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중 인터뷰]배영수 "두산은 우리 아버지 관까지 짜준 팀"

정철우 기자 입력 2019. 11. 1. 06:00 수정 2019. 11. 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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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영수가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정철우 기자

[스포티비뉴스=정철우 기자]"살면서 소주를 3병 마셔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은퇴 선언하고 처음 3병을 마셔 봤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다. 내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은퇴를 선언한 배영수는 선택 받은 야구 선수다. 하늘은 그에게 기적을 선물했다. 은퇴를 결심하고 올라간 한국시리즈 마운드. 원래는 그의 차지가 아니었다. 김태형 두산 감독이 마운드 방문 횟수를 넘기며 갑자기 벌어진 상황이었다.

배영수는 웃으며 마운드에 올랐다. 그리고 KBO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 박병호와 샌즈를 잡아내며 팀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안겼다. 그리고 은퇴를 선언했다. 그보다 화려한 야구 인생을 산 선수는 있어도 그만큼 극적인 드라마를 쓰며 은퇴한 선수는 찾기 힘들다. 아직 그때의 감동 속을 걷고 있는 배영수를 10월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 강남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그는 이날도 소주를 많이 마셨다. 그러면서 가슴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 놓았다.

-요즘 어떻게 지내나.

△여기저기에서 인터뷰 요청이 들어와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뉴스 프로그램에서까지 연락이 온다. 그 정도 인지도는 아닌데(웃음). 하긴 마지막 장면을 한국 사람들 다 봤다고 하더라. 거기에 내가 웃고 올라갔다는 것이 더 웃겼다. 왜 웃었을까.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 없었다.

-웃는 얼굴이 정말 인상적이었는데.

△운동이 잘돼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생각한다. 준비 기간인 한 달 동안 정말 많은 노력을 했다. 10여년 만에 집에서 섀도 피칭을 했다. 그래서 웃으며 마운드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 같다. 운동은 땀으로 하는 것이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 준비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에 웃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감독님도 라이브 피칭을 하는 모습을 보며 코치들에게 "배영수가 기가 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첫 상대가 박병호였다.

△박병호한테 정말 강했다. 올해 키움이랑 할 때 후배들에게 말했다. "형이 박병호 미국 가기 전에 꽉 잡고 있었다. 오늘 한번 봐라." 그런데 초구에 백스크린 넘어가는 홈런을 맞았다. 입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운명처럼 박병호를 그 순간에 만났다. 하지만 긴장은 되지 않았다.

-정말 떨리지 않았나.

△올라가면서 긴장이 하나도 안됐다. 한국시리즈라는 생각도 안했다. 몸이 진짜 가벼웠다. 웃은 것 때문에 사람들 인상에 더 깊게 남은 것 같다.

두산 팬분들 중 대부분은 긴장하셨을 것이다. 근데 초구가 내가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히게 들어갔다. 초구를 변화구를 던졌으면 박병호에게 당했을 것이다. 칠 테면 쳐 보라는 심정으로 빠른 공을 던진 것이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었다.

마지막 샌즈의 땅볼을 잡고 1루로 향할 때는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붕~붕 떠다니는 느낌이 들었다. 공 5개가 또 내 인생을 바꿨다. 영상을 100번은 돌려 본 것 같다.

-아직 실감이 안 날 듯한데.

△이렇게 끝나니까 기분이 정말 좋다. 섭섭한 마음도 아쉬움도 없다. 은퇴하면 며칠간은 공허하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없었다. 운동을 너무 많이 해서 그런가.

-운동 중독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던 선수였다.

△남들보다 서너 배는 했으니까. 시즌 끝나자마자 11월15일부터는 무조건 운동을 시작했다. 어릴 때는 빨리 성공하고 싶어서 대출 받아서 해외로 자율 훈련을 가곤 했다. 일본 돗토리(월드 윙 센터)에 가서 자율 훈련을 했다. 프로 야구 선수 중 자율 훈련을 외국으로 떠나서 한 횟수는 아마 내가 제일 많을 것이다. 연봉 2500(만 원)에 계약금은 아버지 빚으로 다 날린 상황이었다. 돈이 없었다. 하지만 좀 더 좋은 환경에서 운동하기 위해 빚을 내서 훈련했다. 그렇게 힘들게 운동했다. 공 다신 안 던지고 싶다. 당분간 운동을 하고 싶지 않다.

