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박미희 감독의 강스파이크 "곧 '여성' 빠진 평가 이뤄질 것"

입력 2019. 4. 24. 19:46 수정 2019. 4. 24. 19:5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듣는 사람
프로스포츠 전 종목 최초 여성 우승 감독
선수 시절 부상으로 은퇴할 뻔
한국 최초 여성 스포츠해설위원이기도 한 그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 달라진 거 느껴"
박미희 감독. 박미향 기자

지난 17일, 마을버스가 한겨레신문사 앞에 도착할 무렵 차창 밖으로 박미희(56)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 감독이 보였다. 약속 시각보다 30분이나 이른 오전 8시30분이었다. 덕분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의 그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프로스포츠 여성 최초의 통합 우승 감독’이라는 타이틀로 언론 인터뷰가 줄을 잇고, 같은 인천 연고의 프로야구 에스케이(SK) 와이번스는 우승의 기를 받겠다며 박 감독을 시구자로 초청하는 등 행사도 많은 그였다. <한겨레>와 인터뷰 전날엔 중·고배구대회를 참관하느라 강원도 태백에서 밤늦게 올라와 피곤할 법도 했지만, 그의 얼굴엔 생기가 넘쳤다.

- 전 종목 통틀어 여성 최초의 통합 우승 감독이다.

“사실 별로 의식 안 했다. 그런 타이틀보다 그저 우승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끝나고 나니 주위에서 ‘여성 최초의 통합우승 감독’에 무게를 두는 것을 보고서야 실감 났다.”

- 내가 잘해야 여성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줄 수 있다는 책임감도 컸을 텐데.

“여성 감독으로 책임감이 ‘100’이었다면 우승하고 나니 ‘50’으로 줄어든 것 같다. 내가 어느 정도 결과물이 있어야지 하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내가 뭐라고 내가 다 할 수는 없지 않나. 이젠 좀 자유로워졌다.”

- 이번 통합 우승으로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진 것 같다.

“여자배구 아이비케이(IBK)기업은행 감독 선임할 때도 여성 후보가 많이 거론됐다고 들었다. 여성 지도자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음을 느낀다.”

- 여자프로농구 신생팀 비엔케이(BNK) 캐피탈은 감독과 코치 모두 여성을 선임했다.

“주위에서 ‘(비엔케이 캐피탈 신임) 유영주 감독이 박 감독한테 연봉 나눠줘야 한다’고 농담도 하더라. 여성 감독 선임은 좋은 현상이다. 핸드볼 임오경 감독과 축구 이미연 감독, 하키 임계숙 감독도 지도자로서 훌륭하고 대단한 분들이다.”

프로스포츠 중에 여성 감독은 여자배구의 경우 2010년 조혜정(66·GS칼텍스) 감독이 1호이고, 2014년 박미희 감독이 2호, 그리고 2017년 이도희(51·현대건설) 감독이 3호다. 여자농구는 이옥자(67·KDB생명) 감독이 1호이고 유영주 감독이 2호다.

박미희 감독. 박미향 기자

- 스포츠는 오랫동안 남성 문화가 주류였다. 여성 감독으로 어려움은 없었나?

“그들이 하던 일을 이제 우리가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 의미가 있다. 자신들의 영역을 조금씩 침범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여성이 뭘 하면 잘하든 못하든 눈에 띈다. 하지만 곧 그런 시선은 없어질 것이다. ‘여성’이 빠진 평가가 이뤄질 것이다.”

- 감독으로 팀을 잘 이끌었다. 선수들끼리 갈등이 생기면 어떻게 해결하나?

“일단 상황 파악을 먼저 한다. 그런 다음 얘기를 오랫동안 들어준다. ‘이 사람이 내 마음을 이해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야 이야기가 풀린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프로선수로 활동하는 이가 많다. 부모님과 같이 있는 시간도 적다. 사춘기 문제도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외톨이라는 생각이 들면 운동도 그만두고 싶어진다. 이성 문제도 마찬가지다. 야단칠 게 아니라 얘기를 많이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 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위기는 없었나

“많았다. 선수 구성 등 내 생각대로 안 됐을 때 힘들었다. 하지만 감동한 적도 많다. 2017년과 2018년 스승의 날엔 울컥했다. 전날 선수들이 밤새 체육관에 풍선 달고 꾸몄더라.”

