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가 끝난 뒤, 어린 아이들은 '죄인처럼' 서 있었다 [현장스케치]

스포츠한국 김명석 기자 2019. 4. 24. 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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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마다 열리는 초등리그 현장 가보니
'고압적 자세' 감독 앞 아이들 고개 '푹'
벤치에선 "드리블 왜 하느냐" 불호령도
"아이들 위한 축구..감독 생각 고쳐야"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 홀로 서서 지도를 받는 아이는, 그저 부동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김명석 기자

[스포츠한국 인천=김명석 기자] “아이, 진짜!”

초등리그가 한창인 인천의 한 축구장. 많아야 열 세 살인 아이들이 갈고 닦은 기량을 겨루던 가운데, 돌연 짜증이 잔뜩 섞인 외침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벤치에서 선수들을 지켜보고 있던 한 코칭스태프의 불호령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에는 아이들이 고개를 숙인 채 둥그렇게 모였다. 아이들에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네는 코칭스태프들의 자세는 누가 보더라도 고압적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겐 그 분위기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두려움을 느낄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다.

그저 축구를 즐기고 싶었을 아이들은, 경기가 끝난 뒤엔 마치 ‘죄인’이라도 된 듯 한 모습이었다. 더 씁쓸했던 건, 비단 한 두 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하프타임과 경기 후, 아이들은 저마다 뒷짐을 진 채 고개를 숙이고 감독의 말을 들었다. 감독들의 자세는 대부분 고압적이었다. 사진=김명석 기자

눈물을 쏟던 아이조차도, 위로 대신 ‘물병 삿대질’

일주일을 기다려온 시합 날. 경기를 준비하는 팀들의 분위기는 그래서 늘 설렘이 느껴진다. 빨리 뛰고 싶은 마음이 표정 등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초등리그를 누비는 아이들은 그만큼 어리기만 한 선수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분위기는 대부분 경기 시작 전에만 유효하다. 경기 중 실수를 했다거나, 실점을 내준 채 뒤지고 있는 하프타임, 그리고 팀이 패배라도 한 경우 아이들은 코칭스태프 앞에 그야말로 ‘죄인’이 된다.

패배가 분해 눈물을 흘린다거나,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는 차원이 아니다. 선수들은 대부분 뒷집을 진 채 감독을 중심으로 둥글게 모이는데, 고개를 푹 숙인 선수들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아이들 앞에 선 감독과 코치들의 자세는 결코 어린 아이들을 대하는 분위기가 아니다.

주머니에 손을 꽂거나 팔짱을 낀 채 험악한 표정을 짓는 건 일쑤였다. 고개를 숙인 채 뒷짐을 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자세와 맞물리면 눈살이 찌푸려지는 분위기다. 물통으로 선수들을 신경질적으로 가리키거나, 주장 완장을 억지로 빼앗는 등의 모습도 눈에 띄었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는 감독도 있었다. 다른 선수들이 앉아서 짐을 챙기는 사이, 해당 감독은 몇몇 선수들만 불러 일으켜 세운 뒤 개인지도에 나섰다. 개인지도라는 이름 아래 사실상 공개적으로 ‘혼’이 나는 상황. 친구들과 가족들 앞에서 홀로 서 있는 아이는 그저 부동자세로 고개를 숙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또 다른 팀의 주장은 경기를 마친 직후 눈물을 쏟았다. 그러나 그 아이는 위로를 받지 못했다. 코칭스태프는 한참을 선수들에게 이야기했다. 몇몇 선수들을 물병으로 가리키며 신경질적인 반응도 보였다. 우는 선수를 위로해주는 건 옆에 서 있던 친구뿐이었다.