-배영수 하면 팔꿈치 수술을 빼놓을 수 없는데.

△어제 침대에 혼자 누워 있는데 팔꿈치 빼곤 아픈 곳이 없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튼튼한 뼈를 물려주신 걸 감사했다. 팔꿈치 수술 때문에 장애 6급 판정을 받았다. 팔이 다 구부러지지 않는다. 세수를 할 때도 손이 가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옮겨서 해야 한다. 은퇴하면 팔꿈치 수술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인공 관골을 끼워야 하고 성공률도 높지 않다고 해서 포기했다. 골프도 치지 못한다고 하더라.

-은퇴는 언제부터 예감했나.

△올해 끝나고 은퇴할 마음이 진작부터 있었다. 경기에 너무 나가지 못하니까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그런데 마무리가 아주 좋았다. 운이 이렇게 타고날 수 있을까. 나중에 영화로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다. 뻔한 스토리지만 실제 주인공이니까. 은퇴 선언을 한국시리즈 4차전이 끝나고 하려고 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아내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야구 인생에 굴곡이 많았는데.

△야구 인생이 아름답게 끝났다. 1승12패 하고 야구 안하려고 정동진 가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딱 10년 전이다. 많은 사람들은 2004년도에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하고도 마무리를 짓지 못한 것을 올해 마무리했다고 하는데 나는 2009년도에 야구 그만두려 했던 시간들이 더 떠올랐다. 야구 안 하려고 가을 캠프도 안 갔다. 그런데 내 등 번호처럼 25번째 한국시리즈 등판도 하고 은퇴 생각 후 딱 10년을 더 했다는 것도 신기하다. 인생은 길다는 걸 느꼈다. 버티고 또 버티면 언젠가 기회가 온다는 걸 느끼게 된 것 같다. 인생 1막은 화려했고 2막은 굴곡졌다. 하지만 마지막에 웃을 수 있었으니 모든 것을 잊을 수 있게 됐다.

▲ 배영수(가운데)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두산 후배들과 세리머니를 하고 있다. ⓒ곽혜미 기자

-두산에서 후배들과 사이가 정말 돈독했다고 들었다.

△'육사 데이'라는 게 있다. 올해 6월 4일이었다. 생고기를 먹지 말라고 했는데 그 집이 생고기로 무척 유명한 곳이었다. 그게 바로 탈이 났다. 나를 포함해 5, 6명이 병원에 실려가 입원을 했다. 유희관이 선발인데 유희관에게 정말 미안했다. 뒤에 나갈 투수가 정말 부족했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 권혁 박치국 이현호 이용찬 등등 불펜에 나갈 투수가 정말 없었다. 그다음부터는 회식의 '회'자도 꺼내지 못하겠더라.

불펜에서 치국이하고 덕주하고 3,6,9 게임을 하는 장면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것을 봤다. 내기도 많이 하고 밥도 많이 사 줬다.

후배들하고 살 빼기 내기를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일주일에 8㎏ 빼기 내기였다. 내가 103㎏이었다. 애들은 30만 원 내고 내가 300만 원을 냈다. 결국 내가 살을 빼는 데 성공했다. 후배들한테 20만 원씩 돌려주고 나머지로는 밥 사 줬다. 유일하게 (이)영하만 내게 베팅을 했다. 감이 있는 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르지 싶었다. 시즌 중에 8㎏을 어떻게 뺀다는 것은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후배들하고 뭔가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영하에게 어떻게 나를 믿었냐고 물어보니 "선배님 저는 캠프 때부터 알아봤습니다"라고 하더라. 같이 웃었다.

-후배들에게 조언했던 것이 있나.

△이영하는 멘탈이 정말 좋은 선수다. 이번에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몸은 정말 좋았는데 결과가 안 좋았기 때문에 배우는 것이 많았을 것이다. 한국시리즈 같은 큰 무대에선 절실하게 편안하게 둘 다 아니다. 힘이 있으니까 힘으로 누르려고 하지 말라고 했다. 정확하게 던지라고 했다. 힘이 있으니까 막 붙으려고 했다. 투수와 타자가 컨디션 100%로 붙으면 무조건 투수가 진다.

-지난해 은퇴 위기가 있었는데.

