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으면서 축구하는 '99년생이 왔다' [U-20 월드컵 첫 결승행]

루블린 | 황민국 기자 2019. 6. 13. 06:01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경향신문] ㆍU-20 남자 축구대표팀, FIFA 대회 사상 첫 결승행 ‘새 역사’

‘물세례 세리머니’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선수들이 12일 폴란드 루블린 스타디움에서 열린 FIFA 20세 이하 월드컵 4강전에서 에콰도르를 1-0으로 꺾고 사상 첫 결승 진출을 확정한 뒤 정정용 감독에게 물을 뿌리며 기뻐하고 있다. 루블린 | 연합뉴스

선수들, 승리 뒤 라커룸서 감독과 막춤 대결…축제 같은 ‘재미 축구’ 진지함 강조한 ‘한국 축구’ 전통과 결별…‘새 시대를 알리는 예고편’

선수들은 감독에게도 물을 뿌렸다. 환호하며 노래도 했다. 감독은 춤을 췄다. 리듬·박자 모두 무시한 ‘아저씨 춤’이었지만, 잠시라도 어린 선수들 앞에서 무게 잡느라 끓어오르는 감정을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았다. 불과 90분 전만 해도 전술을 이야기하던 딱딱한 공간은 젊은이들이 함성으로, 동작으로 소통하는 ‘클럽’처럼 변하고 있었다.

정정용 20세 이하(U-20) 축구대표팀 감독(50)은 12일 폴란드 루블린에서 열린 U-20 월드컵 4강전 에콰도르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한 뒤 라커룸에 모인 선수들이 일제히 자신의 이름을 외치자 골반을 흔드는 막춤으로 화답했다. 결승골의 주인공인 수비수 최준(20·연세대)은 취재진과 만나 “우리 감독님은 나처럼 춤을 못 추지만, 10점 만점에 6점은 주고 싶다. 오늘은 특별하니까”라며 활짝 웃었다.

이날 외부로 공개된 감독과 선수들의 결승행 세리머니는 한국 축구가 새 시대로 접어들고 있는 것을 알리는 예고편 같았다. 승리를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우고, 집중력과 진지함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한국 축구의 오랜 전통과 교차했다.

이번 대표팀 엔트리에는 1999년생이 주축을 이뤘다. 이들은 큰 대회에 참가할 때마다 쏟아지는 부담에 웅크리기보다는 축제를 즐기는 태도로 어깨를 펴고 마음껏 뛰놀고 있다. 예컨대 라커룸과 그라운드에선 흥겨운 음악 속에 몸을 풀고, 경기가 시작되면 그 누구보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뛴다. 정 감독은 “외부에서 볼 때는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난 문제없다고 본다”며 “그저 자기들끼리 (흥을) 표출하는 것이다. 그래도 자율 속에 지키는 규칙은 확실하다”고 강조했다.

2002 월드컵 후 유소년 지원 늘려 2008년 K리그 유스 시스템 의무화 정정용호 21명 중 19명이 거쳐가

스스로를 옥죄는 긴장이 없기에 세계적인 강호들을 만나도 위축되는 일이 없다. 포르투갈과의 첫 경기에서 0-1로 패배했지만, 낙심하지 않았다. 이후 3경기를 거짓말처럼 승리하며 8강에 올랐다. 운명과도 같았던 세네갈과의 8강전에서 전반 37분 선제골을 내준 뒤에도 고개를 숙이는 대신 다 같이 모여 뒤집기를 다짐했다. 선수들은 그간 가장 많이 훈련했고 자신감도 보였던 역습과 절묘한 세트피스로 그 다짐을 지켜냈다.

잔혹한 승부차기에선 1~2번 키커가 잇달아 실축하는 어려운 상황에 휩싸였지만 남은 선수들의 승부사 같은 대담한 코스 선정과 춤추듯 몸을 날린 골키퍼 이광연(20·강원)의 선방쇼로 어느새 결과를 바꿔놨다.

이광연은 골문에서 누구보다 유연한 표정과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과거 월드컵에서 결정적 순간이면, 몸이 굳은 듯 실수가 잦았던 골키퍼들과 달리 ‘슈퍼 세이브’를 연이어 펼쳐내고 있다. 에콰도르와의 준결승에서도 한국은 전반 39분에 터진 최준의 선제골로 1-0 리드를 잡았지만 후반 들어 에콰도르의 공세에 시달렸다. 이에 이광연은 후반 26분 팔라시오스 에스피노사의 미사일 슛을 몸을 던져 막아내더니 후반 추가시간 4분여가 흐른 시점에는 크로스를 받은 레오나르도 캄파니의 헤딩이 골문 구석을 향하자 몸을 날려 손으로 쳐냈다.

사실, 이들은 대표팀을 거쳐간 선배 선수들과는 성장 과정이 다르다. 말처럼 쉽지 않은 ‘승부를 즐기는’ 일을 어린 시절부터 새 시스템 속에서 몸으로 익혀왔다.

한국 축구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이후 유소년 축구에 대한 관심과 지원을 늘렸다. 포항 스틸러스가 2003년 K리그 최초로 클럽 유스 시스템을 도입한 뒤로 2008년부터 K리그 전 구단의 유소년 축구시스템 의무화가 추진됐다. K리그 모든 구단들은 12·15·18세의 연령별 유스팀을 보유하고 있다. 2009년부터 주말리그제를 만들어 학원 축구 선수들이 공부하면서 상시적인 리그 경기를 치러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클럽 축구 역시 리그제로 만들었다. 토너먼트로 승부부터 가려야 했던 전과는 달리 기술 향상에 우선을 둬 공 차는 재미를 느끼며 기량을 키우는 터전을 마련했다. 또 될성부른 유망주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을 2014년부터 운영하고 있다.

현재 정정용호 선수들 대부분은 프로 산하 출신이거나 협회의 ‘골든 에이지’ 프로그램을 통해 성장했다. 이번 대표팀 엔트리(21명)는 K리그 선수 15명, 해외파 4명, 대학팀 소속 2명으로 구성됐다. 어린 시절부터 해외 생활을 했던 이강인(발렌시아), 최민수(함부르크)를 제외하면 한국 축구의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밟은 선수가 19명이다. 이 중 12명은 K리그 유스팀 출신이다.

루블린 | 황민국 기자 stylelomo@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