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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스플 축구] 유상철 "바르사, 토트넘 제안 왔을 때 갔어야 했다"

이근승 기자 입력 2019.05.14. 08:56 수정 2019.05.15.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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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달리 왜소했던 유상철, 체격 때문에 축구 그만둘 뻔했다
-유상철 “차범근 감독님을 처음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도전한 J리그···“선진 축구 환경, 아주 부러웠죠” 
-“바르셀로나, 토트넘 등 유럽 제안이 왔을 때 나가지 못한 게 선수 시절 유일한 아쉬움”
-우울증까지 겪었던 지도자 생활···“‘쟤 실패한 감독 아니야?’란 낙인이 두렵다”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전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엠스플뉴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전남 드래곤즈 유상철 전 감독은 한국 축구 역사상 최고의 ‘멀티 플레이어’로 평가받는다. 
 
유 감독은 왼쪽 측면 공격수로 축구를 시작해 중앙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중앙 수비수, 왼쪽 풀백 등 다양한 포지션을 거치며 성장했다. 특출 난 재능이 없어서가 아니라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완벽하게 소화한 까닭이다. 
 
1994년 차범근 전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있던 울산 현대에서 프로에 데뷔한 유 감독은 K리그 역사상 두 번째(최초는 김주성)로 수비수, 미드필더, 공격수 부문 베스트 11에 선정된 선수다.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도 포지션을 가리지 않고 맹활약했다. 중앙 미드필더로 주로 활약했지만, 수비수와 공격수로 뛴 경기도 많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 이탈리아전은 유 감독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경기였다. 중앙 미드필더로 뛰다 수비수로 변신해 한국의 8강 진출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1994년 3월 미국과의 친선경기에서 데뷔해 124경기를 뛰며 18골을 터뜨린 유 감독은 차범근(136경기 58골), 홍명보(136경기 10골), 이운재(133경기 115실점), 이영표(127경기 5골)에 이어 A매치 최다출전 5위에 이름이 올라있다. 
 
하지만, 유니폼을 벗고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유 감독의 축구 인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우울증에 빠져 5개월간 집 밖을 나서지 못한 아픔의 시간도 있었다. 유 감독은 선수와 지도자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느꼈다며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우울증에 빠진 시간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왜소했던 유상철, 체격 때문에 축구 그만둘 뻔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 주역 유상철 감독(사진 왼쪽)(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최근 MBC 예능 ‘궁민남편’에 출연했습니다. 
 
방송 보고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세요? 하하. 촬영 끝나고부터 ‘아, 내가 저런 걸 왜 했지’ ‘왜 쓸데없는 연기를 했지’ 싶었습니다. 집에서 혼자 이불 킥하고 난리가 났습니다(웃음). 다행히 많은 분이 그런 모습을 ‘재밌다’고 해주셨지만, 그래도 부끄럽습니다.
 
유상철 감독께선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으로 카리스마 있는 이미지입니다. 색다른 모습을 보여줘서 많은 분이 좋아해 주신 거 같습니다(웃음). 최근엔 어떻게 지냈습니까.  
 
2018년 8월 K리그1 소속이었던 전남 드래곤즈(현재는 K리그2) 감독 생활을 마치고 쉬고 있습니다. 2월부턴 대한축구협회(KFA) 전력강화위원으로 활동하고 있고요.  
 
전력강화위원이요?
 
한국 축구 대표팀이 평가전이나 대회를 치르고 나면 모여서 분석하는 일을 합니다.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할 수 있도록 울산 현대 김도균 유소년 총괄부장, KFA 최영준 기술교육실장 등과 의견을 나누죠. U-17, U-19, U-20 등 연령별 대표팀 감독을 선임할 때도 모여서 회의를 하고요.  
 
5월 23일 폴란드에서 U-20 월드컵이 개막합니다. 관심이 크실 거 같습니다. 특히나 이강인 선수와는 각별한 ‘인연’이시지 않습니까.  
 
한국 축구 대표팀의 미래를 책임질 선수들이 뛰는 무대기도 해서 관심이 아주 큽니다(웃음). (이)강인이는 아주 어릴 때(7살) 보고 올해 처음 봤어요. 5월 2일 한국 축구 대표팀 파울루 벤투 감독이 KFA 전임지도자와 전력강화위원들에 교육을 진행한다고 해서 파주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를 찾았거든요. 때마침 강인이가 U-20 대표팀 훈련에 참여하고 있어서 보게 됐죠. 
 
어떤 말을 나누셨습니까. 
 
강인이가 어린 나이에 스페인으로 건너가 축구를 했잖아요. ‘한국말 안 까먹었냐’고 물어봤습니다(하하). 그랬더니 ‘까먹었는데, 연령별 대표팀에 들어오면서 조금 늘었어요’라고 답하더라고요.  
 