△지난해엔 실제 은퇴 권유를 받기도 했다. 8월 29일이었다. 박종훈 당시 한화 단장이 직접 은퇴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기준이 뭐냐고 되물었다. "내가 봤을 때"라는 답이 돌아왔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다 내가 야구할 뜻이 없는 것 같다는 기사가 나왔다. 구단에서 야구를 스톱하라고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에 재활군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내가 야구 할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내가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은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명확한 기준도 없이 옷을 벗으라는 건 받아들일 수 없었다. 5일에서 7일 정도 고민해 보라고 했다. 석 달의 시간을 달라고 했다. 한화라는 구단에는 미안한 감정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날 믿지 못하기 때문에 은퇴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긴 어려웠다.

-한화 시절은 어땠나.

△한화 팬들은 정말 최고라고 생각한다. 육성 응원의 짜릿한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다. 여기서 한 가지 알리고 싶은 것이 있다. 김태균이라는 선수의 존재감이다. 김태균은 이글스 그 자체다. 팀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아끼는 선수다. 팀을 위해 많은 것을 참고 할 수 있는 존재다. 이글스를 정말로 사랑하는 선수다. 이글스 선수라는 자부심이 정말 대단하다. 후배들에게 갈 비판을 자신이 막으려고 하고 선수들이 원하는 건 자기 이미지가 깎이더라도 구단에 얘기할 줄 아는 선수다. 정말 놀랐다. 태균이도 우승 한번 해 보고 은퇴했으면 좋겠다. 마음이 쓰이는 후배다. 이글스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한다. 팀 퍼스트란 말은 김태균 같은 선수에게 쓰이는 말이어야 한다.

-삼성 시절 얘기도 해 보자. 이별이 쉽지 않았을 텐데.

△내가 배신했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선발을 원한다고 한 적도 없고 50억 원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시쳇말로 입을 털려고 했던 적도 없다. 하지만 더 이상은 이야기하지 않겠다. 아직은 말할 단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삼성 팬들에겐 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다만 오해만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다. 언젠가 그때 얘기도 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20년 쯤 뒤엔…

-지난해 한화에서 나왔을 때 삼성에선 콜이 없었나.

△솔직히 지난해 한화에서 나온 뒤 삼성으로 가고 싶었다. 오치아이 코치도 오라고 콜을 보냈다. 하지만 그 역시 잘되지 않았다. 그러다 두산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 덕에 지금처럼 좋은 마무리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나라고 삼성에서 마무리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럴 수 없었다.

-두산 베어스라는 팀에 감동을 많이 받은 것 같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한국에 왔는데 두산 베어스 코치를 비롯해서 구단에서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줬다. 우리 누나까지 정말 감사할 정도로 많이 도와줬다. 아버지 관까지 짜 줬다. 두산에 온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아직 두산 선수라 불리기도 어색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정말 사소한 것까지 다 챙겨 줬다. 정말 감동을 받았다. 내 얼굴도 살고 내가 할 일도 크게 줄었다. 정말 고마웠다. 신세를 제대로 졌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지 않았기 때문에 큰 정이 있는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두산 덕에 아들로서 책임을 다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했다.

-김태형 감독의 도움도 컸다.

△많은 걸 배웠다. 야구와 팀만 생각하는 감독이다. 내가 지도자가 되면 그렇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베테랑들에게도 '이렇게 배려해 줘도 되나'싶을 정도로 잘 챙겨 준다. 아, 그리고 또 한가지 말하고 싶은 게 있다. 시즌 막판에 한 10경기 정도 못 나간 적이 있다. 원정을 갔는데 김원형 코치가 날 찾아왔다. 2군 가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맙다고 했다. 안 좋은 상황에서도 인상 쓰지 않고 분위기 잘 이끌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내가 오히려 감사했다. 현실도 받아들이고 잘 아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했다. 서로서로 위로가 많이 된 시즌이었다.

-두산 선수들은 어떤가.

△두산 선수들은 욕심이 정말 많다. 그 욕심을 오로지 야구하는 데 쏟는다. 팀이 괜히 강팀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 중 김재환은 진짜 더 잘할 선수다. 운동하는 거 보면 절로 박수가 나온다. 정규 시즌 우승 확정 짓고 3일 쉴 동안 자기 혼자 나와 미친 듯이 치더라. 그 노력을 봐 줬으면 좋겠다. 그 노력을 보면 욕하기 어려운 선수다. 나도 운동 많이 한다고 생각하지만 김재환은 그보다 더 많은 훈련을 하는 선수다. 또 꼭 할 말이 있다.

