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후에게 아버진 이종범은 '훈장'인 동시에 '낙인'이었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2018. 9. 20. 1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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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은 가족들이 모여서 한 해의 수확을 감사하는 명절이다. 함께 모인 가족은 지난 고된 시간을 버틴 위로다. 수확에 감사하는 이유는, 이를 통해 한 해 더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기 때문이다. 추석이 안겨주는 키워드, 가족과 수확과 미래. 야구에서 가장 유명한 가족이자, 데뷔 후 가장 큰 수확을 거둔, 미래가 가장 밝은 야구선수 이정후(20·넥센)는 추석의 주인공으로 안성맞춤이다. 지난 18일 두산전을 앞두고 이정후를 만났다.

넥센 이정후가 추석을 앞둔 18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인터뷰 전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고척|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태어나 보니 이종범의 아들’ 일본 태생이다. 1998년 나고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이종범이었다. 등번호 7번을 단, 주니치 선수. 이미 그때 아버지는 ‘바람의 아들’이었다. 이정후는 “네살까지 일본에 있었다는데, 기억나는 건 별로 없다”면서 “좀 철들고 갔었더라면 일본어도 조금 할 수 있을 텐데”라며 웃었다. 야구는 자연스레 일상이 됐다. 집안에는 온통 야구 장비가 넘쳐났다. 공 던지고, 방망이 휘두르는 게 익숙하다.

아버지는 되레 아들을 야구에서 떼놓으려 했다. ‘이종범의 아들’로 야구를 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다. 운동에 재능 넘치는 아들을 다른 종목으로 내몰았다. 이정후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골프, 축구, 수영, 쇼트트랙 등 이것저것 정말 많이 했다”고 말했다. “야구는 안된다”고 했다.

피는 못 속이고, 운명은 악착같다. 사촌형(LG 윤대영)이 야구를 시작하자 이정후의 몸이 달았다. 3학년을 앞둔 2007년 2월, 어머니 정연희씨는 아들 손을 잡고 야구부 테스트를 보러 갔다. 이정후는 “아빠는 스프링캠프에 가 있었다. 아마 아빠는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훈장’인 동시에 ‘낙인’이었다. 어린 아들에게 ‘야구선수 이종범’은 훈장(勳章)이었다. 자랑은 못했다. 이정후는 “엄마가 엄격했다. ‘우리 아빠가 이종범이야’라는 자랑은 한 번도 안했다”고 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언제나 든든하다. 이정후는 “아빠 경기하는 모습 중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세리머니 장면이 가장 멋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야구 선수가 됐다. 아버지는 받아들였고, 대신 유일한 조언을 했다. “그럼, 왼손으로 쳐라”. 오른손잡이 이정후는 우투좌타가 됐다. 가시밭길에서 성공 확률을 높이려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우투좌타는 파워 대신 정확도를 얻는다. 이정후는 “다시 태어나면 우타자가 되고 싶다”고 웃으면서도 “왼손으로 친 게 지금의 나로서는 더 잘 된 일”이라고 말했다.

훈장이었던 아버지는 야구 시작 뒤 ‘낙인’이 됐다. 이정후는 “주변의 시선이 달랐다. 다들 ‘어디 한 번 얼마나 잘하나 보자’는 식으로 쳐다봤다”고 했다. 그러면서 “아빠가 왜 야구를 시키지 않으려 했는지 알게 됐다. 너무 힘들었다. 그래도 울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아빠는 왜 그렇게 야구를 잘 해가지고, 나를 힘들게 하나 원망한 적도 있다”고 웃었다.

넥센 이정후가 추석을 앞둔 18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인터뷰 전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고척|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이종범을 최고로 만든 것은 ‘헝그리 정신’이었다. 성공에 대한 열망이 컸다. 이정후가 최고를 향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은 아버지였다. 이정후는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시선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줬다”고 말했다. “그 시선들에게 절대 지고 싶지 않았다. 속상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다, 내가 더 잘하는 수밖에…”라고 덧붙였다.

아버지는 “1군에 가려면 수비를 잘 해야 한다”고 했지만 고교생 정후는 “수비 잘하면 1군에 있을 수 있지만 절대 슈퍼스타는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잘 쳐야 경기에 나설 수 있고,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을 수 있다”고 마음 먹었다.