박미희 감독. 박미향 기자

- 배구를 시작한 계기는?

“(고향 전남 해남에서)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구를 했다. 선생님이 배구를 좀 하셨던 분인데 내게 재능이 있다고 배구를 권해 중·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녔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부모님과 떨어져 살고 있다.(웃음)”

- 현역 시절 영리한 플레이로 ‘코트의 여우’라는 별명이 붙었다.

“기분 좋은 별명이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이 없어 힘을 좀 덜 쓰려고 꾀를 부렸다. 키(174㎝)가 별로 크지 않았는데도 포지션은 센터였다. 지금은 리베로(전문 수비수) 정도의 키다.”

- 요즘 여자배구 인기가 대단한데, 사실 박 감독의 선수 시절 배구 인기도 엄청나지 않았나?

“당시엔 놀거리, 볼거리가 적었기 때문에 그때와 지금을 같은 잣대로 재긴 어렵다. 사실 그때와 지금은 관중 수 단위가 다르다. 지금은 관중이 3천명, 4천명 들어와도 많다고 하는데 당시엔 1만명 단위였다.”

3월27일 경북 김천실내체육관에서 열린 여자프로배구 챔피언결정전에서 통합우승을 차지한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이 톰시아를 안아주고 있다. 연합뉴스

- 선수 시절 위기는 없었나

“1985년엔 고관절이 탈골되고, 1987년엔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됐다. 휠체어 타고 다닐 정도였다. 병원에선 출산도 힘들고 선수 생활도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팬들에게 잊히는 게 싫었고, 자존심도 상했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다시 해 보고 싶었다. 악착같이 재활했다. 1시간 버스 타고 태릉선수촌에 갔다. 지금은 팀에 트레이너도 있지만, 그때는 선수 혼자 해야 했다.”

그는 1년 만에 기적적으로 재활에 성공해 다시 코트에 섰다. 선수 시절 국가대표 에이스로 활약하며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큰 활약을 펼쳤다. 특히 국내 여자 실업배구 미도파 소속으로 현대와 벌인 라이벌전은 압권이었다. 1981년 제25회 종합선수권대회 두 팀의 결승전은 무려 2시간55분간의 대접전이 펼쳐졌고, 신예 박미희 선수가 활약한 미도파가 현대에 3-1(12-15/16-14/17-15/15-9)로 역전승했다. 1984년 제1회 대통령배 결승전은 에이스로 성장한 박미희 선수의 미도파가 현대에 세트스코어 3-2(7-15/11-5 15-5/15-11/15-10)로 역전승을 거두고 원년 챔피언에 올랐다.

“보기보다 독하다”는 그에겐 ‘최초’가 하나 더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스포츠해설위원. 2007년부터 <케이비에스(KBS) 엔(N) 스포츠>에서 8년간 해설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선수 생활 경험을 녹인 맛깔스러운 해설로 시청자의 귀를 사로잡았다.

박미희 감독. 박미향 기자

- 이번 시즌에선 언제쯤 우승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나?

“4라운드까지 1승 3패로 밀리던 지에스칼텍스를 5라운드 마지막 경기(2월13일)와 6라운드 첫 경기(2월23일)에서 연거푸 만났는데 내리 3 대 0으로 이겼다. 5라운드 경기에서 1세트를 28 대 26으로 따낸 게 컸다. 여기서 탄력을 받아 다음 상대였던 기업은행(2월27일)마저 이기고 3연승을 달렸다. 혼자서 ‘올해 잘하면 우승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 좋은 꿈을 꿨다던가, 좋은 징조는 없었나?

“시즌 개막 전에 외국인 선수 톰시아가 산책하다가 가족처럼 지내는 애완견을 잃어버려 상심이 컸다. 그런데 이 개가 이틀 만에 기적처럼 돌아왔다. 기분 좋은 징조라고 생각했다.”

- 현역 시절 선수와 지금 감독 중에 어떤 게 더 힘든가?