이강인을 포함한 U-20 대표팀 선수에겐 ‘대선배’입니다. 유상철 감독님은 어떻게 축구와의 인연을 맺게 됐습니까. 
 
어릴 때 밖에서 뛰어노는 걸 좋아했습니다(웃음). 예전엔 스마트폰이 없었잖아요. 앉아서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게 없으니 나가야죠. 축구를 특별히 좋아한 건 아니었습니다. 야구할 때도 있었고, 흙 만지면서 시간을 보내는 날도 있었죠. 친구들과 움직이면서 할 수 있는 건 다 했습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정식 축구부에 들어갔죠. 
 
뛰어놀면서 적성을 찾으셨습니까.
 
학교에 축구부가 있었어요. 당시엔 스카우트 개념이 없었습니다. 학년별로 축구 대회를 해서 선수를 뽑았어요. 제가 축구부 감독, 코치가 지켜보는 앞에서 좋은 활약을 보인 거 같아요(웃음). 대회 끝나고 감독께서 오시더니 ‘축구할 의향이 있냐’고 물어봐서 ‘알았다’고 했죠. 재미있으니까. 
 
유상철 감독께선 골키퍼를 제외한 전 포지션을 소화한 '멀티 플레이어'였습니다. 첫 포지션은 무엇이었습니까. 
 
학년별 축구 대회에선 그런 거 없었죠(하하). 무작정 뛰었습니다. 정식으로 축구부에 들어가기 전까진 포지션 개념도 없었고요. 축구부에 들어가선 ‘레프트 윙’, 왼쪽 측면 공격수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선 미드필더, 고등학교 땐 스트라이커, 대학교에선 중앙 수비수로 활약했죠. 골키퍼 빼고 다 했습니다. 
 
운동선수의 삶이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요. 처음 운동 시작했을 때 부모님의 반대는 없었나요. 
 
상상 초월이죠(웃음). ‘축구를 하겠다’고 했지만 걱정이 많았습니다. 집에 가서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불안했죠. 부모님께선 분명 반대하실 거 같았어요.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어떤 반전이요?
 
고민을 거듭한 끝에 어머니께 ‘저 축구가 하고 싶은데 축구부에 들어도 될까요’라고 말했는데, ‘어’라는 짧고 굵은 답변이 돌아왔어요. 고민조차 없으셨죠(하하). ‘그걸 왜 하려고 해’란 질문도 없었습니다. 
 
어머님께서 쉽게 허락해주신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당시엔 엄청나게 왜소했습니다. 편식도 심했고요. 어머니는 ‘운동 삼아 해보다가 알아서 그만두겠지’라고 생각하신 거 같아요.
 
선수 시절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체격이 아주 좋으십니다(웃음). 
 
중학교 때까지 키가 165cm였습니다. 또래 아이들보다 왜소하니까 어려운 점이 많았죠. 처음 축구를 시작했을 때부터 체력적으로 뒤처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축구 실력도 특출나진 않았고요. 중학교 때까진 ‘한국 축구 대표팀 유니폼을 입는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죠. 고등학교 2학년 땐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떤 일이요?
 
그때까지 키가 안 컸습니다. 운동선수가 되기엔 왜소했어요. 그래서 고교 시절 코치께서 아버지를 찾아와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유)상철이가 축구 선수로 크기엔 신체 조건이 좋지 않다. 축구를 그만두는 게 좋을 거 같다’고요. 
 
아버지께선 뭐라고 답하셨나요. 
 
사실 저도 이 일을 은퇴하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시 ‘이런 일이 있었다’고 말씀해주셨죠. 아버지는 ‘(유)상철이가 축구를 좋아하니까 고교 졸업 때까지만 축구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셨대요. 그 정도로 제 신체조건이 안 좋았어요. 그런데 고교 2학년 겨울방학 때 극적인 반전이 이뤄집니다. 
 
이번엔 또 어떤 반전입니까.  
 
성장통이 심해서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통깁스를 하고 있었어요. 제대로 잠을 못 잘 정도로 너무나도 아팠습니다. 운동도 한 달 이상 못했죠. 이때 엄청나게 먹었어요. 밥 먹고 1시간 지나면 또 배가 고픈 겁니다(하하). 며칠 굶은 사람처럼 한 달 동안 먹기만 했습니다.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죠. 
 
어떤 일입니까. 
 