-무엇인가.

△트레이닝 파트가 대단하다. 트레이너들이 새벽 2시까지 선수들을 치료해 준다. 시즌 때 아프다고 하면 선수들이 싫어 해도 끌고 와서 살뜰하게 챙겨 준다. 새벽 2시고 3시고 4시고 선수들을 챙긴다. 이병국 코치 이하 트레이닝 파트에서 정말 노력을 많이 한다. 메인 선수들만 챙기는 것이 아니다. 백업 선수들도 똑같이 대우해 준다. 자기 시간을 내면서까지 선수들의 부상을 체크하고 치료해 준다. 3D 업종인데 티 내지 않고 선수들에게 정성을 쏟는다.

▲ 배영수가 스포티비뉴스와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곽혜미 기자

-고분고분한 선수는 아니었는데.

△고비는 있었지만 공부도 많이 됐다. 한화 시절 모 코치님의 지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김성근 감독을 직접 찾아갔다. "한 달만 쉬겠다"고 했다. 무슨 깡이었는지 모르겠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 김성근 감독께 사죄를 했다. 이후 미야자키 교육리그를 가게 됐다. 감독께서 "눈 감고 귀 닫고 입 닫고 야구만 하라"고 하셨다. 교육 리그에선 내가 최선참이었다. 유망주들이나 가는 캠프에 내가 있다는 것이 많이 창피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 같이 많이 내렸다. 그냥 넘어갈 김성근 감독이 아니지 않은가. 러닝 훈련을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운동장을 뛰는데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도저히 못 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운동장 정문으로 달려 나갔다면 내 야구 인생도 끝이었을 것이다. 지나고 나니 왜 그랬는지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김성근 감독께 정말 많은 것을 배웠다. 그 시기가 내게 큰 힘이 됐다.

선동열 감독님의 지시에도 반항을 한 적도 있었다. 1승12패를 할 때였다. 잠실구장에서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2군에 내려가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바로 짐 싸서 내려가려 했다. 더그아웃으로 향하는데 김태한 코치가 날 잡고 외야로 끌고 갔다. 거의 한 시간을 울며 하소연을 했다. 그러다 응어리가 조금 풀렸다. 많이 외로웠던 것 같다. 끝 모를 부진에 상처가 깊은 상황에서 2군행을 통보 받으니 버림 받는다는 기분을 받았던 것 같다. 이후 감독께서 다시 불러 줬다. 힘든 시기를 이겨 낼 수 있는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김성근 감독 선동열 감독 모두 내게 큰 스승이었다.

-20년을 버틴 원동력이 있었나.

△의지와 깡, 그리고 규칙이 아니었나 싶다. 어려서부터 가난했기 때문에 빨리 가난에서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다. 2, 3년차 시절부터 해외로 자비 훈련을 떠났다. 계약금은 아버지 빚으로 다 날리고 연봉 2500만 원 받던 시절부터 돗토리(월드 윙 센터)로 훈련을 떠났다. 구단 보조도 좀 있었지만 빚을 내야 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빨리 성공하고 싶어 과감하게 내게 투자를 했다. 그렇게 더 잘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그리고 두 가지 큰 원칙이 있었다. 신인 시절엔 무슨 일이 있어도 새벽 1시 2시까지 섀도 피칭을 꼭 했다. 술을 마시든 무슨 일이 있든 섀도 피칭만은 거르지 않았다. 나 자신과 약속은 꼭 지켰다. 또 한 가지는 캠프를 완주하자는 것이었다. 캠프에서 준비가 그다음 시즌의 모든 것을 결정하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캠프에서 아프지 않고 중도 탈락하지 않는 것이 늘 목표였다. 20년 동안 한번도 캠프를 조기에 마친 적이 없었다. 내가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짐은 언제 쌌나.