“선수할 때는 그때가 힘든 줄 알았는데 감독이 더 힘들다. 선수 시절엔 내 것만 잘하면 됐는데, 감독은 팀 전체를 운영해야 한다. 각자 생각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른 모든 선수와 스태프를 한마음으로 하모니를 이루게 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도파 시절에 활동하던 이창호 감독님과 국가대표팀을 지도했던 김형실 감독님께 ‘어떻게 감독하셨어요?’라고 여쭈니 답은 안 하시고 그냥 웃으시더라.”

- 경기가 아슬아슬 접전을 펼칠 때 어떤 심정인가?

“잠시 현기증 일어날 때도 있다. 그러나 스트레스는 경기 지고 다음 경기 준비할 때 받는다.”

- 스트레스는 어떻게 푸나?

“술은 안 좋아한다. 지인을 만나 브런치 카페나 퓨전 식당 등에 가서 수다를 떨거나 사우나 등을 한다.”

경기가 없는 날엔 주로 동네 도서관을 간다는 박 감독. 그가 주로 뽑아 보는 책은 여행 책이라고 한다. “서아프리카 빼고는 전 세계를 다 다녔다. 지금도 고등학교 때 처음 갔던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멜버른의 풍경이 훤하게 기억이 난다.”

2월1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018-2019 도드람 브이(V)리그' 서울 지에스(GS) 칼텍스과 인천 흥국생명의 경기가 열렸다. 흥국생명 박미희 감독이 승리를 거둔 뒤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 26살, 선수 생활하면서 한양대 체육학과(89학번)에 입학했다.

“배구를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가르치는 일을 하고 싶었다. 아버지의 격려가 컸다. 하지만 안 하고 싶다고 (인생이) 그렇게 되는 게 아니더라.”

-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체육학과 부교수도 했다.

“남편이 직장 연수를 그 지역에 가면서 같이 갔다. 1년간 어학연수도 했는데, 마침 그 대학에서 체육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서 하게 됐다.”

박미희 감독. 박미향 기자

- 일과 가정을 병행하면서 어려운 점은?

“감독 1년 차 때는 경기도 용인 숙소에서 서울 보문동 집까지 출퇴근했다. 그러나 육체적으로 힘들어 그 후엔 숙소 생활했다. 감독으로 받는 스트레스 해소하기도 벅찬데, 가족들 지지가 없으면 어렵다. 여성으로서 어쩔 수 없는 것은, 남자들은 집 밖에서 힘이 들면 가사 노동에서 조금은 멀어질 수 있는데, 여자들은 집에 가면 집안 일이 눈에 보이는 게 문제다.”

- 가족이 큰 힘이 될 때는 언제인가?

“아들은 ‘엄마 괜찮아’하고 격려해 주고, 딸은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준다. 우승할 때 남편이 있었는데 ‘수고했다’는 말에 눈물이 났다.”

1990년 결혼한 박 감독의 남편 김호일(60)씨는 부산일보의 영화 기자 출신으로 은퇴한 언론인이다. 김씨는 <한겨레>와 통화에서 “(박 감독이) 유명한 배구 선수인 줄 모르고 만났다”며 “연애할 때 (교제 사실을 취재하려는) 기자들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나중엔 그 기자들과도 다 친해졌다”며 껄껄 웃었다.

박 감독은 “졌을 때 아픔은 길게 가는데 이겼을 때 기쁨은 잠시뿐”이라며 웃음 지었다. 그의 눈은 이미 다음 시즌을 바라보고 있었다.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박미희 감독 프로필

1963년 전남 해남.

광주여상·한양대 졸업.

1982년 미도파 배구단 입단.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국가대표.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1988년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 국가대표.

1990년 김호일씨와 결혼. 아들 윤찬(28), 딸 윤지(26) 둠.

2003~2005년 중국 연변과학기술대 체육학 부교수.

2007~2014년 해설위원.

2014년 5월 흥국생명 감독 취임.

2016~2017시즌 정규리그 우승.

2018~2019시즌 통합우승.

글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네이버 메인에서 한겨레 받아보기]
[▶한겨레 정기구독][▶영상 그 이상 ‘영상+’]

[ⓒ한겨레신문 :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한겨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