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nterview 열정 >김재엽 "유도계서 밀려난 지 24년..악바리 투혼, 공부에 쏟아부었죠"

허종호 기자 2020. 5. 1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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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엽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교수가 지난 11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동서울대에서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현역 시절 세리머니를 재연하고 있다. 성남 = 김동훈 기자
김재엽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교수가 1988년 9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1988 서울올림픽 유도 남자 60㎏급 시상식에서 한복 차림으로 시상대에 올랐다. 연합뉴스

■ 한국 유도 간판스타… 강단·예능서 활약하는 김재엽

서울올림픽 金메달 따고 은퇴

추석날 시상식서 한복입어 화제

후원사 노출 안돼 엄청 욕먹어

은퇴후 지도자의 길 들어섰지만

판정시비 항의로 ‘미운털’ 박혀

연금중단 징계받고 일자리 잃어

사업 손 댔지만 사기당해 실패

자해·자살 시도후 대인기피증

이혼후 아이들 키우며 견뎌내

공부밖에 재기할 방법없다 생각

매트에서처럼 죽기살기로 덤벼

17년째 동서울대에서 강의중

김재엽(56)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교수는 1980년대 한국유도의 간판스타였다. 그는 계명대 2학년이던 1984년 화려하게 등장했다. 당시 LA올림픽 남자 60㎏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1986 서울아시안게임과 1987 세계선수권대회, 1988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휩쓸었다.

김 교수는 기술로 승부를 보는 경량급에서도 손꼽히는 테크니션으로 꼽혔다. 주특기인 허벅다리 걸기와 빗당겨치기는 물론 모든 유도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김 교수는 계성고 재학 시절 100연승 이상을 올렸고 고교 3학년이던 1982년부터 은퇴를 결정한 1988년까지 붙박이 국가대표였다. 김 교수는 지난 3월 JTBC 예능프로그램 ‘뭉쳐야 찬다’에 출연했고 50대이면서도 뛰어난 운동 능력을 뽐내 눈길을 끌었다. 김 교수는 은퇴한 뒤 30년 가까이 축구를 즐겼다. 배우 최수종, 이덕화 등이 몸담은 연예인축구단 일레븐 FC에서 25년째 활약하고 있다.

