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DUGOUT Interview] 휘문고등학교 최동수 인스트럭터

대단한미디어 입력 2019.07.17.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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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가 기억하는 '대기만성의 표본'

프로선수로서 20년, 코치로서 5년. 떠나는 날을 준비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25년 동안 입었던 유니폼을 벗었을 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했다. 조직에서 나옴으로써 안정적인 생활을 보장받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과 동시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사회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유대관계가 펼쳐지면서 기분 좋게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다. 생각을 바꾸니 마음이 편안해졌고 또 다른 도전이라고 생각하니 앞날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Photographer 황미노 Editor 표권향 Location 위드인라운지




#최동수의 또 다른 이름 LG

2013년 10월 5일 시즌 홈 마지막 경기를 마친 후 최동수의 은퇴식이 열렸다. 이날 LG에는 어느 때보다 집중력이 요구되는 경기였다. 당시 넥센과 정규리그 2위를 두고 펼치는 두산과의 잠실 라이벌전이었다. 초반 두산에 밀리던 LG, 한화를 압박하는 넥센의 치열한 신경전이 서울과 대전을 오갔다. 최동수의 간절함이 하늘에 닿은 것일까. 후반으로 넘어가자 LG가 두산을 밀어붙였다. 반면 넥센은 역전을 당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결과는 LG가 최종 2위를 결정지어 플레이오프로 직행했다. 경기 후 축제 속에서 은퇴식이 진행됐다.

그가 꿈꿨던 가장 큰 바람도 이뤘다. 노장 선수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며 ‘한국의 프랑코가 되겠다’는 목표를 43세에 달성했다. 화려하진 않았지만 LG를 꾸준히 지켰던 ‘베테랑’ 최동수는 그렇게 팬들의 뜨거운 환호를 받으며 그라운드와 작별했다.

6년 전이지만, 은퇴식을 기억하는가. 오랜만에 포수였을 때 사진도 봤다.

재밌는 일이 있었다. 그날 새벽 4시 반쯤 일어나졌다. 거울을 딱 봤는데 늙은 놈이 하나 앉아있더라. 흰 머리 삐끗, 흰 수염 삐끗! 그런데 은퇴식의 첫 사진이 24살에 포수를 보던 사진이 나온 것이다. 어우~ 때깔 좋더라고! 내가 새벽에 느꼈던 것과 젊었을 때 사진 속 나를 보는 감정이 팬들도 똑같이 느꼈나 보다. 오우~ 탱글탱글하고! 새벽에는 웬 늙은 놈이 있었는데 젊은 놈이 딱 나오니까 감회가 새로웠다.

그동안의 노고에 박수를 받았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꽤 짜릿했을 것 같다.

김기태 감독님이 은퇴식을 처음에 하는 것보다 게임 끝난 뒤 하자고 말씀하셨다. 어차피 4강권에 들어갔고 마지막 가는 길을 조금 더 환대받게 해주려는 마음이셨다. 사람들이 그러더라.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은퇴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너무나 잊을 수 없는 은퇴식이었다. 어쩌다 한 번씩 은퇴식 때 타석에 나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스럽냐고 물어본다. 전혀~ 그 이상의 축복을 받으면서 끝냈기 때문이다. 기억에는 남겠지만 한 타석 안 나간다고, 거기서 홈런을 친다고 해서 선수 생활이 연장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은퇴식에서의 엄청난 환호성이 더 기억에 남는다. 내가 뭐라고… 슈퍼스타도 아닌데. (웃음)

은퇴를 앞두고 많은 이들에게 조언을 구했을 텐데, 누구를 만났는가.

(이)병규하고도 이야기했고… 얼마 전에도 통화했다. 병규는 아주 그냥 꼬치꼬치 캐묻더라. 좋아? 뭐해? 자기가 기자인 줄 아나 봐! 내 사생활을 계속 묻더라. 어떻게 지내는지, 뭐 하는지. (웃음) 병규, (박)용택이는 후배지만 배울 점이 많은 친한 녀석들이다. 일본에 있는 (이)진영이도, (정)성훈이도 그렇고. 타자 4명이 나를 정말 잘 챙겨줬다. 원정 가면 샤워만 안 시켜줬을 뿐이지 협동해서 굉장히 잘 챙겨줬다. 정말 고맙다. 와이프와 어머니, 아버님, 친형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결정적인 건 다른 구단에 가서 더 해야 하지 않겠냐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은퇴를 결심했다. 기회가 없었던 것인가.

