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경기장 남·북대결..꿈의 승부 아닌, '지옥의 원정'이다

김현기 2019. 9. 26.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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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호가 북한전을 치르게 된 평양 김일성경기장. 평양 | 김현기기자

[스포츠서울 김현기기자]김일성경기장에서 웃은 팀이 없다.

북한축구협회가 내달 15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H조 남·북대결을 당초 공지한 평양 김일성경기장 개최로 못 박았다. 11~12년 전 남아공 월드컵 3차 및 최종예선처럼 중국에서 치를 확률이 아예 사라진 셈이다. 이에 따라 벤투호도 다른 변수를 신경쓰지 않고 남자축구 사상 첫 월드컵 예선 평양 원정에 집중할 수 있게 됐다. 정치·사회적으론 이번 대회 성사에 거는 기대가 꽤 크다. 선수단은 물론 기자단이나 응원단 구성 등에 따라 잠시 소강상태인 남·북 교류가 재개되지 않을까란 희망 때문이다. 스포츠는 스포츠다. 결국 이번 경기의 주체는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축구대표팀으로, 벤투호는 내년 가을부터 열리는 최종예선 진출을 위해선 평양 원정을 반드시 이겨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10년 넘게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자축구 A매치에서 홈팀을 이긴 곳이 없어 한국 역시 방심할 상황이 아니다. 평양에서의 90분은 ‘꿈의 승부’가 아닌 살아돌아와야 하는 ‘지옥의 원정’이다.

김일성경기장은 단순한 운동장이 아니라 북한 역사에도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곳이다. 김일성이 러시아에서 돌아와 군중 연설을 가장 먼저 한 곳이란 점 때문에 평양운동장에서 지난 1982년 김일성경기장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국내엔 1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능라도의 ‘5월1일 경기장’이 유명하지만 축구에서만큼은 ‘북한 축구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김일성경기장이 자주 활용된다. 특히 이 곳에서 북한대표팀이 기록한 압도적인 성과를 무시할 수 없다. 북한은 아시아 무대에서도 톱클래스로 보긴 어렵다. 성적이 좋을 때면 아시아 10위권이다. 최근엔 경기력이 떨어져 지난 1월 UAE 아시안컵에서 24개국 중 꼴찌를 했다. 김일성경기장에서만큼은 다르다. 지난 2009년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에선 중동 최강 사우디아라비아를 1-0으로 이겼고, 2011년 브라질 월드컵 2차예선에선 아시아 최고 수준의 일본을 불러 적극적인 몸싸움 끝 1-0 승리를 챙겼다. 2015년엔 중앙아시아 터줏대감 우즈베키스탄을 맞아 전반에만 4골을 퍼부은 끝에 4-2로 압승했다. 지난 5일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2차예선 첫 경기에선 레바논을 2-0으로 완파했다. 1월 아시안컵에선 레바논이 4-1 대승을 거뒀으나 평양에선 달랐다. 북한이 시종일관 상대를 제압한 끝에 두 골 차로 웃었다. 2005년 3월 독일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이란에 0-2로 진 것이 ‘북한 축구의 성지’에서 나온 가장 최근 패배다. 이 때 북한이 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몇몇 관중이 그라운드에 난입, 북한축구협회가 징계를 받는 해프닝도 있었다.

북한의 김일성경기장 ‘14년 무패 기록’을 깨기 위해 벤투호가 달려간다. 김일성경기장은 사실 규모가 압도적인 대형 경기장은 아니다. 꽉 들어차면 4만명이 앉을 수 있는 중형급 스타디움이다. 하지만 만원 관중이 올 경우, 원정팀에 묘한 분위기를 전달한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육상 트랙이 깔린 종합운동장이지만 한국의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이나 대구스타디움처럼 그라운드가 조그맣게 보이는 메머드급이 아니라, 그라운드와 관중석이 가까운 스타일이다. 2년 전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 평양 원정을 다녀온 본지 취재진 경험에 따르면 한국의 고양종합운동장이나 울산종합운동장과 비슷하다. 아담하면서도 압축된 느낌을 준다. 여기에 모든 관중이 빠짐 없이 금색이나 은색 응원 도구를 들고 일사불란하게 응원가를 외치면 상대팀이 커뮤니케이션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시끄럽다. 북한 선수들의 자신감도 빼놓을 수 없다. 홈에서의 북한대표팀 플레이는 보다 거칠고, 적극적이다. 일본도 그런 북한의 저돌적인 축구에 당황하다가 한 골을 얻어맞고 귀국했다. 월드컵 예선을 치르는 경기장 중 보기드문 인조잔디도 변수다. 프로 생활하면서 인조잔디를 거의 접하지 않은 태극전사들 입장에선 적응과 부상 등 여러 위험을 이겨내야 한다.

이날 경기는 H조 초반 판도를 가늠할 ‘빅매치’로 꼽힌다. 한국은 북한전 앞두고 10월10일 홈에서 벌어지는 스리랑카전에서 대승할 것으로 보인다. 지난 10일 투르크메니스탄 원정에 이어 2연승을 거두고 평양으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 북한은 레바논과 스리랑카를 이겨 먼저 2승을 획득한 가운데 10월10일 월드컵 예선 경기 없이 닷새 뒤 한국전에만 집중할 수 있다. 벤투호엔 가벼이 여길 수 없는 ‘지옥의 평양 원정’이다. 여기서 4만 관중을 잠재우고 승점 3을 얻어야 카타르 가는 길이 쉽다.

silva@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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