휘문고 1학년 때부터 매일 밤 9시면 방망이를 들고 주차장으로 나갔다. 드나드는 차량 헤드라이트 불빛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 200개의 스윙훈련을 했다. 3년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이정후는 “아직 어려서 힘이 약하니까, 내 장점은 정확히 중심이 맞히는 콘택트라고 정했다. 그 훈련들이 지금 성적으로 돌아온 것 같다”고 말했다. 여전히 오가는 주민들이 거든다. “어릴 때부터 스윙 열심히 하더니, 지금 잘 하는구나.”

지난 2012년 5월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열린 이종범 은퇴식, 이종범은 아들 이정후와 시구 시타를 준비하고 있다. 이석우 기자

■모든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리를 내 준다 이정후의 기억 속, 아버지는 ‘부존재’로 존재했다. 명절마다 스프링캠프와 원정경기로 자리를 비웠다. 이정후는 “아빠랑 해야 할 일은 엄마가 다 해주셨다. 정말 고생 많으셨다”면서 “엄마도 내가 겪은, ‘이종범의 아내’라는 시선을 모두 견뎌내셔야 했다”고 말했다. 이정후는 휘문고 1학년 때부터 주전이었다. 실력으로 따낸 자리지만, 주변의 시선이 따뜻할 리 없다.

‘부존재’의 아버지였던 이종범은 이제 살가운 카톡을 보낸다. 이정후가 꺼내 보인 휴대전화에는 ‘자신감 잃지 말고, 고개 숙이지 말고’, ‘지금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 없어’, ‘아빠는 믿으니까’ 등 칭찬과 격려의 메시지가 가득하다. 이정후는 “동생한테 배워서 요즘엔 이모티콘도 많이 보내주신다”며 웃었다. 세상의 모든 아버지는 나이를 먹는다. 이정후는 “아빠가 이제 머리숱이 많이 줄었어요. 내가 놀리면, ‘젊을 땐 많았다’고 그래요. 구단 협찬 샴푸도 갖다 드렸어요”라고 한 뒤 “전 지금부터 관리하려구요”라면서 제 머리를 한 번 쓰다듬는다.

이종범은 2012년 은퇴선언 때 “아들이 도루 기록을 깰 것 같다”고 했다. 이정후는 “그때 중학생 때였는데,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 아 말도 안되는 소리였구나. 도루 84개는”이라고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196개(안타)는 한 번 도전해 보고 싶다”고 눈을 반짝였다. 그때 쯤이면, 별명 ‘바람의 손자’와도 이별이다. 이정후는 “지금은 괜찮은데, 서른 넘어서도 ‘손자’라고 불리면 이상하지 않을까요?”라고 말했다.

넥센 이정후가 추석을 앞둔 18일 서울 고척 스카이돔에서 인터뷰 전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 고척|이석우 기자 foto0307@kyunghyang.com

■수확의 추석과 한가위 달 소원 이정후에게 추석을 앞두고 올해 거둔 가장 큰 수확을 물었다. 당연히 ‘아시안 게임 금메달’일 줄 알았는데 전혀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이정후는 “프로와서 2군에 한 번도 안 가봤어요. 올해 다쳐서 처음 갔는데, 형들이 1군 올라오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크게 느꼈어요”라면서 “내가 있는 자리가 당연한 게 아니구나. 내가 더 노력을 해서 지켜야 하는 자리구나라는 걸 배웠어요. 그래서 부상 복귀했을 때 성적이 잘 날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이제 갓 소년을 벗어난, 스무살 청년의 입에서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아버지는 은퇴 때 “의지와 목표 없이 하는 야구는 노동에 불과하다”고 했고 “‘이 정도면 됐다’고 하는 훈련은 반드시 실패한다”고 했다.

커다란 추석 달을 보고 빌 소원을 묻자 “솔직히 말해서 저는 팬 여러분이 많이 와야 신나고 집중이 잘 되거든요. 야구장 가득 채워주세요”라고 했다. 오래 전 지켜봤던, 아버지도 그랬다. 빽빽하게 들어찼던, <목포의 눈물>과 <남행열차>가 울려퍼지던 잠실구장에서 펄펄 날았더랬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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