깁스를 풀고 학교에 갔는데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170cm도 안 되던 아이가 180cm가 돼서 나타난 거죠. 저도 신기했어요(웃음). 신체조건이 좋지 않아서 마음고생이 심했었는데,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10cm가 자랐으니까요. 그래서 고교 3학년 땐 포지션도 바뀌었어요. 미드필더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감독께서도 신체조건으로 고민한 시간이 있었다는 건 몰랐습니다. 선수 시절 유상철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누구든지 그럴 거 같아요. 감독께선 신체조건이 좋지 않은 선수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거 같습니다. 그럼 한 가지 궁금한 게 체격이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합니까. 
 
장단점이 있습니다. 키가 크고 덩치고 좋아지면 몸싸움과 공중볼 다툼 등에서 유리하죠. 하지만, 왜소한 선수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들만이 가진 장점이 있거든요. 스피드나 볼 다루는 기술 등 키 큰 사람이 가지지 못한 걸 그라운드 위에서 보여준다면, 팀에 꼭 필요한 선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교 2학년 겨울방학을 보내면서 축구 스타일에도 변화가 있었습니까.   
 
신체조건이 좋아지다 보니까 약점이던 몸싸움과 공중볼 다툼이 강점으로 바뀌었죠. 왼쪽 측면 공격수와 미드필더를 보면서 볼 다루는 기술, 스피드 등의 강점이 있었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장점이 생기면서 더 좋은 선수로 클 수 있었던 거 같습니다.   
 
‘전설’ 차범근과 남다른 인연.. 유상철 “차범근 감독님을 처음 본 순간,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1994년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울산 현대에서 프로에 데뷔한 유상철 감독(사진=한국프로축구연맹)
  
유상철 감독께선 ‘학창시절’ 하면 유달리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습니까. 
 
힘들었던 기억뿐입니다(웃음). 제가 경신중·고를 나왔어요. 입학할 땐 몰랐는데 축구 명문이더라고요. 자부심이 컸죠. 졸업생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로는 ‘전설’ 차범근 감독님이 있습니다. 설명이 더 필요한가요(하하). 차범근 감독님 덕분에 고교 2학년 때 처음 한국 축구 대표팀의 꿈을 갖게 됐었죠. 
 
차범근 감독을 만나신 겁니까. 
 
고교 2학년 때 학교를 찾아오셨습니다. 눈앞에 TV나 스포츠신문에서만 볼 수 있는 대스타가 떡하니 있으니 심장이 멎는 줄 알았어요. 가만히 서 계시는 차범근 감독님 주변이 환하게 빛나더라고요. 그때 처음 ‘나도 저분처럼 될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래서일까요. 1990년 19세 이하 청소년 대표(U-20 대표팀)팀에 처음 발탁됐습니다. 
 
고교 졸업 후 대학 시절이었습니다. 고교 3학년 때 신체조건이 좋아지면서 축구 실력이 늘었잖아요. 차범근 감독님을 보면서 꿈이 커지기도 했고요. 웃긴 건 제 대학교 때 포지션이 뭐였는지 아세요?
 
또 바뀌신 겁니까. 
 
건국대학교에 포워드로 스카우트 돼서 들어갔는데 감독께선 절 중앙 수비수로 썼어요. 또 한 번의 포지션 변화였죠. 그땐 정체성에 혼란이 오더라고요. ‘난 대체 어떤 선수일까’란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죠. 측면 공격수로 시작해 미드필더, 스트라이커로 뛰다가 이젠 중앙 수비수를 보라고 하시니 난감했습니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이젠 공격수로 자리를 잡겠구나’란 생각을 했었거든요. 
 
어릴 적부터 멀티 플레이어 능력을 인정받은 거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포지션이 계속 바뀐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를 가르친 지도자분들만 아시겠죠(웃음). 돌이켜보면,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한 게 성장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축구엔 예상할 수 없는 변수가 무수히 많잖아요. 멀티 플레이어가 되면 활용 가치가 높아지는 거죠. 제자나 후배들한테도 얘기해요. 능력과 기회가 된다면 많은 포지션을 맡아보라고요. 선수뿐 아니라 지도자를 하면서도 큰 도움이 되는 걸 느낍니다.    
 
멀티 플레이어 유상철 감독께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 건 1994년 울산 현대 입단 이후입니다. 
 
프로에 입단하고 한국 축구 대표팀에도 뽑혔습니다. 잘 풀렸죠(웃음). 
 
한국 축구 대표팀에 처음 뽑혔을 때를 기억합니까. 
 
어리바리했죠(하하). 한국 축구 대표팀에 소집돼서 갔는데 TV로 보던 선수들이 있는 거예요. 김주성, 고정운, 홍명보, 황선홍 선배 등이 눈앞에 있으니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범접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떡하니 있는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전 처음 한국 축구 대표팀에 뽑혔을 때보다 청소년 대표팀에 발탁됐을 때가 더 기억에 남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대표팀은 유니폼이 다 똑같잖아요. 태극기가 달린 유니폼을 딱 입었는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북받치더라고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 드니까 한편으론 걱정도 됐습니다. ‘아, 이걸 빨리 벗어선 안 되겠다.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게끔 운동에만 집중해야겠다’란 생각이 들었죠. 
 
