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UGOUT Interview] 김용수 감독

조회수 2018. 10. 8. 16:4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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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마구 '노송'

청명한 가을 하늘 아래 펼쳐진 신월 야구장. 서울시 스포츠 재능나눔 교실의 아홉 번째 종목인 야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야구에 미친 생활 체육 야구인들이 모여 그라운드를 채웠다. 열정만큼은 프로선수 못지않았지만 몸놀림이 어색했다. 그때 어디선가 우렁찬 파이팅 함성이 들렸다. 모자를 깊게 눌러 썼지만, 그가 ‘LG 트윈스의 전설’ 김용수 감독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온 것이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신월야구공원


호랑이 감독님의 관리 야구

김용수 감독은 <건강한 서울 만들기 프로젝트! “서울아 운동하자”>를 통해 다시 유니폼을 입었다. 그가 꿈꿨던 프로 무대는 아니지만, 야구를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한다는 자체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공백기가 길었기에 마음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에너지를 뿜어냈다.


첫 수업부터 “강하게 스파르타로 수업이 진행될 것이니 마음을 단단하게 먹으시라”고 겁을 줬다. 공 잡는 법부터 운동할 때 주의해야 할 점까지 세세하게 지도했다. 김용수 감독은 “볼이 경식구가 아니다 보니 (실전) 기분을 잘 못 내고 있다. 유소년팀과 리틀팀은 지금 쓰는 공이 낫지만 생활 체육 야구에서는 똑같은 공으로 기분을 맞춰야 한다. 하지만 안전사고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유소년 야구 수업 중 공이 중학교 1학년생의 광대를 강타했다. 다행히 연식구이었기에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김용수 감독은 다칠 위험을 줄이기 위해 집중력을 잃지 말라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다.


김용수 감독이 가장 애착을 가지고 지도하는 이들은 유소년 야구팀이다. 야구를 많이 접하지 않은 중학교 1~2학년 참가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 중에는 야구부원 이었다가 일찍 그만둔 청소년들도 포함돼있다. 초등부 과정을 밟던 중 일찍 다른 길을 찾았기 때문일까? 야구에 대한 미련이 많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번 감독직을 제안 받았을 때 즉시 ‘네’라고 답했던 이유도 유소년 야구 때문이었다. 현시대 중고교야구가 풀어야 할 숙제를 꼬집은 김용수 감독은 “야구는 국민스포츠로 자리 잡았다. 프로야구의 열기와 인기는 최고다. 반면 아마추어 야구의 인기는 예전보다 관심도가 낮다”고 운을 띄웠다.


김용수 감독은 이런 아이들을 볼 때가 가장 안타깝고 답답하다고 했다. “도와주고 싶다”고 운을 뗀 김용수 감독은 “야구를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들은 모든 시간을 야구에 투자하고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하루 1시간 30분 동안 수업이 진행되기에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없다. 이곳 참가자들은 에너지는 넘치지만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없어 한계가 있다”며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한숨이 깊어진 김용수 감독은 “유소년 야구가 잘 돼야 미래 발전형 과정을 밟을 수 있다. 내가 야구했을 땐 돈이 없어도 학교의 지원으로 꿈을 펼칠 수 있었다. 지금은 학부형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된다는 현실이 안타깝다”면서 재정적인 문제에 대해 “야구선수가 많으면 시에서 움직여야 한다. 야구장 건립 혹은 임대사업으로 경기장을 제공하면 얼마나 좋겠느냐. 개인의 부담을 줄인다면 훌륭한 선수를 배출하는 건 문제도 아니다”고 강조했다.


안타까운 실정도 문제지만, 선수들이 야구에 임하는 자세도 무시할 수 없다고 했다. 즉, 환경 탓만 하며 하소연만 하지 말라는 것이다. “지도자마다 방식이 다 다르다. 공을 자주 던지면서 기본기를 충실히 다지는 것이 중요하다. 말보다 행동이 따라줘야 과정이 만들어진다. 겉멋만 들어 누구를 따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이곳 아이들에게도 말 안 들으면 안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았다”고 말했다.


태극기를 사랑한 야구선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속담이 있다. 선수 시절 김용수 감독을 대변하는 것 같다.


김용수 감독은 중앙대학교를 졸업 후 실업야구팀 한일은행에 입단했다. 바로 프로구단과 계약할 수 있었지만, 단 한 가지 이유! 국가대표가 되고 싶어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당시에는 아마추어 선수만 국가대표로 뽑았다. 군대 때문이 아니라 내 가슴에 태극기를 달고 싶었다. 그땐 젊었으니까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실업팀에서도 계속 야구할 수 있으니까 걱정은 없었다.”


