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김연아' 차준환이 만 17세에 이뤄낸 '기적들'

박영진 입력 2018. 12. 29. 11:42 수정 2018. 12. 29.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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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 남자피겨 최초로 '그랑프리 파이널' 동메달 따내

[오마이뉴스 박영진 기자]

'피겨 프린스', '한국 남자피겨 최초', '남자 김연아' 등 화려한 수식어는 이제는 만 17세 소년에게 익숙한 말이 됐다. 그는 은반 위에서 4회전 점프를 거침없이 해내고 자신만의 특색 있는 연기로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그러나 회장배 랭킹대회가 끝난 직후였던 지난 26일 직접 만난 이 소년은 교복 넥타이를 매는 것이 조금 어설프고 학교 얘기를 하면 수더분하게 웃는, 그저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 
 
피겨스케이팅 선수 차준환(17·휘문고)은 올 시즌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한국 남자피겨 역사를 바꿔놨다. 시즌 첫 대회에서 쇼트프로그램 90점대를 돌파하기 시작하더니, 두 차례 그랑프리 대회에서는 한국 남자피겨 최초로 동메달을 차지했다. 이어 12월 초 상위 6명이 출전할 수 있는 파이널에서는 또 한 번 동메달을 거머쥐며 개인 기록까지 경신했다.

시련 딛고 꽃 피워 날아오르다
 
 지난 26일 서울 태릉 빙상장 근처 카페에서 만난 차준환
ⓒ 박영진
   
차준환에게 2018년은 시니어로서 성공적인 첫 발을 뗀 한 해였다. 시작은 힘들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고관절을 비롯해 여러 부위에 부상을 입었고, 선발전을 3번이나 치르는 강행군을 해야 했다. 시니어로 올라오자마자 곧바로 올림픽 시즌이었기에 경험이 있는 다른 선수들에 비해 더욱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꿈에 그리던 평창에 서게 된 소년은 한국 남자피겨 사상 올림픽 최고 성적인 15위로 결실을 맺었다.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부상이 심했고, 굉장히 어린 나이에 시니어로 올라왔어요. 저는 시니어로 올라오고 난 후 뛴 국제대회가 그랑프리 대회 하나랑 올림픽이 전부였어요. 경험이 많이 부족했죠. 올림픽에 너무 힘들게 진출했기에, 경기하는 순간에는 즐기고 싶었던 마음이 컸어요.
 
올림픽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았어요. 한국에서 열린 올림픽이었고, 거기에 한국 선수로서 참가해 그곳에서 연기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영광이었어요. 경기장의 분위기, 팬분들을 비롯해 각국 관중들과 국민들의 응원이 상상 이상으로 좋았어요."
 
그렇게 힘든 시기를 보내고 나니 드디어 활짝 꽃을 피울 날이 왔다. 올 시즌 그랑프리 개막을 앞두고 출전했던 두 차례 챌린저 대회(어텀 클래식, 핀란디아 트로피)에서 모두 은메달을 획득한 그는 그랑프리에서는 동메달 두 개를 목에 걸며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6명의 출전자 가운데 가장 어렸음에도 무서운 저력을 보여준 소년은 또 하나의 동메달을 추가하며, 매 순간마다 한국 남자피겨의 역사를 바꿔놨다.
 
"올 시즌에 스스로 목표했던 것을 이룰 수 있어서 좋았어요. 본격적으로 시니어 선수로 뛰면서 시니어 대회를 많이 나갔는데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낸 게 좋았습니다. 물론 지금 부상이 있지만 매 대회 때마다 스스로 컨트롤을 잘 했던 게 다행이었어요.
 
파이널 진출 목표는 시즌 전에 세운 건데,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나니 거의 까먹고 열심히 연습만 했어요. 그랑프리 때도 목표에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고 순간순간에 집중했어요. 파이널 진출 소식을 들었을 때는 부츠와 부상 문제가 있었어요. 소식을 들은 건 정말 좋았는데 막상 걱정이 앞서더라고요."
 
색다른 로미오와 줄리엣, 고정관념을 깨다 
 
 차준환의 쇼트프로그램 연기 중 시계 안무 부분
ⓒ 박영진
  
올 시즌 차준환이 선택한 두 음악은 모두 색달랐다. 남자 선수에게는 낯선 신데렐라 음악을 배경으로 연기를 펼쳤고, 비극적인 사랑으로 잘 알려진 로미오와 줄리엣 테마곡은 테크노와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더해 이색적으로 편곡했다. 그야말로 기존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다. 시즌 개막 때까지 궁금증을 낳았던 두 프로그램은 이제 차준환의 대표작이 됐고, 본인의 이름과 줄리엣을 합쳐 만든 준리엣(Junliet)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차준환은 두 프로그램에 얽힌 비하인드를 공개했다.
 