처음 프로 선수가 됐을 땐 어땠습니까. 
 
프로는 ‘냉정하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대학 때까진 지도자나 선배들이 잘못된 게 있으면 말해주거든요. ‘어떤 부분이 잘 못됐으니 다음번엔 이렇게 하라’고. 하지만, 프로는 그런 게 없는 거예요. 알아서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었죠. 
 
울산 현대에 입단하면서 ‘우상’ 차범근 감독을 만나게 됩니다.  
 
울산에 딱 들어갔는데 차범근 감독님이 팀을 이끌고 계셨죠. 전 ‘행운아’입니다. 차범근 감독님을 만난 게 축구 선수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엔 지금보다 세계 축구와의 격차가 훨씬 더 컸잖아요. 차범근 감독님은 독일 분데스리가를 경험하신 분으로서 선진국은 어떻게 훈련하고 몸 관리 하는 지 정확하게 알고 계셨죠. 
 
훈련, 몸 관리 비법 등을 배우신 겁니까. 
 
전 프로가 된 이후 콜라를 마시지 않습니다. 차범근 감독께서 성공하려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을 제시해주셨거든요.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가 무엇이고 뭘 먹어야 하는지 처음 배울 수 있었죠. 훈련은 물론 식사, 휴식 등 삶 자체를 축구 쪽으로 맞출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훈련도 남달랐나요. 
 
저는 1994년이 프로 데뷔 시즌이니까 그 이전은 잘 모르죠. 하지만, 제가 느낀 건 ‘확실히 다르다’였습니다. 훈련부터 ‘대충’은 없었어요. 신인이든 최고참이든 100이면 100을 쏟아내야 합니다. 차범근 감독님을 만나면서 ‘아, 이게 진짜 프로구나’란 걸 빨리 느낄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우선 프로 선수의 기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 가르침이 없었다면 중심을 잡지 못했을 수도 있었어요. 훈련을 등한시하거나 몸 관리를 못 할 수 있었죠. 그런 게 젊을 땐 티가 나지 않을 수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 ‘저렇게 될 수밖에 없구나’라고 느껴지거든요. 기본을 잘 배운 덕분에 중심을 잡고 나아갈 수 있었죠. 
 
훈련 방식은요?
 
체계적이죠. 예를 들면 토요일에 경기를 했어요. 그럼 다음날은 회복 훈련을 합니다. 월요일은 휴식을 취하고 화요일부터 훈련 강도를 조금씩 올리죠. 화요일엔 60, 수요일엔 80, 목요일엔 100으로 훈련을 진행하고, 경기 전날은 컨디션 회복에 중점을 두고요. 훈련 강도가 센 날엔 전날 잠을 못 잘 정도였습니다. 보통 힘든 게 아니니까 걱정이 돼서(웃음). 
 
그래서일까요. 프로 첫 시즌부터 소속팀은 물론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도 활약했습니다. 차범근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이 있었나요. 
 
처음엔 선수로도 안 봤을 거예요(웃음). 대학 마지막 시즌이 1993년 11월에 마무리가 됐습니다. 12월엔 휴식기니까 개인 운동 하면서 푹 쉬었죠. 그리고 1월부터 울산에 합류했습니다. 개인 운동은 꾸준히 했지만, 프로 선수들의 훈련을 따라가긴 어려웠어요. 제 느낌인데 차범근 감독께서 ‘저런 애를 왜 뽑았을까’라고 후회하지 않았을까 싶어요(하하). 그래서 결심했죠.
 
어떤 결심이요?
 
‘훈련을 남들보다 2배 이상 해보자’고요. 제가 운이 좋게도 1994년 미국 월드컵 전지훈련 명단에 포함됐습니다. 하지만, 큰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실력이 부족할 뿐 아니라 준비도 안 돼 있으니 훈련에만 집중했죠. 지금 생각하면 입에서 단내가 날 때까지 무식하게 뛰고 또 뛰었던 거 같아요(웃음). 
 
효과가 있었습니까. 
 
1994년 미국 월드컵 최종 명단엔 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소속팀에 돌아와서 차범근 감독께 인정받았죠. 리그 두 번째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는데 몸이 올라와 있으니까 자신감이 붙더라고요. 한국 축구 대표팀과 소속팀을 오가면서 프로 적응도 마쳤고요. 남들보다 힘들게 훈련한 게 성과를 낸 거죠.
 