꿈은 현실이 됐다. 1983년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야구 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출됐다. 한국과 일본, 중화 타이베이가 참가했고, 공동우승으로 군대 면제 혜택까지 받았다. 거기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은 것이다. 김용수 감독은 “천운을 타고 태어난 기분이었다”며 껄껄 웃었다.


목표 달성 후 MBC 청룡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원래부터 남이 뭘 하든 신경 안 쓰고 자신의 운동에만 몰입하는 성격이기도 하지만, 게을러지는 것이 싫어 스스로 채찍질했다. 트레이너가 인정한 노력파였다.


힘든 것도 모르고 운동했다는 김용수 감독은 남들이 10번 뛰면 난 12, 13번을 더 뛰었다. 게으름이 세상에서 제일 싫다는 김용수 감독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며 “올바른 운동법이란 건 없다. 훈련할 때도 전력투구했듯이 내게 맞는 운동법이 맞는 것이다”고 설명했다.


혈기왕성한 20대 청년에게 유혹은 없었을까? 김용수 감독은 “당연히 있었다”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하지만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면 망가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생각을 잊지 않았다. 유니폼을 입는 것이 좋아 이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결과, 그는 오랫동안 스트라이프 유니폼을 입고 마운드에 올랐다.


“야구장 안과 밖의 생활이 달랐다. 일단 아침부터 끝날 때까지 야구만 죽어라 했다. 유니폼을 입는 시간이 끝나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했다. 산을 오르거나 하늘을 보며 여유를 찾으려 했던 것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스스로 쓴 전설의 마구

오랜 시간과 갖은 고충을 겪고 다시 돌아온 그라운드다. 그동안 여자 야구 대표팀과 생활 체육 야구 등을 통해 세월을 보냈지만, 이번 교육은 이전과 다른 마음가짐과 움직임으로 준비했다. 한마디 더 조언을 해주고 싶고 꼼꼼하게 봐주고 싶다고 했다. 기술은 물론 야구인 선배로서 전하고 싶은 야구인의 자세까지 말이다.


지금 당장이라도 프로 세계에 뛰어들어 지도하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나이와 연줄이라는 장벽에 부딪혔다. 후배 양성에만 집중하고 싶지만, 현실은 그의 뜻대로 풀리지 않았다.


1990년대 LG가 전성기를 누릴 때 김용수 감독은 ‘영웅’으로 불렸다. 마무리에서 선발로 변신했을 때도 변함없이 책임감 강한 모습을 보였다. 6회부터 등판해 7이닝을 소화했던 경기를 보고 있으면 그의 우직함이 드러난다. 1998년에는 당시 38세의 나이로 18승을 달성하며 ‘최고령 다승왕’을 차지했다. 또한 1999년 4월 15일에는 현대 유니콘스를 상대로 200세이브를 기록. KBO리그 최초로 ‘100승 200세이브’란 불멸의 대기록을 세웠다.


선발로 전향 후 탄탄대로를 걸었다. 하지만 시즌을 거듭할수록 슬라이더만으로는 상대 타자를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 어려움을 인지했을 때 뇌리에 스친 건 미즈다니 코치에게 배운 스플리터였다. 그땐 ‘굳이?’라며 의심했지만 세월이 코치의 깊은 뜻을 대신 설명했다. 손가락 관절을 벌리기 위해 스플리터 그립을 잡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살기 위한 발악이었다. 힘으로 던지는 버릇이 생기고 근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후에는 스플리터만큼 떨어지는 공을 연구했다. 그때부터는 악력으로 버텼다.


“투수에게 투심 패스트볼이 기본이지만, 당시에는 근력이 줄어 맞을 위험이 높았다. 순간적인 효과를 내는 변화구만 던질 수도 없었다. 어떻게 그립을 잡을지, 스플리터만큼 떨어지는 볼이 무엇인지 고민했다. 투심으로 잡고 손가락 끝에 힘을 모아 던졌다. 아프긴 했지만 아프다고 안 던질 수는 없지 않은가.”


주 무기로 장착시킨 투심형 스플리터는 성공적이었다. 청주에서 열린 한화와의 경기에서 김용수 감독은 경찰청 야구단의 유승안 감독을 상대로 공을 뿌렸다. 그때 배터리 호흡을 맞췄던 김동수 스카우트에게 유승안 감독이 “이게 무슨 볼이냐”라고 질문할 정도로 강력했다. 김동수 스카우트는 김용수 감독의 투구에 대해 1초의 망설임 없이 “마구요”라고 대답했다.


