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츠바사 "한국인은 일본인을 별로 안 좋아하는줄.."

김동현 입력 2019. 5. 19.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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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1 대구FC의 일본인 미드필더
어떤 '국제 노마드'의 축구사랑

【서울=뉴시스】김동현 기자 = 프로축구 K리그1 대구FC에서 뛰는 니시 츠바사(29)의 경력은 독특하다.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서 태어나 대학까지 일본에서 나왔지만, 일본프로축구(J리그)에서 뛴 적이 없다. 대학을 졸업하는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팀이 단 한 곳도 없었기 때문이다.

축구로 먹고 살기 위해 츠바사는 동유럽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폴란드 4부리그에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폴란드 2부, 1부 리그 등 다양한 카테고리를 거쳤다. 비제프 우치, 레기아 바르샤바 등 폴란드 명문 클럽도 경험했다. 지난 시즌 슬로바키아 1부리그에서 뛴 후 작년 6월15일 대구 유니폼을 입었다.

조광래 대구 사장은 "영상을 보고 패스에 능한 데다가 몸싸움도 가능한 일본인 선수라서 영입하기로 했다"고 한다. 성호상 강화부장이 당시 슬로바키아로 가서 제반 사항을 확인했고, 이적이 성사됐다.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알려진 바가 거의 없는 이 미드필더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대구 중원의 핵심선수로 자리잡았다.이번 시즌 리그 11경기에 나서 1골 1도움을 보탰고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도움 1개를 기록하는 등 활약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팀인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경기에서도 뛰었다. "프로 무대 데뷔 후 처음으로 자국에서 자국 팀과 대결했다"며 웃었다.

아시아 무대에서의 활약 덕분에 일본 언론도 츠바사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멜버른 빅토리(호주)와 경기에서는 전 일본 국가대표 혼다 게이스케와 맞붙기도 했다. 29세의 나이에 아시아에서 조금씩 이름을 알려가고 있는 중이다.

독특한 커리어, 빼어난 실력의 바탕에는 축구에 대한 깊은 애정이 있다. 스스로 "축구를 좋아했고 포기하지 않은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며 "운이 좋다"고 한다.

-축구를 시작한 건 언제인가.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다섯살 때다. 친척 형이 있었다. 몇 살 위였는지 기억은 잘 안난다. 그 형이 축구를 해서 보러 간 적이 있는데 뭔가 재밌을 것 같았다. 부모님을 졸라 축구를 시작했다. 동네에 있던 리베르타 기타쿠마모토라는 클럽에 들어가서 본격적으로 했다. 아마 처음 듣는 이름일 것이다. 하지만 전일본소년축구대회(13세 이하 유소년 전국대회)에 나가는 꽤 큰 팀이었다. 그 뒤로 구마모토에 있는 루터 중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쭉 축구를 했다."

-포지션은 어렸을 때부터 미드필더였나.

"어려서부터 공격적인 포지션이 많았다. 중원의 공격형 미드필더라든가 세컨드 톱을 보는 경우가 잦았다. 측면에서도 했다. 꽤 많은 포지션을 소화한 것 같다.

-지금 중앙 미드필더를 보고 있는데 이 포지션에 정착한 때는 언제인지 궁금하다.

"지금 6번(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에서 뛰는 경우가 많은데 이 포지션은 사실 폴란드에서 처음 봤다. 그 전까지는 측면이나 공격적인 포지션이 많았다. 생각해보니 거의 소화한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런것치곤 완성도가 높다) 그런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재밌게는 하고 있다.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팀에 정승원, 김대원 같이 젊은 선수들도 있고 에드가나 세징야 같은 좋은 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나는 밸런스를 잡아주는 것 뿐이다."

-구마모토를 떠나 대학은 도쿄에 있는 센슈대학으로 갔다. 어떤 축구를 했나.

"겐페이 다카히사 센슈대학 감독에게 배웠다. 감독님이 항상 아름다운 축구를 강조했다. 그게 팀의 철학이었다. 공격적인 축구를 즐기는 분이어서 나와도 굉장히 잘 맞았다. 즐겁게 축구를 했던 것 같다. 사실 선배들의 세대에선 리그 4연패를 달성하기도 했지만 내 세대 땐 우승을 못했다. 애초에 나 스스로 1군 멤버로 보긴 어려웠다. 일본 대학리그는 전반기, 후반기가 있는데 항상 후반기나 되어서야 리그 경기에 나섰으니까. 기복이 심했다.