"쇼트프로그램 음악은 안무가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것이었는데 사실 시계파트 때문에 골랐어요. 시계파트가 굉장히 독특한데 오서 코치님도 추천해주셨죠. 이 부분을 스케이팅을 하면서 잘 표현한다면 멋있겠지만 잘 못 그릴까봐 걱정도 됐었어요.
 
프리스케이팅 로미오와 줄리엣은 제가 선택했는데, 저 역시 당연히 고전적인 음악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독특했어요. 뭔가 평범하지 않은 느낌? 독특한 음악을 통해 평범하지 않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 했죠."
 
특히 차준환의 프리스케이팅 프로그램은 연기를 시작한 직후부터 끝나는 순간까지 정지된 상태 없이 쉴 새 없이 움직인다. 그야말로 '전력질주'라는 말이 딱 맞아 보인다. 이에 대해 그는 "체력적인 것은 연습밖에는 정말 답이 없다"며 웃었다. 이 프로그램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아픈 사랑을 나타내는 키포인트 안무도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있는지 묻자 난색을 표했다.
"어... 세 부분을 굉장히 좋아하는데 하나만 고르긴 정말 힘들어요. (웃음). 첫 번째는 스텝 연기가 시작되면서 약간 클럽 느낌(?)이 나는 느낌이 굉장히 좋고요. 두 번째는 마지막 점프를 뛰고 줄리엣이라고 작게 가사가 나오는 부분, 마지막은 독약을 먹는 안무 부분이에요. 많은 분들이 '준리엣'이라고 불러주시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만큼 제 음악을 정말 좋아해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감사해요."
 
 차준환의 프리스케이팅 연기 직후 모습
ⓒ 박영진
   
다른 배경의 음악에 풍성한 표현력을 더한 차준환의 프로그램은 매 시즌마다 조금씩 진화해 나가고 있었다. 과거 김연아의 안무를 오랜 기간 책임져 왔던 데이비드 윌슨이나 캐나다 아이스댄스의 전설 셰린 본 등 세계적인 톱 안무가들의 지도도 있었지만, 차준환 본인의 생각과 노력을 더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기술에 있어서도 차준환만의 유연성을 볼 수 있는 레이백 동작, 플라잉 카멜 스핀 중 유나 카멜스핀 등을 더해 남자 선수에게서는 보기 힘든 아름다운 선을 활용한 연기를 보여주는데, 이는 차준환 연기의 상징과도 같다.
 
"프로그램에 제 아이디어도 어느 정도 반영하지만, 전체적으로 큰 부분은 안무가 선생님과 많이 상의해요. 아직은 제가 성장해나가는 선수이고, 많은 발전이 더 필요하거든요. 음악을 고를 때 특별한 기준은 두지는 않아요.
 
이번 프리 프로그램을 함께 작업한 셰린 본은 전부터 꼭 맞춰보고 싶었던 분이라서 함께 해서 굉장히 영광이었어요. 윌슨 안무가와도 2-3년간 했는데, 아직 두 분 모두 함께 한 것이 오래되진 않았지만 윌슨은 무용, 발레쪽 면을 더 강조하고 셰린 본은 현대적인 느낌이 더 강한 것 같아요.
 
기술에서 레이백의 경우, 사실 작년에 손목골절이 있었는데, 원래 수행하던 헤어컷 동작을 부상 때문에 할 수가 없어서 불가피하게 넣은 것이고요. 유나스핀은 원래 제가 어릴 때부터 베리에이션 동작으로 항상 해오던 것이라 익숙한 기술이에요."
 
 지난 26일 서울 태릉 빙상장 근처 카페에서 만난 차준환
ⓒ 박영진
   
훈련의 키워드 '집중'과 '최선'
차준환은 중학교 1~2학년 시절 캐나다 토론토로 훈련지를 옮겼다. 꿈을 위해, 좋아하는 피겨스케이팅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먼 타국에서 지내는 것이 쉽지 않았을 터. 하지만 그는 "어려움은 있었지만 오로지 스케이트 훈련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이 말을 하는 차준환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차준환 선수 프로필
주요성적
  2018 국제빙상연맹 피겨 그랑프리 파이널 남자싱글 동메달
  2018 국제빙상연맹 피겨 그랑프리 3차 동메달
  2018 국제빙상연맹 피겨 그랑프리 2차 동메달
  2018 국제빙상연맹 피겨 챌린저 시리즈 핀란디아 트로피 은메달
  2018 국제빙상연맹 피겨 챌린저 시리즈 어텀 클래식 은메달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피겨 남자싱글 15위
  2017 국제빙상연맹 피겨 주니어 세계선수권 대회 5위
  2016 국제빙상연맹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파이널 3위
  2016 국제빙상연맹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일본, 독일 대회 1위 등 다수
 
국내에는 피겨 전용 링크장이 없어 밤 늦은 시간이나 새벽 시간에 추운 칼바람을 맞으며 훈련해야 한다. 반면 동계스포츠 강국인 캐나다는 선수가 훈련하기 적합한 환경이 마련돼 있다. 차준환은 일주일에 6번, 매일 8~9시간씩 링크 위에서 돌고 또 돈다. 평창에서 올림픽 2연패를 달성했던 하뉴 유즈루(일본)를 비롯해 스페인 피겨 영웅 하비에르 페르난데스 등이 모두 크리켓에서 훈련을 함께 했다. 숨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링크장은 어느새 땀과 열정으로 가득 찬다.
 