내가 좋아하는 유니폼을 입고 야구하고 싶었다. 또 다른 구단으로 떠나는 것보다 여기서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한 달 동안 방황 아닌 방황을 했다. 도착지를 정해서 운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6시간씩 달렸다.

그래도 현장에서 이루고픈 꿈은 이뤘다. 줄무늬 유니폼으로 시작해서 마침표까지 찍었다.

LG에 대한 고마움은 항상 있다. 20년간 선수 생활을 했는데, LG로 시작해서 LG로 끝났다는 자체에 감사하고 자부심을 느낀다. SK에 가서 슬펐던 것이 아니라 여기를 떠난다는 것이 슬펐다. 지금도 마찬가지 이지만 LG를 먼저 생각하고 LG가 어떻게 하고 있다는 것을 계속 접하고 있다. 이젠 내 삶에 가장 익숙한 이름이다.

SK로의 트레이드가 없었다면 원 팀 멤버로 남을 수 있을 것이다.

18년을 있었으니까. 요즘 말하는 원 팀 출신은 아니지만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줄무늬 유니폼 이것이… 게임 전 유니폼을 입을 때 정장을 입는 기분으로 하나하나 신경 써서 입었다. 막 후루룩 입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두고 다림질하고 웃옷과 바지가 일직 선상이 되게 했다. 마음에서 우러나서 엄청 디테일하고 깔끔하게 입었다. 장수가 전쟁터에 나갈 때 갑옷을 입는 마음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전투 나갈 때 오늘도 속으로 기도하는 마음으로 유니폼을 입고 나갔다.

LG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

그땐 내 전부였다. 선수일 땐 선수대로, 코치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다. 그곳의 모든 것들에 내 손이 닿았다. 청춘이었고. 또 재밌는 건 구리 숙소 1호가 나였다. 첫해에 거기에서 고사를 지냈고 고사를 지내고 나왔다. 이천도 5년 동안 내 손때 묻은 것들이 매우 많다. 개인 역사다.




#세상을 등질 때 타오른 불꽃

통산 1293경기 출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지만 25년 경력으로 보면 뭔가 아쉽다. 최동수의 야구 인생은 고난의 길이었다. LG 신바람 시대를 열었던 입단 동기 유지현, 김동수, 서용빈과 달리 서른이 될 때까지 연봉 3000만원에 머문 2군 선수였다. 15년 차였던 2008년에서야 억대 연봉자 대열에 합류했지만 스타플레이어로는 주목받지 못했다. 게다가 골든글러브의 김동수, ‘안경 쓴 포수’ 김정민, ‘앉아 쏴’ 조인성 등에 밀려 원래 포지션이었던 포수 마스크를 제대로 써 본 적도 없다.

하지만 LG팬이라면 누구나 추억하는 이름이다. 전형적인 노력파 선수다. 피를 토한다는 김성근 전 감독의 지옥 훈련을 견뎌낸 몇 안 되는 선수 가운데서도 1등을 차지했다. 김성근 전 감독이 ‘그만하고 좀 쉬라’고 말릴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한 타석을 소중히 여겼던 최동수였기에 팬들 가슴 속에 오랫동안 기억되는지도 모른다.

입단한 1994년은 그야말로 LG 신바람 돌풍을 일으켰던 시즌이었다. 하지만 2군에 있어서 아쉬웠겠다.

아쉬웠다기보다 꿈만 꿨다. 나의 능력이 모자라니까 2군에 있었던 것이고, 부럽다는 생각은 했다. 난 언제 저 자리에 있을까, 그러려면 노력을 더 해야겠지 라며 말이다. 내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모자랐다.

유지현, 김동수, 서용빈과 동기다. 같이 구리 숙소를 사용했는데, 동기끼리 관계는 어떠했는가.

그 친구들은 야간경기를 끝내고 밤 11~12시쯤 숙소에 돌아왔다. 우리는 아침부터 운동하기 때문에 일찍 잠들어 대화할 시간이 많지 않았다. 한 번씩 만나서 ‘잘해’라며 안부나 전하는 정도였다. 유지현 코치와 친해서 밖에서도 자주 보는데 그땐 원정경기 때문에 지방에 가는 날도 많았기에 마주칠 일은 거의 없었다.

