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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프로골퍼 조현

조회수 2019. 5. 23. 12:14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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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함으로 다시 일어서다

고교시절 불꽃같은 타격을 선보이며 미래에 촉망받을 선수로 꼽혔던 조현. 건국대학교 졸업 후 실업야구팀 포스틸을 거쳐 프로구단인 LG 트윈스에 입단, 잠실야구장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는 심재학, 정현택, 안치용과 함께 LG 타선을 이끌었고 장타력을 앞세워 팀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동료들을 위한 조건 없는 희생이 그의 앞길에 걸림돌이 됐고, 실망감이 컸던 그는 결국 그라운드를 떠났다.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뒤 프로골퍼로 제2의 인생을 연 그가 다시 팬들 곁으로 돌아왔다. 야구선수 조현을 기억하는 LG팬들은 옛 추억을 회상하고 있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조현골프아카데미


#배명고의 5번 타자 조현

1992년 봉황대기에 참가한 배명고. 20년 만에 우승을 노리는 대결이기에 어느 시즌보다 비장했다. 하지만 사람들의 기대는 상대팀 경남고에 맞춰져 있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스스로 보여주면 어떻겠는가.

결승전이 진행될수록 경남고의 완승을 점쳤던 전문가들은 세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결과가 완전히 정반대로 흘렀기 때문이다. 경기 초반 김동주-노상진-장성국-조현-황재현으로 이어지는 배명고의 타선이 폭발하면서 판을 뒤집었다. 시작부터 경남고를 압박하며 그들이 가진 저력을 입증했다.

이들 가운데 유독 빛났던 선수가 있었으니, 바로 조현이다. 그는 봉황대기에서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했다. 호쾌한 타구를 빵빵 터뜨리며 홈런과 타점 부문 1위에 이름을 올렸다.

오랜만에 야구팬들에게 인사한다. ‘야구선수’ 특히 배명고의 중심타자 조현을 추억하는 팬들이 있다. 은퇴 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다.

이젠 프로골퍼인 전 야구선수 조현이다. (웃음) 은퇴 후 골프로 전향해 프로와 아카데미, 스포테인먼트 등 사업을 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야구를 골프에 접목시킨 훈련법을 개발해 지도하고 있다.

1992년은 배명고 역사에 남을 시즌이었다. 특히 봉황대기 준결승에서 장단 20안타를 때려 결승행 티켓을 따냈다. 그라운드로 뛰어나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던 것 같은데.

대회 때마다 항상 우승 후보팀으로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예선 통과도 못하고 떨어지곤 했다. 기대만큼 성적이 나지 않아 더 간절했다. 봉황대기에서는 극적으로 결승 진출을 확정지어 정말 기뻤다. 봉황대기 우승 후 황금사자기와 전국체전까지 정상에 올라 3관왕을 달성했다. 의미 있는 시즌이었다.

당시 전교생이 외야에서 응원전을 펼쳤다. 거의 축제의 현장이었는데, 그때의 열기를 기억하는가.

야구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 전부 그라운드로 뛰어 나와 얼싸 안고 기쁨을 나눴다.

그때를 회상하는 야구팬들은 불꽃같은 타격이었다고 말한다.

4경기 연속 홈런을 기록해 5경기 연속 홈런을 기대하는 팬들이 많았다. 3번째 타석인가? 당시 경남고 투수 손인호를 상대로 몸 쪽 공을 쳤는데 좌측으로 넘어가는 큼지막한 타구였다. 홈런을 예감하고 손을 번쩍 들고 1루로 달리면서 타구를 확인하는데 점점 좌측 폴대 쪽으로 날아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파울 홈런이었다. (웃음) 아쉬움은 남았지만 우승한 것으로 만족한다.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김동주, 이경필, 장성국에 비해 주목을 받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팀 우승을 견인한 선수는 본인 아니었는가.

나뿐만 아니라 그 당시 멤버는 대학팀들과 경기를 해도 지지 않을 만큼 최강이었다. 장타력과 정확성을 갖춘 김동주 선수가 1번 타자였다면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팀 우승을 이끈 원동력은 개개인의 실력을 갖춘 팀원 전체였다.

고교시절 마지막 추억으로 신일고의 동명이인 조현을 기억하는가. 야구팬들이 그와 종종 헛갈려했다.