"캐나다의 훈련 환경과 분위기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오로지 훈련에만 집중할 수 있거든요.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경까지 스케이트 훈련을 진행하고요. 오후에는 지상훈련을 2~3시간 씩 병행해요. 이 스케줄로 일주일에 6번씩 훈련해요. 일요일에는 영어공부를 2~3시간씩 하고 추가로 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지상훈련을 하고 있어요.
 
제가 있는 클럽에는 기술 코치, 스케이팅 스킬 코치, 스핀 코치 등 세 선생님이 계세요. 스킬의 경우 기술 연습에 비해 비중이 적긴 하지만, 연습하기 전이나 매일 1시간 정도씩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경기 때는 점프 못지않게 비점프도 정말 중요하거든요. 세계적인 선수들과 함께 항상 각자 열심히 훈련을 하는데, 훈련 분위기도 좋고, 서로가 자신에게 집중을 해요. 서로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을 수 있어요."
 
아직 만 17세의 어린 소년에게 최초라는 수식어가 이미 습관처럼 따라붙고 있다. 어쩌면 앞으로 더 많은 수식어가 이 소년에게는 꼬리표처럼 따라 붙을지도 모른다. 한국 남자피겨 선수들이 그랑프리에 출전하는 일 자체가 드물었고, 그 역시 항상 현장에서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기에 어쩌면 차준환에게 가장 힘든 일은 '외로움', '고독'과 싸우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대회든 쉬운 대회는 없었어요. 제가 만 16세에 시니어로 올라와 아직 시니어 경험이 적고, 이 나이에 같은 또래 선수들도 얼마 없거든요. 항상 저보다 훨씬 경험이 많은 선수들과 경기를 했고, 혼자 해결하고 출전하는 것에 크게 연연하지는 않았어요.
한국 피겨를 이끌고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 부담감이 없진 않지만, 경기 때는 노력한 만큼 최선을 다하려고만 해요. 최초라는 수식어도 부담은 있지만 오히려 영광스럽고 감사해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좀 더 열심히 하자고 마음을 가다듬어요.
 
저는 경기 중에 실수가 나오면 항상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사실 첫 점프에서 실수가 나오면 정말 당황스럽지만 아직 경기가 많이 남았거든요. 파이널 프리 경기가 끝나고 머리를 잠깐 잡았는데 사실 스케이트 캐나다(그랑프리 2차) 때도 똑같이 첫 점프 실수를 했던 터라... 똑같은 실수가 나와서 아쉬웠어요."
 
 지난 26일 서울 태릉 빙상장에서 근처 카페에서 만난 차준환
ⓒ 박영진
   
이날 차준환은 학교 일정으로 인해 자신이 다니고 있는 휘문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인터뷰에 응했다. 학교에서 축하 인사를 많이 받았는지, 평범하게 공부하는 학생들이 부럽진 않은지 묻자 그는 "남고라서 애들이 잘 모른다. 공부도 쉬운 게 아닌데 친구들이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그런데 어떤 애들은 제가 공부는 안 해도 되고 운동만 해도 되는 줄 안다"며 웃었다.
 
짧은 인터뷰에서 만날 수 있었던 차준환의 모습은 진지함과 해맑음이었다. 그가 매 대회에서 놀라운 성적을 낸 것은 한국 피겨와 스포츠에 큰 경사였고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기쁜 건 그가 지독한 훈련 과정을 거치면서도 과거 광고와 아역배우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보여줬던 깨끗하고 맑은 모습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그가 강조하는 '차근차근' 성장의 길일 테니까. 인터뷰를 마치고 곧장 새 부츠에 적응할 겸 스케이트 훈련을 위해 태릉 빙상장으로 향한 소년의 얼굴에는 '한두 달마다 바꾸는 부츠가 잘 맞아야 할 텐데'라는 걱정과 함께 미소가 가득했다.
 
"항상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훗날 어떤 선수로 기억되길 바라는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앞으로 꾸준히 열심히 노력해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큰 선수 중 한명이 되는 게 목표예요. 또 은퇴 후에도 제 이름이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번 시즌에 많은 시합을 치르고 있는데 응원 감사하고, 남은 시즌도 더 열심히 하고 부상 관리 잘해서 더 좋은 모습 보여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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