‘비교불가’ 투수의 정석

현재 메이저리그를 휩쓸고 있는 오승환은 한국 프로야구에서 활약할 당시 “내가 세이브하는 건 세이브가 아니다. 김용수 선배의 세이브가 진짜다”고 말했다. 9회 마운드에 올라가 1이닝을 책임지는 자신과 6회부터 소화하는 김용수 감독의 등판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2000시즌 종료 후 만 41세로 은퇴할 때까지 그를 찾는 마운드에는 무조건 올랐다. 팀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항상 본인의 자리에 머물렀던 김용수 감독은 준비된 자였다. 몸을 풀지 않고도 등판이 가능했던 그였기에 구단은 김용수 감독을 신뢰했다. 믿음의 야구를 직접 보여줬다.


꾸준한 모습을 보여준 김용수 감독은 ‘면도칼’, ‘제국의 파수꾼’이란 별명 외에 ‘노송’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국내 투수로서 500경기를 출전한 최초의 인물이자 최고령 다승왕, ‘100승-200세이브’를 세운 첫 번째 주인공! 통산 16시즌 613경기에 출전해 1831.3이닝 126승 1홀드 227세이브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했다. 말 그대로 그땐 ‘김용수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기록의 첫 장을 쓴 김용수 감독은 “기록을 넘어선다면 누구나 다 최초가 된다”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중요하게 생각한 건 기록보다 체력이었다. 철저한 몸 관리가 없었다면 지금의 김용수는 없었을 것이다. ‘게으름은 곧 죽음’이라고 생각했으니….


김용수 감독은 “조금만 아파도 안 던지려고 하는 모습이 보인다. 자기관리를 잘 하면 아플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살고 싶다면 집중하고 죽어라 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쐐기를 박았다.


지도자로서 갖춰야 할 덕목 ‘진심’

김용수 감독의 제자 사랑은 후배 사랑으로 이어진다. 지도자의 목숨보다 선수들이 좋은 플레이를 펼칠 수 있게 정성스레 대하는 것이 감독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감독은 선수단을 관리하는 매니저라고 말했다.


세월이 지나도, 그라운드를 벗어나도 변하지 않는 관심이 현역 선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지금도 이동현, 심수창 등 선수들이 컨디션 난조를 보이거나 고민이 생기면 그를 찾는다. 김용수 감독의 진심이 통한 것이다.


지금은 은퇴한 한희는 김용수 감독을 붙잡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린 적이 있다. 김용수 감독은 성적 스트레스로 본인 공을 던지지 못했던 한희를 다독였다. 투수는 자신감이 최우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질책보다 “잘하고 있다”며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줬다. “한희가 복받쳤는지 울더라”며 그때를 회상했다.


슬럼프를 겪고 있는 선수들을 보면 당장 달려가서 가르쳐주고 싶다는 김용수 감독이다. 기술이 아닌 마음가짐 말이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한다. 그만큼 감독과 선수 간에 거리가 없어야 한다. 던지는 건 똑같다. 내 방식대로 기술을 가르치려고 했다가 그 선수를 망치면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마음을 나누는 것이 먼저다. 감독이라고 자아도취에 빠지면 안 된다.”


즉시 전력으로 투입이 가능하지만, 프로구단으로의 복귀에 대해서는 조심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잠시 떠나있는 동안 세상이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부탁을 하고 싶진 않다고 강조했다.


어렵게 입을 뗀 김용수 감독은 “누구에게 손을 빌린 적도 없고 그러기도 싫다. 선수들의 앞길을 인도하는 자리인데, 내 목숨 유지하기 위해 지도를 뒷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소신을 밝혔다.


만약 프로 구단의 지도자로 나서게 된다면 1군보다 선수들을 양성하는 자리에 서고 싶다고 말했다. 선수들 뒤에서 묵묵히 지원해주는 역할을 맡고 싶기 때문이다.


***

인터뷰 내내 김용수 감독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후배들만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가슴을 울렸기 때문이다. 김용수 감독은 “이전에는 시간 때문에 그들과 함께 할 수 없었다. 지금은 그 시간이 더 없으니까 슬프다”고 말했다.


                    더그아웃 매거진 90호(10월호)

위 기사는 대단한미디어에서 발행하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8년 10월호(90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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