잊을 수가 없다. 사람들이 신일고 조현과 항상 헷갈려 해서 많이 들었다.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고 프로에서도 활약했던 선수다. 정말 잘하는 친구였다. 아마 그 후배도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먼 길을 돌아 프로세계에 입성

고등학교 졸업 후 프로 구단으로 직행하지 않고 대학에 입학했다. 혼자만 생각하지 않고 친구들과의 동행을 선택했다. 조현은 고등학교를 끝으로 야구를 그만두게 될 것 같은 제22회 봉황대기 우승 멤버들을 챙겼다.

초등학교 때부터 야구만 했다. 할 줄 아는 건 야구밖에 없었다. 친구도 야구부원들밖에 없었다. 남중, 남고를 나왔다. 남자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도 야구만 했다면 생각만 해도 침침하다. 그래서 여학생과 친구가 될 수 있는 대학생활에 대한 로망도 있었다.

하지만 생각대로 흐르지 않았다. 하마터면 야구를 잃을 뻔했다. 명예로운 은퇴가 아닌 퇴출이었다. 그때부터인가. 일이 순탄하게 진행된다 싶으면 예상치 못한 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많은 구단이 눈여겨봤다. 입단 제의가 있었을 텐데, 왜 프로가 아닌 대학을 선택했는가.

당시에는 대졸자가 더 좋은 대우로 프로 구단에 입단했다. 그리고 캠퍼스 생활을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초등학생 때부터 운동만 해서 다양한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캠퍼스 생활에 대한 로망이 많았던 것 같은데, 그중에서도 무엇이 가장 하고 싶었는가? 잔디밭에 앉아 자장면 시켜 먹기?

뭐 그런 것도 있고. 보통 청춘 드라마에서 나오는 건 다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남자들만 만났으니까? (웃음) 여자한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몰랐고 데이트도 해보고 싶었다.

여러 대학도 이때다 하고 러브콜을 보냈을 것 같다. 건국대로 간 이유가 있는가.

노상진, 장성국과 함께 실력이 부족한 팀 내 선수 2명과 같이 가는 조건을 받아준다면 어느 대학이든 가겠다고 부모님들과 약속했다. 하지만 이 조건이 성사되지 않아 각자 따로따로 대학에 진학하게 됐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지금의 롯데백화점 스타시티점이 들어선 곳에 건국대 야구장이 있었다. 가끔 지나가면서 그때가 생각날 것 같다.

당연하다. 가끔 가는데 그때마다 야구했던 때를 떠올린다. 그 시절이 좋았다. 조금 성질을 죽였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웃음)


솔직히 친구 모임의 멤버들 가운데서는 가장 점잖은 것 같은데.

그렇긴 한데 약간 불도저 같은 성격이다. 욱하기도 하고 불의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대학을 잘 다니다가 실업팀으로 옮겼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3학년으로 올라가는 해였다. 숙소 생활을 해 토요일 오전 운동을 마치고 외박을 나갔다가 일요일 오후에 숙소로 집합해야 했다. 보통 인원 파악 후 쉬는데 내가 30분정도 늦게 들어갔다. 숙소로 들어서는데 동료와 후배들이 기합을 받고 있었다. 기합이 끝난 후 후배 한명이 야구를 그만 두겠다고 하는 것이다. 미안한 마음에 말리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결국 짐을 싸더라. 나 때문에 생긴 일이라 도저히 혼자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이 숙소를 이탈했다가 며칠 지나고 같이 복귀했다. 무단이탈을 했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고 스스로 야구를 그만 두게 됐다.

너무 성급했던 결정은 아니었는지. 어떻게 살아갈 생각이었는가.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그때 지인의 추천으로 모델라인(당시 대형 모델 에이전시) 38기를 수료하고 일을 시작했다. 당시 핫했던 김원준과 광고도 찍고 일을 하던 중 예상효 선배로부터 포스틸 야구단에 입단 테스트 받으러 오라는 제의를 받았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테스트를 받았는데 괜찮은 조건으로 합류하게 됐다. 이후 좋은 성적으로 프로 스카우트의 눈에 띄어 실업팀 선수로는 드물게 고액 계약금 연봉에 합의하고 드래프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난과 역경 끝에 드디어 프로 입단인가.

아니다. 드래프트가 끝나고 스포츠 신문을 보는데 지명한다고 했던 구단의 지명 선수 명단에 내가 없었다. 그리고 신문 아래에는 ‘포스틸 조현 지명권 철회’라고 쓰여 있었다. 너무 당황스러워 담당 스카우트에게 전화했더니 지명회의장에서 황당한 일이 있었다고 말해줬다.