-동문들 가운데는 꽤 좋은 선수들이 많다. 나카가와 데루히토(요코하마 F 마리노스)같은 J리그 주전급 선수들도 있다.

"맞다. 나카가와는 2년 후배다. 1년 후배는 지금 가와사키 프론탈레에서 뛰는 시모다 호쿠토, 독일 쾰른에서 뛴 나가사와 가즈키(우라와 레즈) 등이다. 선배 중에선 마치다 야마토(마츠모토야마가)나 쇼지 요시히로(교토 상가)가 유명하다. 이들 모두 대학 시절부터 엄청났다. (츠바사는 어떤 선수였나) 글쎄. 경기에 나설 기회 자체가 없었다. 경기에 못 뛰니 사람들의 시선도 자연스레 멀어졌다. 4학년 마지막이 되어서야 경기에 조금 나선 정도니까,쉽게 말하면 눈에 띄지 않았다.

-프로로 나서야할지, 취업을 해야할지 고민도 했을 것 같다.

"일본에선 보통 대학교 3학년부터 취업 전선에 뛰어든다. 그래야 4학년 졸업 후 바로 일을 할 수 있다. 나도 프로로 갈지, 취업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중고등학교 선배 중에 아키요시 다이스케(반라레 하치노헤)라는 선수가 있다. 그 선배가 당시 불가리아에서 뛰고 있어서 '에이전트를 소개해줄 수 없겠느냐'고 했다. (일본에선 오퍼가 전혀 없었나) 전혀 없었다. 물론 일본 실업리그(JFL)로 갈 수도 있었지만 그건 납득할 수 없었다. 축구를 할거라면 축구만, 일을 할거라면 일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유럽으로 나간다면 어느정도 먹고 살 수 있는 환경 속에서 축구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유럽으로 건너갔다."

-처음에 들어간 팀은 그바르디아 코샬린이라는 팀이다. 폴란드 4부 리그인데.

"테스트를 통해 팀에 입단했다. 에이전트가 폴란드 4부를 추천한 이유가 있었다. 폴란드는 1부리그 팀의 2군 팀이 4부리그에 있다. 독일 분데스리가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1부리그에 있는 팀들이 이 2군 팀을 항상 보고 있었다. (올라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물론 그 가능성이 크진 않지만, 그게 0에 수렴하진 않았다. 그렇게 테스트를 받아 코샬린에 들어갔는데, 코샬린의 1군 팀인 레히아 구단스크에서 경기들을 보고 '연습에 참가하라'고 했다. 일주일 연습하고 계약했다. 그렇게 1부리그 팀에 가게 됐다. 일본 국가대표였던 마쓰이 다이스케도 있었다. (잘하던가) 클라스가 다르더라."

-이것만 들어도 재밌는 것 같다.

"유럽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 엄청나게 길어진다. 사실 나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운만으로 이렇게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생각해봐라. 당시 코샬린에 일본 선수가 세 명 있었다. 폴란드는 2부리그 밑으론 유럽연합(EU) 국적 선수를 제외하면 외국인 출전이 1명으로 제한돼있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기회를 얻었으니 운이 좋은 것 아닌가."

-그렇다면 폴란드에서 배운 것은 무엇인가.

"처음 4부 팀으로 이적했을 때 감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싸워라'였다. 전술적으로 움직이라는 게 아니라 공 경합 장면에서 무조건 붙으라는 이야기였다. 일본에선 전혀 들은 적이 없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 처음엔 이해가 안 됐지만, 점점 몸에 배기 시작했다. 그런 부분 덕에 한국에선 조금 적응이 쉬웠다. (대구에서도 그런 부분을 평가하는 것 같은데) 피지컬적인 면에서 사실 부족하다. 그래도 평가해준 부분은 감사하다."

-4부에서 시작해 폴란드 최고의 클럽인 레기아 바르샤바에서도 뛴 적이 있다.