새로 도입된 규정에 따라 각 팀들은 전·후반 각 2분씩 경기를 중단한 뒤 코칭타임을 갖는다. 그 외의 시간은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뛸 수 있도록 코칭스태프의 지시가 금지되어 있다(사진 속 인물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사진=김명석 기자

시종일관 이어지는 벤치의 지시, 있으나마나 한 규정

경기가 끝난 뒤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경기 내내 아이들은 벤치에 앉은 코칭스태프로부터 끊임없이 지시를 받거나, 혼이 나야 했다. 11대11에서 8대8로 경기장을 누비는 선수들이 더 줄었을 뿐, 초등리그를 누비는 선수들은 여전히 생각하는 축구를 하기 어려워보였다.

올해 초등리그는 8인제가 도입됐다. 팀 전술보다, 더 자주 공을 만지면서 성장해야 할 시기라는 판단에서다. 미하엘 뮐러 대한축구협회 기술발전위원장도 “초등부 선수들은 팀 전술을 통한 완벽한 경기 운영이 중요치 않다. 개인기술 등 선수 개인의 발전을 단계적으로 습득하고 배워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새 규정이 더해졌다. 선수들이 여러 상황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코칭스태프의 무분별한 경기 중 지시를 금지하는 것이었다. 지도자들은 경기 시작 전, 선수 교체 시, 하프타임, 그리고 전·후반 각 2분씩 경기가 중단된 뒤 진행되는 코칭타임에만 지시가 가능하다.

그러나 현장에서 지켜본 풍경은 규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기 내내 세세하게 선수들을 컨트롤하고, 오직 ‘이기려는데’ 급급한 감독들이 대다수였다. 패스를 누구에게 줄 것인지부터 오버래핑을 나서는 타이밍 등 감독들의 지시는 매우 세부적이었다. “왜 쓸데없이 드리블을 하느냐” 등 경기 중 선수를 나무라는 목소리도 빼놓을 수 없었다.

이날 느낀 현장 분위기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축구를 즐기거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환경과는 거리가 상당히 멀었다.

아이들이 축구를 정말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지는 어른들이 고민해볼 문제다 (사진 속 인물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대한축구협회

“누구를, 무엇을 위한 축구인가요”

한 팀 선수들은 목소리가 크지 않은 것에 대한 감독의 지적이 있었는지, 뒷짐을 진 채 “예!굡遮?대답을 수차례 반복해야 했다. 군대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나 문화를, 많아야 열 세 살인 아이들이 경험하고 있었던 셈이다.

현장에 있던 한 선수 아버지는 “감독한테 혼이라도 나면 아이가 종일 시무룩해있다. 그런데도 축구가 좋으니까 계속 하고 싶어한다. 가슴이 아프다”면서 “이제 겨우 5, 6년이다. 프로도 아니고 이기고 지는 게 무엇이 중요한지 사실 잘 모르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또 다른 아버지도 “보는 눈이 없을 때 분위기가 좋을지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라면서 “아무리 팀 스포츠라지만 지금 나이에 포백이고 스리백이고 전술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대축(대한축구협회)에서 규정도 바꾼 것 같은데, 변한 건 없다고 본다”고 일침을 가했다.

한 유소년 지도자는 “예전에는 경기 중 감독들이 욕설도 하지 않았나. 그래도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서도 “경기 끝나고 죄인처럼 서 있는 건 아직도 안 변했다. 경기 끝나면 다들 뒷짐을 지고 딱 서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선생님(감독)들이 얼마나 고쳐질지, 얼마나 변화할 지는 잘 모르겠다”며 “그래도 결국은 아이들을 위해서 하는 것 아닌가. 지도자들도 생각을 좀 그렇게 가졌으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험악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몇몇 감독과 팀들도 있었다는 점. 경기 중 쓰러진 선수를 향해 괜찮은지 묻거나, 하프타임이나 경기 후 선수들을 우선 앉힌 뒤 이야기를 건네는 감독들도 있었다.

이처럼 지극히 당연한 행동들이 그나마 다행처럼 보이는 것. 현장에서 직접 느낀 유소년축구의 현주소였다.

스포츠한국 김명석 기자 holic@sportshankoo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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