듣는 나도 당황스러운데 당사자는 어땠겠는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프로팀으로 가려면 실업리그에서 2년을 뛰어야 했다. 그런데 나의 1년 기록이 사라진 것이다. 원하는 조건에 프로 입단이 무산됐다.


#선수협 최후의 20인

우여곡절 끝에 LG에 입단했다. 2군에서 3연타석 홈런을 터뜨리는 등 도루 1위, 타점 2위를 기록했다. 비록 1군은 아니었지만 육성군 MVP로 프로에서 이름을 알렸다.

나쁜 기억을 잊을 만하면 사건이 터졌다. 1999-2000년 프로야구는 선수협 파동으로 시끄러웠다. 당시 그 중심에 어김없이 조현이 있었다. 그는 최저연봉을 높이고 FA제도 개선을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답이 보이지 않자 처음 뜻을 모았던 동료 선수들이 하나둘씩 떠났다.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물러설 수 없었다. 고되고 외로웠던 싸움, 선수 간 마찰과 구단의 회유는 야구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게 만들었고 결국 그는 은퇴를 결심했다. 선수협의회 발족을 위해 마지막까지 힘쓴 최후의 멤버였지만 이젠 정말 끝이었다.

선수협의회 발족을 위해 최종까지 남았던 20명 가운데 한명이었다. 구단과 코칭스태프의 압력 때문에 많은 선수가 탈퇴했다.

당시 연봉이 적은 2군 선수는 최저연봉 1000만원에서 1500만원을 받았다. 출퇴근 기름값과 야구장비 또는 개인장비를 사고 나면 남는 게 없었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FA 자격을 취득할 수 있는 기간도 길었다. 다른 것보다 먼저 이 두 가지부터 바로 잡고 싶었다.

무엇이 끝까지 끈을 놓지 못하게 했는가.

요즘 프로야구 팬들은 ‘실력도 되지 않으면서 FA를 선언한 쓸모없는 선수들’이라고 비웃지만, 사실 FA는 선수들이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다. 스토브리그의 이슈 생산, 전력 보강 등 무시할 수 없는 요소다. 문제는 KBO의 FA 제도에 있다. 우리나라의 드래프트 제도는 리그의 재미를 위해 선수들의 직업 자유를 희생시키고 있다. 이러한 희생을 끊어주기 위해 FA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현행 FA 제도에는 선수들의 직업 선택에 대한 자유를 제한해 재미까지 망치고 있다.

많은 선수의 희생으로 선수협의회가 출범했다. 하지만 잦은 갈등으로 갈라섰다.

권익보호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꼭 필요했다. 그럼에도 당시 8개 구단 선수 대부분 자기 살겠다고 탈퇴했다. 힘을 뭉쳤더라면 희생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과 후배들이 더 많은 혜택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섰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가. 17년 야구인생 그것도 미래가 보장된 유망주였다. 이 일로 고생만 하고 야구를 그만두지 않았는가.

후회하지 않으려 무단히 노력했다. 훗날 성공한 나의 모습을 그리며 밤낮없이 연습과 공부를 병행해 이 자리까지 왔다. 그때 선수들의 희생으로 선수협회가 출범돼 지금 후배들이 혜택을 받고 있어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모든 것이 정리됐다. 선수협회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좋은 환경에서 운동할 수 있는 일에 동참한 것이고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 자기 혼자 살겠다고 탈퇴한 선수들 중 몇몇이 선수협회의 임원을 한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 자기 욕심을 채우려는 건지, 선수들의 부족한 환경을 개선하려는 건지 아직도 의문이다.

선수들이 미안하다는 표현은 했는가.

사과를 받을 일은 아니다. 오래 전 조인성 코치가 선수였을 때 팬미팅에 초대받아 간 적이 있다. 거기서 그 당시 탈퇴한 선수 중 한 명이 정말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여러 생각이 들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병규 코치와는 여전히 자주 본다. 둘도 없는 친구이지 않은가.

(이)병규가 은퇴하기 전에 자주 이야기를 나눴다. 고민이 많았던 병규에게 LG에서 뛰지 못할 바에는 다른 팀으로 가서 야구하는 것보다 차라리 LG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가끔 싸우기도 하고 또 아무 일 없는 듯 만난다. 병규한테 고마운 건 어디서든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나를 본인보다 더 야구를 잘했던 친구라고 소개한다.

회상해볼 때 언제가 가장 좋았는가. 혹은 돌아가고 싶은 때가 있는가.