"여러가지 의미로 폴란드는 최고였다고 본다. 시설, 환경, 함께 하는 선수들 등에서 말이다. 나는 2군에 주로 있었지만 서포터의 열광적인 부분이나 구단 내부의 경쟁 등이 다른 클럽에 비해 대단히 강했다. 그러나 스스로 기회만 주어진다면 여기서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 기회가 오지 않았다. 그래서 슬로바키아 1부리그의 MFK 미할로프체로 임대를 갔다. 마침 오퍼가 왔고, 뛰고 싶어서 먼저 구단에 나가겠다고 했다. 굉장히 작은, 솔직히 말하면 아무것도 없는 도시였다. 예쁜 풍경만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그 덕에 한국으로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덕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결국 폴란드에서 내가 뛴 것은 대부분 2부였다. 1부에서 뛴 적은 거의 없었다. 2부에서 뛰고 있어도 사실 눈에 띄기는 어렵다. 그 나라의 1부리그에서 뛰는 것은 꽤 큰 의미가 있었다."

-그렇게 지난해 여름에 대구로 왔다. 계기가 있나.

"성호상 대구 강화부장과 한국에서 내 일을 봐주는 에이전트가 친분이 조금 있다고 들었다. 어떻게 나를 보러 왔는지 구체적으론 잘 모른다. 시즌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성 부장과 조금 이야기를 했다. 나도 거취를 고민하고 있던 시기였다. 폴란드에 돌아갈지, 어디로 갈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때 오퍼가 왔다. 유럽에서 계속 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굉장히 놀랐다. 설마 한국에서 영입 제의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몇가지 선택지가 있었는데, 내가 축구선수로 더 성장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새로운 도전이 있을 것이란 생각으로 한국을 선택하게 됐다. 한국을 선택한 이유를 궁금해하더라. 슬로바키아 동료들도 그랬고, 일본에 있는 가족이나 친구들도 말이다."

-그때도 일본에서 오퍼는 없었나.

"없었다. 하지만 해외에서 계속 뛰고 싶었다. 해외에서 생활을 하다보면 역시 축구 이외의 부분에서 배우는 것이 많다. 얻을 것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 일본에서 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일본에서 오퍼가 온다고 해도 고민할 것 같다."

-처음에 대구로 왔을 때의 인상은 어땠나.

"솔직하게 말하겠다. 정치적으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는 않지 않나. 뉴스 댓글란만 봐도 서로 엄청난 댓글들을 주고 받고 있더라. 그런것만 보다보니 '한국인은 일본인을 별로 안 좋아하는군'이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그런데 막상 와보니 동료들 모두가 엄청 나에게 친절하게 잘 대해줬다. 그래서 팀 분위기가 정말 좋았다. (누가 제일 잘해줬나) 모두 다다.정말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다 잘해줬다. 황순민이나 한희훈처럼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선수들도 있었고 에드가와는 영어로 소통한다. 덕분에 팀에 적응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도시 또한 마찬가지다. 대구가 생각보다 엄청 대도시더라. 오기 전까지 대구에 대해 전혀 몰랐다. 일본인들에게 잘 알려진 도시는 역시 서울, 부산 아닌가. 그런데 너무 커서 놀랐고 또 좋다고 느낀다. 한국 제3의 도시 아닌가. 생활도 엄청 편하다. 편하게 쉴 수 있다. (불편한 점은 없나) 애를 먹는 부분은 역시 언어다. 메뉴판을 읽지 못해 번역 어플리케이션을 애용하고 있다. 한국말을 배우곤 있지만 할 줄 아는 말은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정도다. "

-지난해 대구의 전반기는 참혹했다. 그런데 후반기에 폼이 올라오더니 FA컵 우승까지 해냈다. 그 안에 있으면서 어떤 느낌을 받았나.

"전반기에 왜 그렇게 졌는지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하지만 후반기에 에드가가 온 게 컸다. 조세도 좋은 플레이를 해줬다. 어린 선수들도 점점 경기를 하면서 자신감을 찾았다고 본다. 후반기에 팀으로서의 형태가 조금씩 만들어졌다고 해야할까, 그러면서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FA컵 우승은 과하게 잘됐다는 생각도 든다. 전반기 최하위의 팀이 FA컵에서 우승하리라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나."