겉으로 티는 안 내도 오랫동안 2군에 있었기에 답답했을 것 같다.

많이 답답했다. 아마 서른이었을 때 일이다. 스스로 유니폼을 반납한 적도 있다. 그때 연봉이 3천만 원이었는데 나가서 이 정도 못 벌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가.

2군 경기를 끝내고 5시까지 엑스트라를 하고 들어가려고 하는데 1군에 콜업됐다. 씻기만 하고 바로 잠실로 갔다. 그날 경기 후 바로 또 2군으로 가라더라. 4시간 동안 1군에 등록됐던 것이다. 끝나고 되게 좌절감이 오더라. 샤워하면서 계속 관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KIA 김선진 코치님이 밥 먹으러 가자고 부르셨다. 술을 못 마시는데 그날따라 소주 한 잔씩 하다가 많이 마셨던 기억이 난다. 다음날 깨보니 집에도 안 가고 숙박업소에서 혼자 널브러져서 자고 있더라.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지만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2군은 오전 9시 30분에 시작하는데, 그날 8시에 도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샤워하고 유니폼 하나를 예쁘게 잘 개서 2군 감독님에게 “감독님, 여기가 끝인가 봅니다. 야구선수 끝내겠습니다”라며 반납했다. 그 당시 감독님이 연천 미라클 김인식 감독님이신데 눈물을 흘리시면서 ‘너 왜 그러냐’며 말리셨다. ‘하루도 아니고 몇 시간 만에 2군에 내려오는 이런 생활이 지겹다. 밖에서 벌면서 다른 데 신경 쓰겠다’며 고집부렸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계속 설득하셨고 대화 끝에 남게 됐다. 그해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다.

김성근 전 감독과의 훈훈한 일화가 많다. 김 감독과 케미가 잘 맞았나 보다.

성격 때문인지 감독님의 운동을 다 따라 했는데 살이 안 빠지더라. 진짜 잘 먹었는데 말이다. 배가 많이 고팠다. (체력 소비가 심해서인가.) 밥맛이 없고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밥맛이 좋았다. 인간의 본능이라고 할까? 안 먹으면 안 된다는 처절함? (웃음)




#하늘이 감동한 ‘대기만성’ 노장선수

최동수는 김성근 전 감독을 만나고 그동안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느꼈다. 어렸을 때부터 잠들기 전 매일 무조건 방망이를 1천 번씩 돌리자고 자신과 약속했던 그였지만, 김성근 전 감독을 만난 후 ‘왜 2~3000개 할 생각은 안 했을까, 모자라면서 왜 더 할 생각은 안 했냐’며 자책했다. 1000개로 만족했던 자신을 스스로 꾸짖으며 후회했다.

당시 김성근 전 감독의 특타는 1일 5000번 스윙이었다. 말 그대로 입에 단내가 날 때까지 방망이를 휘둘러야 하는 지옥훈련이다. 이는 타자 전원에게 주문된 의무이자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 지독한 과정을 소화한 선수는 단 한 명, 최동수뿐이었다.

주위에서 혀를 내두를 정도로 독했다. 5000번을 휘두르는 동안 방망이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손이 굳어 펴지지 않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오죽했으면 특타로 인해 굽어버린 손을 김성근 전 감독이 펴줬을 정도였다. 그의 성실함은 시간이 지나도 변함없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성근 전 감독은 SK 감독 부임 후 최동수란 특별 카드를 고집했고 LG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최동수 영입 작전’을 펼쳤다. 최동수의 못다 이룬 꿈에 도움을 주고 싶었을지도.

최동수를 노력파, 근성의 사나이로 기억한다. 김성근 전 감독이 유일하게 인정한 연습벌레였다.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 자체가 조금 과장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노력했지만 그만큼 노력한 친구들이 많다. 나는 재능이 없어서 노력했던 것뿐이다. 살아남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 보니 운동량이 많았다. 감독님이 뭔가를 시키면 살아남기 위해 더 했다.

매일 5000번씩 스윙했다. 훈련이 끝나면 손이 굽어 혼자 펼 수 없었고 토하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마디마디가 다 아팠다. 내 스스로도 힘들었던 것도 있었지만 너무 아파서 못 폈던 것이었다. (물집도 많이 잡혔겠다.) 물집이 생긴 것보다 피가 많이 났다. 까진 데 또 까지고, 찢어지고 또 찢어지니까 나중엔 딱딱해져서 굳어버렸다. 그전에는 계속 유니폼 바지가 피바다가 된 적이 많았다. 테이핑하고 장갑을 꼈지만 그 사이사이로 피가 계속 떨어졌다. 손에 물을 묻히지 못하니까 세수도 못 했다. (약은?) 약 발라도 다음날 또 그러니까.