미련은 없다. 단지 사건사고 없이 야구를 계속 해서 FA가 됐다면 나의 몸값은 얼마나 됐을까 생각해본 적은 있다.


#변해가는 시대에 발맞춰 연구하는 노력파

사람에게 그것도 가장 믿었던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생각에 평생 해온 야구를 그만 뒀다. 야구장에서 짐을 챙겨 나온 조현은 모든 장비를 불태웠다. 후에 조금이라도 미련이 생겨 더 큰 상처를 받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야구에서 보여줬던 파워를 이용할 수 있는 골프를 선택했다.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위해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국체육대학교 대학원에서 야구를 접목시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골프 훈련법을 연구하기도 했다. 무조건 훈련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는 방법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는 현재 골프와 관련된 다양한 사업을 하고 있다. 후배 양성을 위해 지원과 조언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야구선수들이 은퇴 후 골프선수로 전향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됐나.

은퇴를 결심하고 꼭 성공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몇날 며칠을 보냈다. 당시 27세였는데 그 나이에 공부해서 판검사가 될 수도 없고 대기업 취업도 안 되고 고민 끝에 프로골퍼가 되기로 결정했다. 체력 관리만 잘한다면 선수 생명도 길더라. 열심히 해 투어에서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장면을 모든 야구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골프로 전향 후 강도 높은 훈련을 했다고 들었다. 골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스윙 메카닉은 기본이고 유연성과 근력이 필요하다. 그중에서도 상하체를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과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코어, 클럽을 제어할 수 있는 악력이 중요하다. 또한 본인에 맞는 클럽 선택(헤드스피드에 맞는 샤프트 클럽헤드의 라이각 등)이 필요하고 멘탈(각성 수준 조절 능력과 프리샷 루틴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야구 스윙을 접목시킨 바디턴 드릴로 비거리를 늘리는 방법 등 본인만의 독특한 훈련을 만들었다고 들었다.

야구공의 축을 지킨 상태에서 바닥으로 던지는 동작과 글러브를 이용한 릴리즈 트레이닝을 개발했다. 이밖에도 배트를 이용한 바디 턴과 코킹 손목의 유연성 및 근력 트레이닝을 통한 헤드 스피드 증가도 비거리를 늘리는데 도움이 된다.

대학원에 진학한 것도 본인만의 훈련법을 만들기 위함이었던 것인가.

투어 우승을 꿈꾸고 달려왔는데 허리 부상으로 포기하게 돼 최고의 레슨 프로가 되는 것을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대충 노하우만 가지고는 최고의 레슨을 할 수 없었다. 수년간 골프 관련 메카닉과 피지컬, 클럽피팅, 멘탈 등을 공부했다. 그 시기에 대학원도 다니고 관련 자격증도 취득했다.


최근 야구를 그만 두고 골퍼로서 새 출발하려는 어린 선수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이들에게 조언해주고 싶은 말이 있는가.

절대 쉬운 길이 아니다. ‘살아있는 야구공을 쳤는데 가만히 있는 공을 못 치겠느냐’라는 생각과, 또 스윙 메카닉이 비슷해 쉽게 보고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정신으로는 프로골퍼가 되기 힘들다. 그럴 거면 그냥 즐기는 골프를 해라! 안일한 생각은 시간 낭비다.

그래도 골프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주겠는가.

모든 걸 내려놓고 올인해야 한다. 야구선수 시절에 했던 연습의 몇 배를 수년간 꾸준히 할 자신이 있다면 도전해라! 내가 도와주겠다.

현재 골프 아카데미와 매니지먼트를 비롯해 다양한 스포츠 마케팅 사업을 구축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가.

골프 아카데미 운영에 집중하면서 스포테인먼트 준비에 주력하고 있지만 가장 하고 싶은 일은 스포츠 인재 육성 지원이다. 모교인 배명중고 야구부에 지원을 하고 있는데 규모를 확대해서 어렵고 힘들게 운동하는 야구와 골프 인재 육성에 힘쓰겠다.

***

장래가 기대되는 선수로 꼽혔던 파워히터 유망주 조현. 지금 그의 손에는 방망이 대신 골프채가 쥐어있다. 프로 야구선수로서의 삶은 정리했지만, 사회인야구와 후배 양성 및 후원 등으로 야구와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렇다. 그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조현이었고, 여전히 야구인이었다.


더그아웃 매거진 97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9년 97호(5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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