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배구, 한국 스포츠에 특별한 종목 ..다시 잘 준비해서 도쿄에 꼭 가자

신명철 입력 2018. 10. 5. 12:17 수정 2018. 10. 6.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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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여자 배구 대표 팀 ⓒ FIVB 제공

[스포티비뉴스=신명철 기자] 모두들 위기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는 늘 있었고, 한국인은 특유의 끈기로 위기를 극복했다. 여자 배구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한국은 4일 고베에서 열린 2018년 세계여자배구선수권대회 C조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세트스코어 3-0으로 이겼다. 마지막 경기에서 완승한 한국은 유종의 미를 거뒀지만 앞선 4경기에서 모두 졌다. 반드시 잡아야 할 태국과 아제르바이잔에 진 점은 매우 뼈아프다. 2020년 도쿄 올림픽 예선에서 유리한 조에 들기 위해서는 좀 더 분발해야 했다. 그러나 여전히 올림픽에 갈 수 있는 길은 열려 있다.

한국은 1974년 이후 세계선수권대회 본선 1라운드에서 처음 탈락했다. 거슬러 올라가면 2014년 대회(이탈리아)에는 나서지 못했고 2010년 대회(일본)에서는 태국과 공동 13위를 기록했다. 2006년 대회(일본)에서는 아제르바이잔과 함께 13위에 올랐다. 2002년 대회(독일)에서는 5위결정전에서 쿠바에 세트코어 2-3으로 졌다. 최광희 장소연 한유미 김사니 구기란 등이 활약한 대회다.

1998년 대회(일본)에서는 페루와 공동 9위에 올랐고 1994년 대회(브라질)에서는 3위 결정전에 서 러시아에 세트스코어 1-3으로 패했다. 이도희 장윤희 김남순 홍지연 장소연 등이 4강 멤버다.

1990년 대회(중국)에서는 5위 결정전에서 페루를 세트스코어 3-1로 꺾었다. 박미희 지경희 장윤희 남순옥 등이 주전으로 뛴 대회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는 등 그 무렵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페루는 한국인 박만복이 지휘봉을 잡고 있었다. 한국은 서울 올림픽에서 홈코트 이점을 살리지 못하고 출전 8개국 가운데 꼴찌를 했다.

한국은 1986년 세계선수권대회(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8위를 했는데 이 대회에서 북한은 출전 16개국 가운데 14위를 기록했다. 한국보다 먼저 1956년 제2회 대회(프랑스) 때 세계선수권대회에 데뷔한 북한은 그 대회에서 7위, 1962년 대회(소련)에서 10위에 오른데 이어 1970년 대회(불가리아)에서는 소련과 일본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북한은 2년 뒤인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한국을 세트스코어 3-0(15-7 15-9 15-9)으로 누르고 동메달을 차지했다. 세계선수권대회와 올림픽에서 연속으로 3위를 기록한 북한의 주 공격수는 김증복인데 성별 논란이 일어나면서 29살 때인 1974년 테헤란 아시아경기대회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한국은 김증복이 빠진 북한을 세트스코어 3-0(15-6 15-5 15-9)으로 설욕하고 은메달을 차지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올림픽 동메달 멤버는 ‘더블 세터’인 유경화 유정혜를 비롯해 주 공격수인 ‘나는 작은 새’ 조혜정 그리고 이순복 정순옥 마금자 장혜숙 이순옥 박미금 변경자 백명선 윤영내 등 12명이다.

한국은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첫 메달을, 북한은 2018년 현재 올림픽 단체 구기 종목 사상 유일한 메달을 배구에서 땄다.

이에 앞서 한국은 1967년 세계선수권대회(일본)에서 3위를 했는데 이 대회에는 동서 냉전의 영향으로 소련 등 동유럽 나라들이 불찬한 가운데 일본 미국 한국 페루가 참가해 1~4위를 기록했다. 한국은 1967년 이전에 열린 4차례 세계선수권대회에 나서지 못했다.

한국 여자 배구는 1964년 도쿄 대회 때 북한이 보이콧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출전해 출전 6개국 가운데 꼴찌를 한데 이어 1968년 멕시코시티 대회에서는 5위, 1972년 뮌헨 대회에서는 4위를 한데 이어 4번째 도전에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뤘다. 그리고 2012년 런던 대회에서 40년 만에 올림픽 4강에 올랐으나 일본에 세트스코어 0-3으로 져 두 번째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한국은 올림픽 세계 예선서 일본을 3-1로 물리쳤기에 본선 패배가 매우 아쉬웠다.

오래전 일이긴 하지만 여자 배구가 올림픽 메달을 따기까지 과정에서 있었던 일화를 소개한다.

대한배구협회는 1976년 몬트리올 대회를 앞두고 1964년 도쿄 대회에서 일본 여자 배구를 올림픽 금메달로 이끈 다이마쓰 히로부미를 초빙해 김한수 감독, 전호관 코치와 함께 대표 팀을 지도하도록 했다.

‘동양의 마녀’라는 신화를 만든 다이마쓰는 ‘회전 리시브’ 등 혹독한 훈련의 대명사였다. 강훈련이 거듭되는 가운데 선수들 반발이 있었고 주 공격수인 박인실이 무단으로 퇴촌하는 일이 벌어졌다. 박인실은 당시로는 174cm의 큰 키에 뛰어난 점프력과 강타를 지닌 한국 여자 배구의 간판 공격수였다. 이 사건은 당시 상당한 파문과 논란을 일으켰고 협회는 박인실을 제명했다.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이 대회 준우승국인 소련과 접전을 펼친 끝에 1-3으로 졌다. 그러나 이후 쿠바와 동독을 풀세트 접전 끝에 각각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랐다. 한국은 조별 리그 A조 1위이자 대회 우승국인 일본에 0-3으로 졌으나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12-15 15-12 15-10 15-6) 역전승을 거두고 동메달을 거머쥐었다.

이에 앞서 1970년대 초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달러 문제로 해외 전지훈련은 꿈도 꾸지 못하던 1970년대 여자 배구 대표 팀은 태릉선수촌에서 나와 서울 신일고등학교에서 이따금 훈련했다. 이름하여 ‘촌외 훈련이었다.

그 무렵 남자 고교 배구의 강호 대신고가 주로 훈련 파트너가 됐다. 연습 경기는 대체로 10세트로 진행됐다. 살인적인 훈련량이었다. 게다가 세트를 내주면 곧바로 강한 체력 훈련이 뒤따랐다. 말이 좋아 체력 훈련이지 얼차려였다.

블로킹 훈련 때는 손가락에 오자미를 달고 점프했다. 블로킹의 기본은 손가락을 쫙 펴서 상대 공격수가 때린 공을 덮어씌우듯 하는 것이니까 무의식중에 손가락이 아래로 내려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훈련을 받고도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북한에 이어 4위에 그쳤다. 그 뒤 다시 4년이 지나서야 눈물로 범벅이 된 올림픽 메달을 손에 쥘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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