-츠바사 본인에겐 어떤 시즌이었나. 결과를 제대로 내진 못했던 것 같은데.

"부상에 발목을 잡혔다. 햄스트링 부상만 네 번을 당했다. 2주 정도의 가벼운 부상이 반복됐다. 돌아오면 다치고, 돌아오면 또 다쳤다. 새로 이적해온 데다가 외국인선수로서 결과를 내야한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기에 정신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그럼에도 재계약을 했는데) 짧은 시간 속에서 나를 높게 평가해준 부분에 대해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올해는 더욱 팀을 도울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각오를 다질 수 있었다."

-이번 시즌부터 사용하고 있는 DGB대구은행파크는 어떤가. 완전히 새로운 스타디움인데.

"축구전용구장은 역시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경기장 분위기 덕에 축구 할 맛이 난다고나 할까. 유럽의 축구전용구장들 느낌이다. 홈 어드밴티지가 상당히 크다는 인상을 받는다. (팬들의 응원도 상당한데) 홈에서 강한 건 팬들의 응원 덕분도 있다고 본다. 그 부분이 크다."

-대구에선 이제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선수로 발돋움했다. 다른 선수들과의 차별화되는 부분은 무엇일까.

"글쎄. 오히려 내가 묻고 싶을 정도다. 굳이 뽑자면 주위를 살리는 플레이 아닐까 싶다. 내가 주도적으로 뭔가를 한다기보다는 주변에 있는 선수를 활용하는 플레이를 많이 한다. 내가 뜀으로써 공격진의 자유도가 더 커지고, 수비 쪽에서도 구멍이 안 나는 것에 신경을 쓴다. 아까도 말했지만 균형을 잡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다."

-밸런스를 잡는다고는 하지만 울산과 경기에서 세징야에게 도움을 한 장면은 꽤나 인상적이었다. 위치를 상당히 올렸는데.

"그 장면에서 딱 위로 올라갔었다. 선수 교체로 수비형 미드필더(박한빈)가 들어와서 내가 전진할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세징야가 앞으로 뛸 것을 알고 있었다. 분명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런 부분에서 브라질 국적의 선수와 맞는 부분이 있다. 그림이 딱 맞아떨어져서 굉장히 좋았다. (전진배치되면 역할 자체가 달라지지 않나. 그쪽이 더 편한건가) 꼭 그런것은 아니다. 수비형 미드필더든, 앞쪽이든 다 좋다. 역할이 달라지는 것 뿐이다. 평소엔 중원에서 밸런스를 잡고 올라가면 좀 더 득점에 신경쓰려고 한다. 8라운드 포항과 경기에서 골을 넣은 것도 전진배치됐을 때였다."

-츠바사가 볼을 잡으면 전방에서 침투를 준비하는 움직임이 많이 보이더라.

"그런 훈련을 많이 한다. 사이드 체인지라든가, 상대에 따라 다르겠지만 상대가 중앙지향적이면 측면에 공간이 많이 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을 신경써서 훈련하는 편이다. 할애를 많이 하는 만큼 선수들 전체에 그런 그림들이 공유되는 부분이 있다."

-함께 했을때 가장 편한 선수는 누군가.

"에드가, 세징야가 편하다. 또 김대원이나 정승원도 점점 자신들이 어떻게 해야하는지 알아가고 있다. 덕분에 아주 편하다. 정선호도 축구를 이해하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담이지만, 최원권 코치는 지금 현역으로 돌아와도 충분할 정도다. 연습에서 붙어보고 놀랐다."

대구FC 츠바사. 산프레체 히로시마전

-아시아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일본 팀과 붙었는데, 감회가 남다를 것 같다.

"일본 팀과 붙는 것도, 일본에서 프로로서 축구를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었다. (일본에서 기사도 많이 나왔던데) 몇 개 읽었다. 사실 꽤 기뻤다. 무엇보다 가족들이 경기장에서 내 경기를 라이브로 볼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산프레체 히로시마와 경기를 할 때도 부모님이 오셨다. (폴란드엔 오신 적 없나) 아무래도 너무 멀다보니 오지 못했다. 대구는 가깝다. 구마모토와 직항으로 연결되어있기도 하다."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서 한 번만 더 이기면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되는데.