김 교수를 지난 11일 경기 성남시 수정구 동서울대에서 만났다. 그는 “은퇴하고 32년이 지났다. 세월이 흐르면서 많은 스포츠 선수가 묻히지만, 방송에 불러줘 고마웠다. 예능프로그램 등 방송 출연으로 스포츠에 관심을 높이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복싱을 즐기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운동과 인연을 맺었다. 대구남산초 2학년이던 1972년 축구를 시작했지만, 예산 문제로 축구부가 해체하면서 1974년 유도로 방향을 틀었다. 대구중앙중 재학 시절까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김 교수는 “중학교 때까지 실력이 부족했고, 성적은 좋지 않았다. 유도 기량이 뛰어난 친구의 ‘덤’으로 대구계성고에 입학했다. 그래서 방황하곤 했다. 유도를 그만둘 생각도 했다. 그러다 고교 2학년이 되면서 마음을 다잡았다. 이러다간 죽도 밥도 다 안 된다는 절박함이랄까”라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악바리’로 불렸다. 훈련량이 많았고, 매트에 오르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 얻은 별명. 기량은 나날이 발전했고, 그는 ‘기피 대상 1호’가 됐다. 김 교수는 “다른 사람이 잘 때도 땀을 흘렸다. 하루 평균 4∼5시간씩 더 훈련했다. 피 같은 땀을 흘린 덕분에 고교 2학년 때부터 3학년 때까지 국내대회에서 100연승 이상을 거뒀고 3학년 말엔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했다”고 말했다. 당시엔 고교생의 대표 선발전 참가가 허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100연승을 돌파한 괴력의 소유자를 그냥 둘 순 없었다. 그리고 선발전에서도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김 교수는 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 등 굵직한 국제대회에서 모두 19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서울올림픽이 마지막 금메달. 그래서 더욱 애착이 간다. LA올림픽 결승전에서 패한 뒤 4년간 앞만 보고 달렸다. 국제무대를 휩쓸었지만, 정작 올림픽 금메달이 없었기에 압박감이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김 교수는 “반드시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싶었고, 서울올림픽에서 정상에 오른 뒤 은퇴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매일매일 혹독한 훈련을 자청했고, 잘 견뎌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열린 올림픽에서 마지막 금메달을 손에 쥐었다. 모든 선수가 정상에서 은퇴하길 바란다. 난 꿈을 이뤘다. 당시 코칭스태프, 동료, 선후배들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역 시절 뛰어난 ‘쇼맨십’을 뽐냈다. 은퇴 무대 역시 마찬가지. 김 교수가 서울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1988년 9월 25일은 추석이었고, 그는 명절 저녁 TV 앞에 모인 국민에게 값진 금메달을 바쳤다. 그는 한복을 입고 시상대에 올라 눈길을 사로잡았다. 김 교수는 “마침 추석날이었기에 결승에서 이기면 한복을 입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은퇴이니. 하지만 시상식 이후 엄청나게 욕을 먹었다. 국가대표 유니폼, 신발을 착용하지 않아 후원사가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김 교수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은퇴했다. 그런데 시련이 이어졌다. 은퇴 직후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지만 1996년 5월 열린 애틀랜타올림픽 국가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판정 시비로 유도계를 떠났다. 당시 한국마사회 코치였던 김 교수는 76㎏급에서 제자 윤동식이 조인철에게 판정패하자 항의했고, 한 달 후 대한유도회로부터 유도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연금 중단 징계 처분을 받았다. 김 교수는 “당시 학연에 따른 편파 판정으로 제자가 불이익을 받았고 재판까지 이어졌다. 나 역시 유도계의 주류 학교를 나오지 않았기에 더는 발을 붙일 수가 없었다. 새로운 직장을 찾는 곳마다 압력이 들어왔다. 그렇게 유도와 멀어졌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현장에서 물러나 학업에 몰두했다. 현역 시절에도 공부를 즐겼고 은퇴한 뒤 교수가 되길 원했다. 은퇴 직후인 1989년 국민대 대학원 체육학과 석사학위를 받았고, 지도자로 활동하던 1993년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임용은 매번 무산됐다. 유도계는 주류에 저항한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유도계의 압력 때문에 그는 팀, 학교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진로가 막히자 김 교수는 사업에 손을 댔다. 그런데 사회는 냉혹했다. 운동선수, 지도자, 그리고 강사 경력은 사업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 위기가 터졌고, 사기까지 당했다.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모두 잃었고 이혼했다. 그의 삶은 뿌리째 흔들렸다. 김 교수는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깨달은 시기였다. 정말 막막했다. 자해와 자살시도까지 할 정도였으니. 게다가 언론에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재엽이 망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대인기피증이 생겨 사람을 피했다. 당시엔 대한민국이 싫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강했다. 재기의 원동력은 가족. 아버지와 어머니는 든든한 후원자였고, 자녀(1남 1녀)는 열렬한 응원자를 자처했다. 김 교수는 “세계 정상에 올랐지만, 나는 너무 약한 존재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하지만 내겐 가족이 있고, 가족은 밑바닥에서 날 일으켜 세웠다. 아이들이 어렸기에 내가 키워야 했다. 아이들을 떠올리면서 정말 독한 마음으로 온갖 일을 다 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힘든 일을 많이 겪었는데도 너무나 잘 컸다. 정말 고맙다”고 밝혔다.

주경야독(晝耕夜讀), 하루 24시간을 쪼개 쓰면서 잡생각을 털어냈다. 성실한 자세를 되찾았고, 건실한 가장으로 돌아오자 행복이 찾아왔다. 김 교수는 2004년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강의를 맡았고, 2006년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 임용 뒤에도 학업에 열중했고, 2009년엔 경기대 대학원에서 경호안전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다시 일어서는 방법은 공부뿐이었다. 나이 들어 공부하는 게 쉽진 않았지만, 이 길 외엔 다 막혔기에 ‘올인’했다. 지식이 풍부하면 인정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고, 매트에서처럼 죽기 살기로 덤볐다. 악바리 투혼을 매트가 아닌 책에 쏟아부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동서울대 스포츠학부 경호스포츠학과에서 제자들을 지도한다. 유도, 이종격투기, 사격, 수상스포츠는 물론 취업창업 진로지도 과목도 담당한다. 취업창업 지도에 각별한 공을 들인다. 밑바닥까지 곤두박질쳤던 뼈저린 경험은 잊을 수 없다. 그는 그래서 운동선수들에게 공부를 강조한다. 엘리트 선수들은 은퇴한 뒤 선택지가 거의 없다. 지도자로 선발되면 다행. 그 밖엔 할 일을 찾기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김 교수는 “간혹 일반인들이 ‘운동선수가 무슨 공부야’라고 말하곤 한다. 운동선수들은 무식하다는 편견이 자리 잡았다. 하지만 운동선수 중엔 머리가 좋은 사람이 많다. 사실 머리가 나쁘면 운동을 잘할 수 없다. 운동에 들인 노력만큼 공부에 투자하면 다 잘 될 수 있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책을 읽으라고 권유한다”고 말했다.

성남 = 허종호 기자 sportsher@munhw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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