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맞는 부천, 5228일을 기다린 '복수혈전'

조효석 기자 2020. 5. 25.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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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고이전 이후 15년째..무관중으로 제주 맞는 부천 서포터 헤르메스
지난해 K리그2 준플레이오프 진출을 결정짓고 나서 선수단과 서포터즈 헤르메스가 함께 찍은 사진. 부천 FC 1995 제공

축구팬 안영호(40)씨에게 2006년 2월 2일은 잊을 수 없는 날이다. 경기도 부천의 스물여섯 대학생이던 그는 방학을 맞아 인근 교복상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8년째 응원해온 축구팀 부천 SK는 지난 시즌의 부진을 털어내고 리그 4위를 달성했다. 다음 시즌에는 그 이상도 충분히 노려볼 만한 팀이었다.

여느 해처럼 시즌 개막을 손꼽아 기다리던 겨울, 평소처럼 일과를 끝낸 안씨는 TV를 틀었다. 저녁 시간에 맞춰 스포츠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화면을 보던 안씨는 어느 순간 하얗게 굳어버렸다. 부천 SK의 연고이전, 즉 자신의 팀이 사라진다는 소식이었다. 발레리 니폼니시 감독을 비롯해 윤정환과 이을용 이임생 김기동 남기일 등 스타를 배출하며 부천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했던 K리그 명문, 부천 SK는 그렇게 없어졌다.

26일 있을 하나원큐 K리그2 2020 4라운드 부천 FC와 제주 유나이티드의 경기는 안씨를 포함한 부천 서포터 ‘헤르메스’에게 단순한 승점 3점짜리 경기가 아니다. 연고이전의 그날로부터 무려 15년째, 총 5228일을 벼린 복수의 날이다. 1990년대 부천 유공 코끼리 시절 헤르메스가 결성된 이래 어쩌면 가장 역사적인 날일지도 모른다. 경기를 앞둔 24일, 어느덧 헤르메스의 대표가 된 안씨와 헤르메스 회원들은 기대에 차 있었다.

슬프고 자랑스러운 이야기

부천 SK 시절의 헤르메스 응원 모습. 출처: 헤르메스 홈페이지

현 부천 구단의 역사는 제주의 창단과 함께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부천 SK가 2006년 당시 구단운영 비용 절감을 위해 제주도로 연고지 이전을 결정한 직후부터 헤르메스 회원들은 사건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애썼다. 같은 해 열린 독일 월드컵 현장까지 날아가 붉은악마 응원석에 내건 ‘포에버 부천(FOREVER BUCHEON)’ 현수막은 당시 중계화면에 잡히면서 이슈가 되기도 했다.

서울의 SK 본사 건물 앞에서, 또 축구협회 건물 앞에서 항의도 해봤지만 기업구단에서 한 번 내려진 결정이 번복될 리는 없었다. 분하고 억울한 마음에 괴로워하던 부천의 축구팬들은 자신들의 팀을 재건하기로 했다. 직접 성금을 걷고 서명을 받으며 그들은 이웃을 설득했다. 돈 한 푼 나오기는커녕 결과물을 기약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은 사랑하던 팀을 위해 쪼갠 시간과 돈을 기꺼이 쏟아부었다.

지금의 부천은 그렇게 팬들의 피와 땀으로 만들어진 팀이다. 정식 명칭인 ‘부천 FC 1995’에 붙은 숫자도 헤르메스가 만들어진 해에서 따왔다. 무급으로 구단 운영에 힘을 보태며 봉사했던 축구팬 중 상당수는 현재 구단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팀 색깔 역시 과거 부천 SK가 쓰던 검정과 빨강 조합을 그대로 가져왔다. 현재는 주식회사이자 사회적 협동조합 형태로 팀이 운영되고 있다.

