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들 등반하듯 다시 도전해야죠"

최희진 기자 입력 2019. 4. 22. 20:5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여자배구 통합챔프,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의 새 다짐

프로스포츠 사상 여성감독 최초로 통합우승을 이룬 프로배구 여자부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이 최근 서울 정동길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뒤 잠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상훈 선임기자

2014년 여자배구 흥국생명 지휘봉을 잡았을 때 박미희 감독(56)은 ‘꽃길’이 펼쳐지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감독직은 팀 성적과 여론에 따라 출렁거리는 위태로운 자리다. “2년 버티면 잘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려는 기우가 됐다. 박 감독은 2016~2017 시즌 프로스포츠 여성 감독 최초로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2018~2019 시즌에는 통합우승을 달성한 최초의 프로스포츠 여성 감독이 됐다. 2017~2018 시즌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지만 한 시즌 만에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다.

최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박 감독은 “지난 시즌 꼴등을 했으니 ‘꼴꼴등은 없겠지’라는 낙관적인 마음가짐으로 이번 시즌을 준비했다”며 “비시즌 훈련 과정에서 선수들을 보니 움직임이나 분위기가 그 전과는 달랐다. ‘플레이오프는 올라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고 돌아봤다.

이번 시즌 흥국생명의 강점 중 하나는 회복력이었다. 연승은 있어도 연패가 없었다. 세트 스코어 0-3으로 패하면 다음 경기에서 3-0 완승을 거두며 일어섰다. 우승에 대한 강한 예감이 찾아온 것은 5라운드 마지막 경기였던 장충 GS칼텍스전에서 승리했을 때였다. 박 감독은 “그날은 선수들이 연습할 때부터 코트가 꽉 찬 느낌이 들었다. ‘될 것도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연패를 안 하고 있는지도 의식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회복력은 챔프전에서도 발휘됐다. 1차전을 이긴 흥국생명은 2차전에서 한국도로공사에 0-3 패배를 당했다. 언론에선 흐름이 도로공사로 넘어갔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지만 박 감독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3차전에서 신인 이주아를 라인업에서 제외하고 베테랑 김나희를 투입했다. 노림수는 적중했고, 흥국생명은 승기를 되찾아왔다.

이 과정에서 여자배구 차세대 간판스타 이재영의 성장을 확인한 것도 수확이었다. 이재영은 데뷔 이래 최고의 기량을 펼치며 정규리그·챔프전 통합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박 감독은 “지난 시즌 팀도 어려웠지만 재영이도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올해 이렇게 기복 없이 잘하지 못했을 것”이라며 “재영이가 더 발전하려면 배구에 대한 열정과 흥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2년만 잘 버텨보자’며 시작했는데 주변 우려 불식시키고 ‘극적 반전’ 역할 모델 없다는 게 가장 힘들어

시작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박 감독은 “여성 감독이 온다고 하니까 선수들끼리 ‘우린 죽었다’ ‘감독이 일일이 간섭할 거야’ 같은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하더라”며 “나도 처음엔 선수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챙겨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러다 두 번째 시즌 선수단 워크숍에서 한 선수가 익명으로 ‘사사건건 터치하지 마세요’라고 적어낸 글을 보고 크게 깨달았다. 박 감독은 “선수들도 직업인이고 성인인데, 내가 안 해도 될 일을 하고 있었다”면서 “시행착오였다. 지금은 잔소리 잘 안 한다”며 웃었다.

여성 역할모델이 드문 시대를 살아오면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박 감독은 “여성·남성 얘기가 나오면 남자 감독님들은 ‘우리가 뭘 어쨌다고’라고 하시는데 그분들이 뭘 잘못한 건 아니다”라며 웃은 뒤 “남자 감독님들은 친목을 다지면서 서로 선수 트레이드도 하고, 아무래도 이로운 점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감독을 하면서 힘들 때마다 선수 시절 코치 선생님들이나 여자 선배들에게 주로 고민을 털어놨다”며 “역할모델이 없다는 게 가장 힘든 부분”이라고 덧붙였다.

내가 떠나면 후배들 또 그 길 올라 후회 남지 않도록 통합 2연패 노력

박 감독은 이제 새 시즌을 향해 신발끈을 고쳐 매고 있다. 그는 “산악인들이 히말라야가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고 또 가지 않나. 지금 나도 그런 마음인 것 같다”며 “산악인들이 산을 오르듯 그렇게 또 가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내가 현장을 떠나면 후배들이 또 그 길을 오르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내년이면 감독 계약이 만료되기 때문에 다음 시즌은 더욱더 후회 없이 치러야 한다는 마음이다. 박 감독은 “흥국생명에 왔을 때 2년 버티면 잘 버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현장을 떠날 때 내 마음이 서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나간 일에 심취해 있기보다 통합 2연패를 향해 계속 노력하고 싶다”고 말했다.

■ 박미희 감독 프로필

●1963년 전남 해남 출생 ●광주여상·한양대 졸업 ●1983년 미도파 배구단 입단/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대표팀/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대표팀/ 1988년 서울 올림픽 대표팀/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대표팀/ 1991년 선수 은퇴/ 2003~2005년 중국 옌볜과학기술대 체육학 부교수/ 2006~2014년 KBS N 해설위원/ 2014년 5월 흥국생명 감독 취임』

최희진 기자 daisy@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