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야구노트] 이승엽은 정말 사인에 인색한가, 진실은
"희소성 떨어져" 발언 비난 이어져
팔기 위한 사인 요청엔 과민 반응
정중히 해달라면 기꺼이 해줄 것
2007년 10월 29일, 이승엽은 인천에서 한국시리즈 6차전을 관전하다가 푸드코트에서 분식을 먹었다. 당시 수술받은 왼손에 깁스한 상태였다. 불편하게 식사하는 그에게 몇몇 팬이 집요하게 사인을 요청했다. 오른손으로 몇 개를 한 이승엽은 “야구를 봐야 하니까 식사부터 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말했다.
2017년 은퇴 뒤에도 이승엽은 언제나, 어디서나 사인 요청을 받는다. 만 21세에 홈런왕(1997년 32개)에 올랐고, 23세부터 ‘국민타자’로 불린 그는 한·일 통산 626홈런을 때리는 동안 십수만 번 사인했다. 그런 그에게 ‘비난의 꼬리표’가 붙었다. 사인을 잘 안 해준다는 것이다. 수년 전부터 인터넷에서 그런 말이 돌았다. 이젠 적지 않은 사람이 진실로 받아들인다.
인터넷에선 그에게 사인을 요청했다가 “저리 가라, XX야”라고 욕설을 들었다는 한 소년의 경험담이 퍼졌다. ‘이승엽은 팬을 무시하고 사인을 해주지 않는다’는 얘기는 두 사례가 복합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엽은 평소 팬 서비스가 좋은 편이라, 사실 이런 얘기는 잘 믿기지 않는다. 그에게 직접 물어봤다. 그는 “욕을 했다는 시기가 내 스무 살(1996년 추정) 때라고 한다. 정말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런 말을 했다면 그분께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소년의 말이 사실일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더 있을 수도 있다. 방송에서 ‘희소성’을 언급한 건 틀림없다. 그렇다고 ‘이승엽이 팬을 하찮게 생각한다’고 잘라 말할 수 있을까. 문제의 방송만 봐도 답을 알 수 있다. 방송에서 이승엽은 “(사인은) 어린이들에게는 해주려 한다. 소장용으로 사인과 함께 이름을 써달라는 분들에게도 해드린다. (판매 의도가 있어 보이는) 다른 분들에게는 잘 안 해드린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승엽은 동료들이 탄 구단 버스를 놓치는 경우가 잦았다. 구장 밖으로 나서면 수백 명의 팬이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모자를 뺏기고, 옷을 찢기는 일이 다반사였다. 구단 직원 자동차로 뒤늦게 이동하곤 했다. 그는 “그땐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그런데 오랜 기간 그런 일이 반복되고, 정도도 심해지다 보니 힘들었던 게 사실”이라며 “사과가 변명처럼 들리는 분도 있을 것이다. 더 신중하고, 더 겸손하라는 뜻으로 새기겠다”고 말했다.
류현진(32·LA 다저스)도 비슷한 곤욕을 치렀다. 스프링캠프에서 사인 요청을 거부하고 뛰어가는 모습이 화면이 잡혔다. 평소 팬 서비스가 좋은 류현진은 장난 같던 이 ‘한 장면’ 때문에 수년간 비난에 시달렸다.
팬 덕분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건 선수들도 다 안다. 다만 ‘선수’가 아닌 ‘사람’으로서 그들도 지치고 힘들 때가 있다. 미국·일본과 달리, 선수와 팬 동선이 많이 겹치는 한국에서는 여러 일이 생기고, 그만큼 오해도 많다. 오늘 길을 가다 우연히 이승엽을 만난다면, 정중히 사인을 요청하시라. 웬만하면 그는 웃는 얼굴로 기꺼이 해줄 것이다.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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