"기대가 된다. 나 스스로 경기장에서 실제로 뛰고 있지만 매 경기 매 순간 성장하는 느낌을 받는다. 젊은 선수들도 많다보니 그런 것 같다. 피부에 와닿는 성장세가 제법 크다."

-K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는 누구라고 생각하나.

"솔직히 쿠니모토(경남)다. 미드필더 입장에서 굉장히 까다로운 선수다. 상대를 짜증나게 만든다. 작년엔 내가 부상이어서 못 붙었고 이번 시즌에야 처음 붙어봤다. 정말 좋은 선수라고 생각했다 (한국인 중에는 없나) 상주의 14번(윤빛가람)이다. 재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시야도 넓고 킥도 정확했다. 상주의 김민우도 꼽고 싶다. 사실 개인적인 감사함이 있다. 상주와 처음 붙은 경기였다. 경기 전 김민우가 먼저 와서 일본어로 '한국 생활 어떻느냐'고 물어줬다. 경기 끝나고 고맙다고 말하려고 했더니 이미 숙소로 돌아갔더라. 소셜미디어(SNS)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김민우가 '나도 일본에서 외국인선수로 뛴 적이 있기 때문에 너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하더라. 인간적으로 굉장히 큰 감동을 느꼈다."

-한국을 찾았던 일본인 선수들 중 몇몇은 '일본인은 한국에서 꼭 뛰어봐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이 말에 동의하나.

"J리그에서만 뛴 선수들은 아마 J리그 쪽 클럽들이 좀 더 견실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선수를 위한 케어나 지원 등은 한국보다 더 나은 부분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해외에서 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물론 나는 J리그에서 뛰어본 적은 없지만, 한국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도 분명히 많다고 생각한다."

-다른 일본인선수에게 K리그는 추천할 만한 리그라고 생각하나.

"그 선수가 뭘 원하는지에 따라 다르지 않겠나. 돈이나 생활이나 여러 면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면 와 볼 가치가 있다. 스스로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 아닌가. (츠바사에겐 어떤가) 나에겐 가치가 있는 도전이었다. 내가 걸어왔던 길은 전부 의미가 있다. 한국에서 새로운 자극을 늘 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목표 그리고 앞으로의 축구선수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축구선수로서 좀 더 높은 수준의 축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늘 있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도 정말 좋은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나 스스로 더 성장해야한다. 국가대표가 되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축구를 잘하고 싶다. 현 상황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나 스스로가 대학에서 프로에도 못 갔던 선수였지 않나. 그런 선수가 해외 생활을 통해서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는 것도 꽤 재밌는 일이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더 큰 목표가 있나.

"당연히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더 성장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축구를 더 잘하고 싶다는 욕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 무엇보다 난 정말 축구가 좋고 앞으로 더 좋아하고 싶다."

-'축구가 좋다'는 그 말의 울림이 좋은 것 같다.

"4부리그 시절에 월급이 30만원 정도였다. 집과 점심 식사 정도가 제공되긴 했지만 적은 금액이다. 오프 시즌에 일본에 갈 돈조차 없었다. 레히아 구단스크에서 폴란드 2부 비제프 우치로 임대갔을 땐 비제프 우치가 파산당하는 일도 일어났다. 나는 계약상 월급 절반은 레히아 구단스크가 부담해줬기에 사정이 괜찮았지만 비제프 우치 소속 선수들은 석 달 정도 월급이 밀리곤 했다. 폴란드축구협회에서 지급 명령을 내렸는데, 사장이 이를 거부하면서 구단이 5부리그까지 떨어졌다. 원래 유럽축구연맹(UEFA) 챔피언스리그도 나가던 명문 팀이었다. 그런 일들을 겪어왔다."

-보통의 한국인이나 일본인들은 쉽게 경험하지 못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행복했다. 축구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 자체로 말이다. 날 원하는 팀이 있고, 거기서 축구를 하고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내겐 감사한 일이다. 지금도 즐겁지만, 그때도 마찬가지로 즐거웠다."

miggy@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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