초교 시절부터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한 유상철 감독입니다. 차범근 감독께선 유상철을 어떤 포지션에 활용했습니까. 
 
왼쪽 풀백이었습니다(하하). 측면 공격수, 미드필더, 스트라이커, 중앙 수비수에 이어 또다시 새로운 포지션을 맡게 된 거죠. 프로에 오면서 골키퍼를 제외한 모든 포지션을 소화해본 선수가 됐습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이후 이적한 J리그...“선진 축구 환경, 아주 부러웠죠” 
 
J리그 요코하마에서 뛰었던 유상철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성공적인 프로 데뷔 후 한국 축구 대표팀에서도 붙박이로 활약하게 됩니다. 1998년엔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했습니다. 
 
지금도 선수 시절 뛰었던 경기를 돌아보면 또렷이 기억이 납니다. 이 장면에선 어떻게 플레이를 했고 뭐가 좋았고 부족했는지 하나하나 다 떠올라요. 하지만,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 조별리그 1, 2차전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그 부분만 싹둑 잘라낸 거처럼요. 
 
멕시코, 네덜란드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축구 인생에서 그때만큼 긴장했던 때가 없었습니다. 멕시코, 네덜란드전 모두 정신없이 뛰기만 하다 나온 거죠.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했어요. 솔직히 세계적인 선수들과 같이 뛰는 게 신기하기도 했습니다. 속으로 ‘와’하면서 감탄했죠(웃음). 결과는 아쉬웠지만, 그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은 없었을 겁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마치고선 새로운 무대에 도전했습니다. 울산을 떠나 일본 J리그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해 3시즌(1999~2001)을 뛰었습니다. 
 
일본에 처음 갔을 때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축구 환경이 한국과는 차원이 다르더라고요. 피지컬 코치란 직업이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어요. J리그 모든 팀엔 유소년팀이 있었고요. 축구 선수는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었죠. 우리(1983년)가 일본보다 10년 먼저 프로화를 일궜지만, 준비 과정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란 걸 느꼈습니다. 
 
어떤 거죠?   
 
일본은 프로 출범 전 엄청난 준비를 했습니다. 독일 분데스리가, 이탈리아 세리에 A,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등을 보고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죠. 한국은 준비가 덜 된 상태임에도 프로축구를 만들었고요. 축구 환경이 다를 수밖에 없더라고요. J리그가 아주 체계적이라는 걸 느낀 계기가 있어요. 
 
어떤 계기죠?
 
1999년 요코하마에 갔는데 피지컬 코치가 있는 거예요. 생소한 코치니까 뭐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몰랐죠. 그런데 저 사람이 자꾸 내 몸을 관리하는 겁니다. 전 잘 모르니까 처음엔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말을 듣지 않은 거죠. 당시 J리그는 K리그와 비교해 훈련 강도가 엄청나게 약했어요. 그러니 매일 남아서 보강 훈련을 했죠. 피지컬 코치가 한 마디 하더라고요. 
 
어떤 말을 했습니까. 
 
‘실전에서 최상의 경기력을 보이고 싶다면 팀 훈련에만 집중하라’고. 듣지 않았죠(웃음). 그런데 며칠 뒤에 근육 부상을 당했습니다. 피지컬 코치가 오더니 ‘이럴 거 같아서 개인 훈련을 막았던 거다’라고 한 마디 하더라고요. 그때부터 피지컬 코치 말은 무조건 따르게 됐죠(하하). 
 
한국은 2002년 히딩크 사단에 레이몬드 베르하옌 피지컬 코치가 포함되기 전까진 ‘피지컬 코치’란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2002년 이후에야 피지컬 코치가 구단마다 있어야 한다는 걸 느끼고 데려오기 시작했죠. 그런 걸 보면서 ‘J리그가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구나’란 걸 크게 느꼈습니다. 
 
일본에서 6시즌을 보냈습니다. 일본에서 크게 느낀 게 또 있을까요. 
 
요코하마(1999-2001)-가시와 레이솔(2001~2002)-요코하마(2003~2005)에 있으면서 ‘축구 선수는 축구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걸 배웠어요. K리그에 있을 땐 솔직히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았습니다. 다쳤을 때를 예로 들어볼게요. K리그에선 제가 치료했어요. 병원 알아보고 재활 일정 짜고 물리치료 받고, 전부 선수가 했죠. 일본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달랐죠.  
 
팀 닥터란 직업도 일본에서 처음 봤어요. 부상을 당하면 팀 닥터한테 갑니다. 그럼 진단을 내리고 앞으로의 일정을 짜줍니다. 휴식을 취하고, 마사지를 받고, 재활 훈련을 하는 모든 일정을 만들어줍니다. 그렇게 몸 상태가 회복되면 피지컬 코치에게 평가를 받습니다. 훈련해보고 복귀를 결정하는 거죠. 선수는 축구만 열심히 하면 되는 환경이 아주 부럽더라고요.  
 
