 에너지가 가장 효능 좋은 천연 비타민이었다.


전혀 다를 것 같은 성격의 소유자인 박정권, 이대수, 김강민와 박재상 코치, 제춘모 코치가 조동화 코치의 베스트 멤버다. ‘송도의 골목대장’으로 불리는 이들은 SK 왕조구축에 앞장섰던 전설들이다. 거침없는 입담과 업 된 스타일의 호쾌한 이들과 정반대의 성격인 조동화 코치와의 조합이 의외이긴 하지만, 막상 다 같이 모여 있는 모습을 보면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난다’는 말이 꼭 남녀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한다.


“친구들이 활발한데 난 차분하고, 또 내가 다운돼있으면 그들이 올려주고! (웃음) 선배들과 함께 했던 왕조 시절이 훈련은 많았지만, 재미있었다. 잡아줄 때 잡아주고, 풀어줄 때 풀어주는 조합이 잘 맞았다. 아마 후배들도 재미있었을 것이다. 같이 있지는 않지만, 현재 (이)재원이가 주장을 하면서 그때와 같이 장난치며 선수들과 소통하고 있을 것 같다. 모두 그렇게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면 보기 좋다.”




구단마다 색깔이 있다고 한다. SK는 모범생 이미지가 강하고 왕조 시절의 위엄으로 다소 무거운 느낌이 있지만, 내적으로는 개구쟁이 스머프 마을 같다. 선후배 간 예우를 갖추는 듯해 보이지만, 무방비상태에서 고개를 휙 돌리면 친구, 동기와 지내는 듯 장난치는 모습이 많이 발각(?)된다. 한마디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끝판왕들이 모인 곳이다.


“선배들이 잘 다져놓았던 조합이 잠깐 없었다. 팀 분위기도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를 반복하며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올해 주장 재원이를 필두로 잘 해주고 있고 지금 선수들이 잘 뭉쳐있다. 올해도 좋은 시즌이지만 내년쯤 우승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다.”


조동화 코치는 SK 창단멤버로 입단해 마침표까지 원구단에서 찍었다. 친정팀에 대한 남다른 애정으로 꾸준히 야구만 하며 SK의 역사를 함께 썼다. 이제 코치로서 한 발자국 뗀 조동화 코치는 비룡군단의 자부심을 가지고 선수들과의 케미를 더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

소통과 배려, 인성으로 후배들에게 다가가겠다고 선언한 조동화 코치의 은퇴식은 9월 8일 두산전으로 예고됐다. 조동화 코치는 응원해준 구단과 팬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이날 만날 것을 약속했다.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이날 원년 팬들이 많이 찾아와서 좋았던 추억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것이다.


                   더그아웃 매거진 89호(9월호)

위 기사는 대단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8년 9월호(89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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