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올림픽 5회 출전 핸드볼 오영란 "우생순은 아픈 기억이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

2018. 10. 1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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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영란(1번)이 2008 베이징올림픽에서 헝가리를 꺾고 동메달 획득을 확정지은 뒤 눈물을 흘리며 팀 동료들과 기쁨을 나누고 있다. 오영란은 28년간 실업무대를 누비면서 여전히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1972년생 오영란(46·인천시청)은 28년째 실업무대에서 골문을 지키고 있는 여자핸드볼 선수다. 한번 나가기도 힘든 올림픽에 5번(1996·2000·2004·2008·2016년)이나 출전한 살아있는 전설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도 처음 태극마크를 단 순간을 잊지 못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입단했던 팀(대선주조)은 해체됐다. 1년을 쉬고 간 곳이 종근당이었다. 창단 멤버였다. 거기서 활약한 것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어느 날 자신의 이름 석자가 대표팀 명단에 포함됐다. 후보 선수로 뽑혔지만 감지덕지였다. 그는 “다른 선수들처럼 내 꿈도 국가대표가 되는 것이었다. 그 꿈이 이뤄졌다”며 “비록 후보 골키퍼로 선발됐지만,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세상 다 얻은 것 같았다”고 되돌아봤다.

하지만 후보생활은 쉽지 않았다. 대표선수만 되면 모든 게 술술 풀릴 것 같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경기를 뛰지 못했다. 벤치에 앉지도 못하고 스탠드에서 응원했다.

“가장 속상했던 건 10골 차 이상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도 뛰지 못했을 때다. 아무리 후보라도 뛸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그땐 많이 울었다. 하지만 동료들이 미안해 할까봐 우는 모습을 보일 수가 없었다. 경기에 뛰고 못 뛰고는 내 노력에 달렸다며 선배들이 등을 두들겨 줬던 기억이 난다.”

그는 한 경기라도 뛰고 싶어 죽을힘을 다해 훈련했다. 주전이던 선배들도 악착같았다. 그러니 경쟁은 치열했다. 그는 “한번 차지한 주전을 내놓지 않기 위해 스스로 더 강해져야 한다는 걸 그 때 깨달았다”고 했다. 그런 설움을 딛고 일어섰기에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지도 모른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한국 여자 핸드볼 대표팀 골키퍼로 출전했던 오영란(오른쪽 두 번째). 그는 자신의 다섯 번째 올림픽인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을 조별리그 탈락이라는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자신의 존재를 알린 대회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이다. 그는 덴마크와 결승에서 후반 종료와 동시에 허용한 7m 스로를 넘어지면서 막아냈다. 연장에서 지긴 했지만 그 선방으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 그는 “내 자신이 뿌듯했던 시절”이라며 아울러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귀국해서 어머니를 만났는데, 나더러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갔다고 하더라. 잘난 척 했다는 얘기다. 어머니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모양이다. 그 소리를 듣고 많이 울었다. 어머니는 부모니까 그런 지적을 해준다며 어깨 힘을 빼라고 거듭 말씀하시더라. 그때 겸손을 배웠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다. 영화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의 배경이 된 대회다. 덴마크와 결승전은 영화보다 더 극적이다. 19번의 동점, 연장에 재연장, 그리고 승부던지기. 결국 2-4로 졌지만 국민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한 은메달이었다. 하지만 오영란에게는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아픈 기억이다. 지고 난 뒤 라커룸에 가서 많이 울었다. 너무 힘들었다. 육체적으로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더 견디기 어려웠다. ‘내가 실수하지 않았다면…’, ‘내가 하나만 더 막았더라면…’ 하는 미안함이 컸다. 또 감독님에게는 죄책감도 들었다. 최후방을 지킨 내가 더 도와주지 못한 것이 지금도 미안하다.”

우리는 그 때를 떠올리며 금메달 같은 은메달이라고 한다. 또 최고의 감동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2등은 2등이다. 그 값어치는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요즘도 우생순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후배들은 반드시 정상에 올라 감동을 줬으면 한다”고 했다.

서울 올림픽공원 SK핸드볼경기장에서 ‘2016 리우올림픽’에 출전하는 여자핸드볼 대표팀 오영란의 모습. 스포츠동아DB
오영란은 2년 전 또 한 번 이슈의 중심에 섰다. 44세에 리우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았다. 오랜 은사인 임영철 감독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또 후배들을 돕고 싶었다. 그는 “처음에는 장난인 줄 알았다. 하지만 감독님은 진지했다. 그래서 믿고 따랐다”고 했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그에겐 올림픽 금메달이 없다. 그동안 은 2개와 동 1개를 목에 걸었다. 금을 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은퇴 얘기를 꺼내기 미안했다. 하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선 나이여서 언제까지 뛸지가 궁금했다.

“현재 소속팀 감독님이 나보다 한 살 어린 후배다. 그래도 깍듯이 대한다. 선수들 앞에서는 특히 조심한다. 은퇴도 그런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이다. 언제까지 뛴다기보다는 한 해 한 해 스스로 컨트롤하면서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뿐이다. 1년을 소화하면 또 다음 1년이 기다린다. 열정이 없어지면 모를까 열정이 남아있을 때까지는 계속 뛸 것이다.”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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