선수로서 부러운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거 같습니다. 
 
축구만 하면 되니까요. 경기장 분위기도 달랐습니다. 당시에도 J리그는 평균 3만~5만 관중이 들어찼어요. ‘만원 관중’인 날이 많았죠. K리그도 관중 수가 많이 늘고는 있지만, 텅 비어 보이는 날이 많은 게 사실이잖아요. 솔직히 뛰는 선수 입장에선 긴장감이 달라요. 꽉 찬 경기장에서 뛰면 긴장을 안 할 수가 없는 거죠. 축구 선수로 최적의 환경이 아니었나 싶어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꿈꿨던 4강 신화 주역 유상철, 혹사에 발목 잡혔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진출에 큰 역할을 한 유상철 감독(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유상철 감독의 축구 인생 황금기는 역시 2002년 한-일 월드컵이지 않습니까. 
 
음(웃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썼죠. 지금 생각해도 놀랍습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처음 출전한 이후 48년 만에 첫 승리를 거뒀죠. 폴란드, 미국, 포르투갈 등 만만찮은 팀과 한 조에 속해 1위로 16강에 진출했습니다. 16강전에선 우승 후보 이탈리아를 이겼고, 8강전에선 또 다른 강자 스페인을 잡았죠. 
 
지금 생각해도 믿기 힘든 일이긴 합니다(웃음). 
 
한국이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과 붙는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웃음). 이전까지 네 차례 월드컵 본선에 도전하면서 1승도 거두지 못한 팀이었잖아요.
 
유상철 감독에게 거스 히딩크는 어떤 지도자로 기억됩니까. 
 
차범근 감독님 못지않은 분이죠. 그리고 히딩크 감독님은 제 마지막 월드컵을 함께 한 지도자예요. 잊지 못할 순간을 함께 한 분이니 인상 깊게 남아있죠. 만약 그분이 배울 점은 물론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면 기억에 깊이 남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제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지도자입니다(웃음).  
 
차범근, 히딩크 등 감독들이 선수 유상철을 유독 예뻐한 이유는 뭘까요. 
 
제가 아부하는 성격은 아닌데(하하). 음. 감독이 원하는 걸 남들보다 조금 빨리 알아차린 거 같아요. 감독이 무언가를 지시하면 바로 그라운드에서 실행에 옮기는 거죠. 또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는 까닭에 지도자분들께서 좋게 봐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상철 감독은 2002년 월드컵 이후에도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습니다. 특히나 2002년 9월 28일 울산으로 복귀한 뒤엔 ‘8경기 9골’이란 놀라운 활약을 보였습니다. 
 
월드컵이 끝났을 때가 몸이 가장 좋았습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마치고선 K리그 득점왕(23경기 15골)을 차지했죠. 2002년엔 리그 8경기를 남겨두고 울산으로 복귀해서 9골을 넣었어요(하하).   
 
감독께선 월드컵 후 유럽 팀 오퍼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휴. 대표적인 게 1999년 바르셀로나였죠. 그 당시 에이전트라고 계약한 사람이 중개인 역할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갑자기 다음날 바르셀로나로 가자는 거예요. 비행기 표까지 예약했고, 바르셀로나 담당 기자한테 전화도 왔었습니다. 안되는 영어로 대화를 하는 데 얼마나 식은땀이 나던지(웃음). 그런데 못 갔죠. 
 
어떤 이유에서요? 
 
영입 제안이 아니라 입단 테스트였거든요. 제가 ‘입단 테스트는 안 받겠다’고 말한 거로 기억해요. 중개인 역할을 했던 에이전트와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도 있었고요. 음. 지금 생각하면 무조건 갔어야 했는데 아쉽죠.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유럽 오퍼가 많았었죠?
 
지금 손흥민이 뛰고 있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 홋스퍼와 풀럼 등에서 영입 제안이 왔었습니다. 토트넘과는 최종협상만을 남겨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또 못 갔죠. 소속팀(가시와) 선수들과 작별인사까지 마치고 비행기 탈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쉬워요. 나중에 알아보니 이적료 협상 과정에 문제가 조금 있었던 거 같더라고요. 
 
최상의 몸 상태여서 더 아쉬울 거 같습니다. 
 
2002년 월드컵 후엔 자신감이 있었어요. 은퇴하기 전에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뛰는 유럽 무대를 경험하고 싶은 욕심도 컸고요. 그때 유럽 진출에 성공했다면, 최소한 선수 생활을 돌아볼 때 ‘후회는 남기지 않을 수 있었는데’란 생각을 해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쉽죠(옅은 미소).
 