△축승회 다음 날 쌌다. 은퇴를 선언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기 때문에 라커룸을 다 정리했다. 짐 싸서 집에 오는데 무슨 음악이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어느 노래에 마음이 흔들리더니 눈물이 흘렀다. 차 안에서 혼자 "영수야, 고생했다"라고 크게 외쳤다. 속이 후련해지는 기분이었다.

-이승엽 홍보 위원과 각별한 사이인데.

△은퇴 결심 하고도 아마 제일 먼저 통화했을 것이다. "왜 더 하지 그러냐"고 놀리더라. 늘 힘이 되고 도움이 되어 준 선배였다. 아, 그리고 우리 경북고 81회 동기들 얘기도 꼭 하고 싶다. 언제나 나를 응원해 주고 힘을 실어 줬다. 친구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

-축하 인사를 많이 받는다는데.

△아니 은퇴한다는데 왜 다 축하한다고 하는지 모르겠다(웃음). 정말 마무리가 너무 극적이었다. 야구의 신이 있다면 그동안 고생했다고 보상을 해준 것 같다. 박병호 상대 초구 패스트볼이 그쪽으로 갈 게 아닌데 왜 그리 갔을까 싶기도 하고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그저 감사할 뿐이다.

-스피드가 10㎞ 이상 떨어지면 어떤 기분이 드는가.

△최고 155㎞를 던지던 투수가 어느 날 130㎞도 안 나오는 투수가 되는 상상을 해 봤나.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전광판에 128㎞가 찍혔던 날을. 대구 시민 야구장은 관중석이 가까웠다. "영수야 이제 그만해라"는 야유를 엄청 받았다. 그래도 은퇴할 때 최고 144㎞까지 찍어 봤다. 그런데 (함)덕주에게 운동화 하나 사 줘야 한다. 내가 145㎞를 찍겠다고 했는데 1㎞가 모자랐다.

▲ 배영수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 지은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곽혜미 기자

-2012년 시즌을 앞두고도 돗토리 훈련을 갔는데.

△말도 안 통하는 데 홀로 가서 회원 등록하고 (오전) 9시에 나가서 일본 선수들하고 캐치볼 하고 (오후) 3시에 운동 끝나면 러닝하고. 하루에 30만 원 정도 들었다. 일본 선수들하고 같이 훈련하는데 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했다. 비즈니스 호텔에서 묵으며 정말 열심히 했다. 너무 힘들게 야구 했던 것 같다.

-팔꿈치 수술을 제때 못했다는 소리는 뭔가.

△MRI를 3월에 찍었다. 5월에 수술을 해야 했다. 하지만 구단에선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일단 공을 던질 수 있으니 시즌이 끝난 뒤에 해도 된다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어찌됐건 내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팔꿈치 수술을 해야 한다는 걸 알게 됐다. 8개월 이상 시간이 흐른 뒤에 수술을 하게 된 것이다. 만약 그해 5월에 수술을 했다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까? 집도의로부터 "이렇게 손상된 인대는 처음 본다"는 말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다. 정말 인생이 달라졌을까. 지나간 일이니 그런 상상도 해 본다. 어쨌든 지금도 미스터리다. 왜 그때 수술을 빨리 안 시켜 줬는지. 그래도 우승했으니 마음을 돌릴 수 있었다. 팀을 위해 공을 던졌고 팀도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아쉬움은 없다.

-야구의 신에게 할 말이 있나.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렇게 극적인 반전의 마무리를 짓게 해 주셔서 고맙다. 다만 좀 더 쉽게 풀리게 해 줄 순 없었는지 물어보고는 싶다(웃음).

-거취는 정해졌나.

△두산에서 코치를 하기로 했다. 구단과도 만나 이야기를 끝냈다. 하지만 난 가르친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다. 선수들에게 서포트를 해 주는 것이 코치라고 생각한다. 기술을 가르치는 직업이 아니라는 믿음이 있다. 난 그렇게 배웠다. 선수들은 이미 프로다. 코치는 도우미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고 도와주고 믿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 다만 내게 다가왔을 때 기술적으로 조언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준비는 해야 할 것이다.

-데이터 야구가 대세다.

△공부는 하고 있다. 책도 구해 보고 영상도 구해 찾아보고 있다. 하지만 야구에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18.44m가 있다는 것이다. 변화를 하더라도 그 속에서 해야 한다. 운동 방법은 안 알려 주고 숫자만 얘기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스포티비뉴스=정철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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