솔직히 김성근 전 감독의 훈련법에 대해 말이 많았다. 제3자인 나도 괴성을 지르는 선수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웠다. 이러한 훈련에 불만은 없었는가.

전혀 없었다. 불만이라기보다 그게 맞다고 생각했다. 기존에 기술이 좋은 친구들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분명히 잘할 수 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커리어나 운동 방법 등을 보면 재능 있는 선수들은 계속 유지될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선수들은 그저 그런 선수로 남기보단 뭔가 스스로 노력해서 깨뜨리는 방법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성근 전 감독의 스타일이 최근 현장 훈련 분위기와 많이 다른 건 사실이다.

요즘 추세는 운동 시간보다 얼마만큼 집중해서 효과적으로 운동하는가를 강조한다. 나 또한 내가 코치하면서 그것을 바랐다. 하지만 스스로 하는 건 아직 많이 모자라다. 안 되면 환경 탓을 하는 선수들도 많고, 기회를 안 주니까, 2군에 있으니까, ‘1군에 가면 열심히 할 수 있는데, 잘할 수 있을 텐데’라며 약간 변명이 많아지더라. 자기 노력 없이 얻으려고만 하는 욕심만 쌓이는 것 같다. 어디에 있든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때까지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성근 전 감독이 그동안의 꾸준함 때문에 기용했던 것인가.

내 능력치로 보면 그것 아니었을까? 다른 사람이 보면 도전이었을 것이다. 그게 아닌 내 능력치로 게임에 넣었다면 언론이나 주위에서 많이 욕했겠지. ‘왜 최동수를 써’ 이렇게! (그래도 기대에 부응했다.) 다행스럽게 조금 실타래가 풀리는 느낌을 처음 받았다. 나에게도 봄날이 오는구나 싶었다.

무언가에 빠지면 ‘무식하게 ~한다’하지 않는가. 야구 하나만 바라보고 무식하게 운동만 한 것 같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야구해서 프로 왔지 그런데 별 볼일 없었지. 그래도 이름 하나 남기고 싶었다. 내가 주전이 되고 싶었다. 맨날 2군에서 지내는 것보다 주전이 돼서 내 이름을 알리고 성취욕을 맛보고 싶었다.




#팔뚝옹의 파워, 걸리면 죽는다

20년이면 신생아가 성인으로 성장한 시간이다. 최동수는 이 긴 여정을 LG와 함께했다. 연차에 비해 경력은 다소 미약했지만, 남들이 못 해본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2009년 SK와의 ‘512대첩’을 빼놓을 수 없다. 당시 1위였던 SK와 2위 LG의 막장 경기로 말이 많았지만 볼거리도 많아 화제가 됐다. 특히 최동수의 등판을 꼽을 수 있다.

연장 12회 초에만 6실점 한 우규민이 2사 2루 상황에서 상대 타자 모창민을 맞춰 퇴장당했다. LG는 이미 불펜투수를 모두 등판시켜 선발요원 심수창만이 남아있었다. 포수 김정민까지 좌익수로 나가있는 상황, LG 더그아웃은 최동수를 마운드에 올렸다.

이미 분위기는 SK로 넘어간 상황, 상대 타자는 당시 4연타석 홈런을 때린 박경완이었다. 그의 등장은 누구도 기대하지 않은 등판이었다. 하지만 최동수의 공 2개가 이날 경기의 최대 이야깃거리였다. 초구 130km/h 직구를 포수 미트에 그대로 꽂았다. 최동수는 김재박에 이어 KBO 통산 2번째로 포수, 내야수, 투수를 경험한 선수로 기록됐다. LG로 인해 최동수가 주목받은 것이 아니라, ‘미스터 제로’ 최동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512대첩’을 기억하는가. 당시 박경완을 2구 만에 2루수 뜬공으로 잡아냈다. 당시 박경완은 “차마 제대로 칠 수 없었다. 그냥 가만히 서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대충 휘둘러서 아웃됐다”고 말했다.