유럽 진출의 꿈은 아쉽게도 이루지 못했지만, 유상철 감독은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한국 축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2006년 독일 월드컵까진 뛰고 싶었습니다. 월드컵을 마친 뒤 유니폼을 벗겠다는 계획도 세웠고요. 하지만, 몸이 버티질 못하더라고요. 제가 몸을 혹사했죠. 리그는 물론 한국 축구 대표팀 경기엔 모두 출전했죠. 2004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엔 와일드 카드로 후배들과 함께 나갔고요. 선수가 1년간 뛸 수 있는 경기 수를 훨씬 넘어버리면서, 무릎이 망가졌습니다.  
 
유상철 감독께선 2006년 독일 월드컵 지역 예선을 소화했습니다. 은퇴 대신 대회 출전을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습니까. 
 
‘이 상태론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당시 한국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고 있던 딕 아드보카트 감독에게 몸 상태를 숨겼다면,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 출전할 순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저 자신이 용납을 못 했습니다. 최고의 기량을 보여줄 수 없는데 자리를 꿰찬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결심했습니다. 
 
어떤 결심이요?
 
몸 상태가 최상인 후배에게 기회를 주자고요. 요즘 제자나 후배를 만나면 그런 얘길 해요. 몸 관리 잘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라고요. 제가 선수 생활할 땐 그런 얘기해 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무조건 뛰어야 하는 시대였으니까요. 얘기하다 보니 또 한 가지 아쉬운 선택이 떠오르네요. 
 
어떤 선택이죠?
 
은퇴 전에 호주와 뉴질랜드 팀에서 제안이 있었거든요. 당시 호주는 프로화 이전이었고, 뉴질랜드도 세미프로 리그를 운영 중이었죠. K리그보다 편안한 환경에서 운동하며 영어까지 배울 기회였는데,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더라고요. 영어라도 배웠으면 지도자를 하는 데 있어서 아주 큰 도움이 됐을 텐데. 그놈의 자존심이 뭐라고 참(하하). 
 
그래도 선수 유상철은 전설입니다. A매치 124회(역대 5위) 출전 기록만 봐도 알 수 있죠(웃음).
 
감사하죠. 좋은 지도자를 만났고,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선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남겼고요. 많은 분께서 큰 사랑을 보내주셨습니다. 유럽 무대에 도전하지 못한 게 아쉽지만, 그래도 행복한 축구 선수였다고 생각합니다(웃음). 
 
상처가 많았던 지도자 생활··· “‘쟤 실패한 감독 아니야?’란 낙인이 두렵다”
 
유상철 감독(사진=엠스플뉴스 이근승 기자)
 
2006년 은퇴 후엔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사실 ‘지도자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은퇴하고서 1, 2년 정도는 쉬면서 앞으로 무얼 해야 할지 고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절친인 강원 FC 송겹섭 전 감독이 저한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네가 축구계를 떠나서 사업을 하든 다른 일을 하든 네가 결정할 일이다. 하지만, 유상철이란 사람은 2002년에 역사를 썼다. 이런 경험을 후배들한테 알려주지 않는 건 책임이 없는 게 아닐까’라고. 
 
뭐라고 답하셨습니까.  
 
그 말이 머릿속에 꽂혀서 빠지지 않더라고요.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고민 끝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게 됐죠. 처음엔 축구교실을 차렸어요. 일본에 있을 때 유소년 시스템이 아주 잘 만들어져 있는 걸 보면서 ‘어린 선수를 한 번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은퇴하자마자 시작했죠.
 
축구교실이요?
 
지도자 생활의 시작으로 볼 수 있죠. 하지만, ‘한 번 해보자’는 의지는 큰데 현실은 만만치가 않더라고요. 제대로 한 번 해보려고 잠실 보조구장을 대관했습니다. 차별화를 두려고 선택한 건데 비용이 엄청나게 들었죠. 회원이 일정하지가 않고 들쑥날쑥하니 코치 인건비 감당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구단이 운영해야 하는 걸 개인이 하니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2009년엔 춘천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 감독을 맡았습니다. 
 
지도자 자격증을 따고 나서 제안이 왔어요. 축구부를 창단하는 데 와줄 수 있냐고. 공식적으로 감독을 처음 맡다 보니 부족함을 느꼈습니다. 선수 땐 나만 생각하면 됐지만, 지도자는 아니거든요. 30명에 가까운 선수를 하나하나 다 챙겨야 합니다. 선수 경험만으로는 한계가 뚜렷하다 보니 시행착오가 많았죠.       
 