2008년 세미프로인 K3리그 참가 당시만 해도 부천에게는 프로 진입조차 뜬구름 잡는 소리였다. 어느덧 프로리그 참가 8년 차인 지금은 K리그2에서도 당당한 강호로 자리 잡았다. 지난 시즌에는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 1부 승격의 문턱까지 이르렀다. 그야말로 팬들이 만들어 이 자리까지 끌고 온 팀이다. K리그에서 손꼽으리만치 기구한, 또 한편으로는 자부심 느껴지는 역사를 지닌 구단이라 할만하다.

구단의 역사 덕분에 지역사회와의 연대의식도 끈끈하다. 안씨는 “시 체육회나 구단 직원, 하다못해 경기장 관리주체인 시설관리공단 직원들도 팀의 역사를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장덕천 부천시장은 제주의 K리그2 강등으로 다음 시즌 양 팀 간 대결 성사가 확정됐던 지난해 11월 페이스북에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글을 남기기도 했다.

새로운 세대, 부천의 축구를 위해

부천 FC 1995 제공

헤르메스에는 연고이전을 겪은 팬들만 있는 게 아니다. 콜리더(서포터즈 앞에서 구호나 응원가를 선창하는 역할)를 맡은 정도운(25)씨는 부천의 창단 이후 팬이 되면서 구단의 역사를 배운 사례다. 연고이전 당시 초등학생에 불과했던 그는 청소년이던 2009년 친구와 함께 난생처음 들른 부천 홈경기장에서 서포터의 응원 모습을 보고 반해 팬이 됐다.

정씨는 “솔직히 지금도 연고이전 당시 팬들의 감정을 100%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정씨는 “서포터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헤르메스 형들과 이야기를 통해 팀의 역사와 아픔을 배웠다”면서 “오히려 그런 역사를 알게 되면서 팀을 향한 애정이 더 짙어졌다”고 했다. 그는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팬들이 직접 만든 구단은 드물지 않은가. 팀에 대해 알게 될수록 자부심도 더 강해졌다”고 덧붙였다.

정씨를 위시한 헤르메스 회원들은 이번 경기를 앞두고 과거의 원한에 지나치게 매달리지는 않기로 했다. 무관중 관중석에 설치할 현수막에는 상대 팀을 향한 분노보다는 부천 선수들을 향한 격려의 메시지를 주로 담기로 했다. 정씨는 “상대에게 ‘우리가 우리 힘으로 팀을 만들어서 너희를 만났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면서 “이렇게 멋진 팬들을 져버렸다는 걸 후회스럽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무관중 경기를 아쉬워하는 건 단지 헤르메스가 제주를 직접 맞지 못해서가 아니다. 상실감에 떠난 옛 부천 팬들을 불러모을 기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안씨는 “부천 SK 시절만 해도 헤르메스는 수원 삼성, 안양 LG 서포터와 맞먹는 규모였다”면서 “축구에 애정이 식은 사람들도 제주와의 경기로 다시 부천의 이야기를 써나가면 돌아올 거란 기대가 있었는데, 코로나19로 직접 경기장에 갈 수 없게 돼 아쉽다”고 말했다.

벼르던 경기를 맞아 헤르메스가 부천 선수단에게 바라는 건 ‘간절한 축구’다. 설사 결과를 건지지 못하더라도 단단한 각오로 경기에 임해달라는 당부다. 이번 시즌 부천이 리그 개막 뒤 3연승을 달리는 반면 제주는 1무 2패로 부진한 상태이긴 하다. 그럼에도 객관적 전력은 제주가 앞서는 게 사실이다.

안씨는 “사실 ‘지면 가만 안둔다’ 하는 마음은 아니다. 전력상 분명 부천이 한 수 아래지만 절박함, 간절함을 보여줬으면 좋겠다”면서 “질 수 없다,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끈끈함을 보여준다면 잘했다고 박수쳐 줄 수 있다”고 말했다. 정씨는 “사실 이겼으면 좋겠지만 그보다 선수들이 간절하게 이기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중요하다”면서 “지나친 부담을 가지기보다는 다치지 않는 선에서, 후회 없이 뛰었다고 할만한 경기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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