아니 그건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볼 끝이 좋아서 밀린 거지! (이진영이 오승환인 줄 알았다며 돌직구라고 표현했다.) 그러니까 경완이가 밀린 거라니까! 아니 자기 기록인데 왜 억지로 쳐. 기록에 남는 건데. 그해 4연타석 홈런을 친 선수인데. 엄청 잘 칠 때였다. 그러나 나에게 아웃 당한 유일한 타자 박경완! (웃음)

힘이 세서 그런 묵직한 공을 던질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삼진 당했다고 자신에게 화가 나서 방망이를 두 동강이 냈다.

지금 휘문고 인스트럭터를 하고 있다. 어린 선수들이 안 믿길래 영상을 보여주면서 ‘자 봤지?’ 했다. (이제 선수들이 말을 잘 듣겠다.) 말 잘 듣는다. 너희 허리를 두둑~ 얘들이 전부 이게 어떻게 부러지느냐, 이게 왜 부러지냐고 하더라. 그래서 ‘이게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면 부러져’라고 말했다. (웃음)

타고난 체력도 뒷받침이 됐을 것 같다.

그렇게 운동을 했지만 안 아팠다. 딱 한 번 시즌 중에 오른쪽 옆구리 근육이 찢어진 것 빼곤 마흔살이 될 때까지 아파서 쉬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이것도 축복받은 것 같다. 어떻게 보면 강철 체력이고. (웃음) 솔직히 나도 힘들어서 한 번씩 아프다고 할 수도 있었는데 그 자신이 안 생겼다. 안 아픈데 아프다고 할 수 없었다.

훈련량이 많기 때문에 체력소비도 컸을 텐데. 사실 나이도 무시할 수 없는데 어떻게 이겨냈는가.

SK 갔을 땐 오히려 하루하루가 더 즐거웠다. 어렸을 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하니까 버텼던 것이다. 훈련을 즐기니까 버텨지더라. 선수들이 안 힘드냐고 묻기도 했다. 전지훈련 갔을 때 매일 혼자 버스를 타고 야구장에 나가 5시간 동안 특타를 했다. 그런데 너무 재미있어 가능했다.




#아마추어의 손을 잡은 조언

은퇴하면서 그가 결심한 건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김영직 감독의 부름을 받아 올해 휘문고의 인스트럭터로 나선다. 동시에 엘리트 야구를 위한 아카데미를 준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여러 곳을 뛰어 다니며 다양하게 조언을 구하고 공부하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최동수는 기술보다 정신적 훈련에 힘쓰겠다고 지도방향을 잡았다. 기능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것. 어떻게 마음을 먹고 생각하며 생활하느냐에 따라 실력차가 난다고 설명했다. 특히 사춘기와 진로 걱정으로 예민한 선수들의 심리를 잡아주겠다는 각오다. 단, 노력과 용기를 요구했다. 누구나 하는 노력보다 감정 기복으로 인해 떨어지는 자신감은 스스로 즐겁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환경이 즐겁지 않더라도 마인드를 바꾸라는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으로 지루해하는 선수들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지루하다고 하면 (집에 가라?) 아니 아니, 집에 가라가 아니다! 한 번씩 이야기해야지. 힘들어하면 3박스 쌓아 놓고 ‘이거 치고 프로 갈래, 안 치고 아무 데도 못 갈래?’라고 하면 전부 이거 치고 프로 가려고 한다. 이제껏 한 명도 빠짐없이! 뭔가 목표의식이 생기면 힘이 난다. 그 목표의식을 심어줘야 한다.




지도자의 최대 관심은 훌륭한 선수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야구하는 어린 선수들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한다.

누구나 열심히 한다. 누구나 목표의식이 있다. 목표의식을 남기지 말라. 환상으로만 목표를 잡지 말고 진짜 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목표가 생겼다면 거침없이 해야 한다. 입으로만 노력한다는 말은 누구나 한다. 매일 똑같이 야구하고 운동한다. 똑같이 해서는 이길 수 없다. 자기한테 투자해라. 다음날 학교 가는 것 누구나 피곤하다. 회사원들은 퇴근할 때까지 아니 외적으로 야근까지 한다. 누구나 힘든 삶이지만 포기하지 않고 경주마처럼 달려간다. 항상 기준의 잣대를 놓고 옆은 보지도 말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한다.


더그아웃 매거진 99호 표지

위 기사는 더그아웃 매거진 2019년 99호(7월 호)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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