그러다가 2011년 7월 17일 K리그 대전 시티즌 지휘봉을 잡습니다. 감독으로서 프로는 어땠습니까. 
 
선수 때와는 크게 다르더라고요. 은퇴한 지가 얼마 안 됐을 때라 선수를 이해하는 건 쉬웠지만, 힘들었습니다. 대전이 마음껏 투자할 수 있는 구단은 아니잖아요. 부족한 예산으로 팀을 잘 꾸려서 성적을 내야 하니까 어렵더라고요. 선수들이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려고 힘썼지만, 쉽지 않다는 것도 느꼈고요. 
 
축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요?
 
음. 팀 예산이 적잖아요. 수준급 선수 영입이 어렵다면, 최대한 선수 쪽에 포커스를 맞춰서 팀을 운영하려고 했거든요. 하지만, 그런 환경을 만드는 데는 여러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단 걸 느꼈어요.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도와주신 분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아주 적었죠. 성적이 안 나오면 저뿐만 아니라 선수들에 책임을 묻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런 걸 이해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승승장구했던 선수 시절과 달리 지도자 유상철은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던 거 같습니다. 
 
2012시즌을 마치고 대전 지휘봉을 내려놓으면서 이런 다짐을 했습니다. ‘아, 이젠 사람한테 상처받지 말아야겠다’라고. 그리고 ‘히딩크 감독은 처음부터 잘했을까’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적은 예산, 축구에만 집중하기 힘든 환경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까 싶었어요. 제가 보기보다 아주 여리거든요(웃음). 
 
말 못 할 상처가 있는 거 같습니다. 
 
프로에서의 감독은 처음이니까 ‘아파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야 다음번에 똑같은 일이 생겼을 때 순탄히 넘어갈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정말 힘들었어요. 사람한테 받은 상처가 커서 우울증에 걸렸었거든요. 대전에서 나오고 한 5개월 동안은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에만 있었습니다. 휴.
 
1년간 휴식을 취했습니다. 
 
2013년은 우울증 치료하면서 보냈습니다. 연말쯤 돼서 괜찮아지니까 다시 축구 생각이 나더라고요. 제가 축구만 해왔으니까, 축구계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우울증을 치료하면서 ‘강해졌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그러다가 2014년부터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울산대학교 지휘봉을 잡게 됐죠. 이땐 참 재밌었어요. 
 
이전과는 달랐나요. 
 
저한테 ‘4년’이란 시간이 보장돼 있었거든요. 뛰어난 선수도 많았고요. 졸업하면 프로로 갈 선수들이다 보니 조금만 가르쳐주면 성과가 나오더라고요. 4년간 준우승만 4번 했습니다. 우승 트로피는 들어 올리지 못했지만, 주변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울산대 축구가 제일 재밌다’고. 지도자로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습니다(웃음). 
 
유상철 감독께선 2018시즌을 앞두고 전남 드래곤즈 지휘봉을 잡았습니다. 하지만, 1시즌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 채 지휘봉을 내려놓았습니다.   
 
프로에서 감독 제안을 받으면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누가 프로팀 감독 기회를 거부하겠어요. 하지만, 전 고민이 되더라고요. 이전에 받았던 상처가 너무 컸거든요. 결국엔 지휘봉을 잡았는데 오래 가지 못했죠. 제가 선택한 일이니 후회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걱정이 생겼어요. 
 
어떤 걱정이죠?
 
제 지도자 경력이 실패로 비치는 거요. ‘유상철은 실패한 지도자’란 낙인이 두렵습니다. 실패라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도 있겠죠. 하지만, 어떤 지도자나 힘든 시기는 있습니다. 사람이니까요. 음(잠시 생각에 잠김). 그리고.  
 
편하게 말씀하세요. 
 
위르겐 클롭(리버풀)이나 호셉 과르디올라(맨체스터 시티)와 같은 명장이 매 시즌 투자를 줄이고, 축구에만 집중하기 힘든 환경의 팀을 맡는다면 우승을 일굴 수 있을까요. 그런 팀을 이끌고 성적을 내지 못하면 곧바로 내쳐지는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까요. 감독과 구단 간의 신뢰가 있고, 투자가 있을 때 성적을 내지 못하면 인정합니다. 지도자 공부를 더 해야죠.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그런 아쉬움이 있는 거 같아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전 앞으로도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공부하고 고민할 겁니다. 기회가 된다면 지도자 경력도 이어갈 거고요. 지도자로서 어려웠던 시간이 언젠가는 도움이 되지 않겠어요? 많은 분이 ‘실패한 지도자’가 아닌 ‘지도자로 성장하고 있는 유상철’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웃음).   
 
이근승 기자 thisissports@mbcplu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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