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점, 비자책점은 원래 '타격 기록'이었다[베이스볼 비키니]

황규인기자 2020. 8. 3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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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 안방 경기서 볼티모어를 상대로 투구 중인 류현진. 버펄로=AP 뉴시스

‘블루 몬스터’ 류현진(33·토론토)의 이번 시즌 평균자책점이 3.16에서 2.92로 내려갔습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공식 기록원 오기(誤記) 인정한 겁니다.

류현진은 29일 보스턴 방문 경기에서 팀이 2-0으로 앞선 6회초 2사 만루 상황에서 3루수 트래비스 쇼(30)가 실책성 송구를 저지르면서 2점을 내줬습니다. 공식 기록원은 처음에는 이 장면을 3루수 실책으로 기록했지만 이후 내야안타로 판단을 바꾸면서 2점 모두 자책점이 됐습니다.

이에 대해 토론토 구단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3루 주자 득점은 자책점, 2루 주자 득점은 비자책점으로 바꿨습니다. 토론토 구단에서는 2루 주자 실점 역시 비자책점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한 상태입니다.

● 실책 때는 할인 받지만, 호수비 때는 할증 없다?

야구에서 투수는 잘했는데 야수가 잘못했을 때 투수는 ‘비자책점 처리’로 보상을 받습니다. 거꾸로 투수는 잘못했는데 야수가 잘했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터넷 캡처
‘베이스볼 비키니’ 독자시라면 자책점과 비자책점이 뭔지 다들 잘 알고 계시겠지만 혹시 모르니 개념을 한번 정리하고 하겠습니다.

야구 규칙은 자책점(自責點)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9.16 자책점(EARNED RUN 自責點) 자책점이란 투수가 책임져야 할 실점을 말한다. 자책점을 결정하려면 실책(포수의 타격방해 포함)과 패스트볼을 제외하고 그 이닝을 재구성 하여야 한다. 실책 없이 진루한 베이스를 결정할 경우 의심스러운 것은 투수에게 유리하도록 한다. 자책점을 결정할 경우 고의4구는 보통의 4구와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혹시 몰라 말씀드리면 저기서 패스트볼은 ‘fastball’이 아니라 ‘passed ball’ 그러니까 포일(捕逸)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표현은 ‘의심스러운 것은 투수에게 유리하도록’입니다. 투수에게 유리한 건 이렇게 실책 또는 패스트볼이 나왔을 때만이 아닙니다. 상대 타자가 홈런성 타구를 날렸는데 외야수가 담장을 기어올라 잡아냈습니다.

이러면 투수는 잘못했고 야수가 잘한 거지만 이득을 보는 쪽은 투수입니다. 요컨대 투수는 자기는 잘했는데 야수가 잘못했을 때는 할인을 받지만 자기 잘못을 야수가 커버했을 때는 할증을 받지 않는 존재입니다.

이거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 자책점 vs 비자책점을 구분하기 시작한 이유

리그 최고 투수가 받는 ‘사이영상’에 이름을 남긴 사이 영. 그는 통산 3167점을 내줬는데 이 중 67.8%(2147점)이 자책점이었습니다. 지난해 메이저리그 전체 점수(2만3467점) 가운데서 자책점 비율은 92.4%(2만1682점)였습니다. 이는 자책점 기준이 바뀌어 생긴 일입니다. 동아일보DB
사실 한자어 ‘자책점’과 영어식 표현 ‘언드 런(earned run)’은 살짝 뉘앙스가 다릅니다. 자책점이 자기(투수)가 책임져야 할 점수라는 뜻이라면 언드 런은 ‘자기가 벌어들인 점수’라는 뜻에 가까우니 말입니다.

맞습니다. 야구에서 언드 런과 언언드 런(unearned run·비자책점)을 구분하는 건 원래 ‘타격 기록’이었습니다. 미국야구조사협회(SABR)에 따르면 이 둘을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은 최소 1871년부터 나왔습니다. 1887년이 되면 ‘상대 실책으로 이득을 보지 않고 얻어낸 점수(It is achieved without benefitting from an error)’를 언드 런으로 정의하게 됩니다.

문제는 당시에는 볼넷을 ‘투수 실책’으로 기록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볼넷 이후 얻어낸 득점을 어떻게 분류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한 쪽에서는 ‘볼넷도 실책이니까 언드 런 집계 때 다른 실책과 마찬가지로 볼넷 이후 나온 점수는 제외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반대 쪽에서는 ‘볼넷은 다른 실책과 엄연히 성질이 다르다. 볼넷 이후 점수가 났을 때는 언드 런 집계에 포함해야 한다’고 맞섰습니다. 이 중 두 번째 주장이 더 큰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면서 언드 런은 수비 기록 자책점이 됐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지지 못하는 투수 잘못 때문에 올라간 점수를 언드 런에서 제외하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는 주장은 결국 수비 쪽 책임을 이야기하는 거니까요. 지금도 메이저리그 공식 기록원이 기록지 투수 이름 옆에 써야 하는 숫자는 ‘earned runs’가 아니라 ‘earned runs allowed’입니다.

● 타율, 평균자책점, 승리·패전 투수는 모두 한 사람 발명품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자리한 헨리 채드윅 현판. 쿠퍼스타운=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자책점과 비자책점을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 가운데는 흔히 ‘야구 기록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헨리 채드윅(1824~1908)도 있었습니다. 박스 스코어를 고안한 것도, 삼진을 알파벳 ‘K’로 표기하기 시작한 것도 모두 채드윅이었습니다. 타율과 평균자책점 역시 채드윅의 발명품입니다.

채드윅은 1879년 “어떤 투수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려주는 지표를 단 하나만 고르라면 그건 이 투수를 상대로 상대 팀에서 뽑은 언드 런”이라고 썼습니다.

그는 이로부터 5년 뒤(1884년) ‘승리 투수’라는 개념도 만들어 냅니다. 여기서 다시 4년이 지나서는 패전 투수 아이디어도 세상에 내놓습니다. 자책점에 이어 승리·패전 투수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야구 이야기’가 훨씬 풍성해졌습니다.

만약 이런 개념이 없었다면 ‘류현진은 6이닝 동안 2실점했다’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법이 있기에 우리는 ‘투수는 정말 잘 던졌는데 야수 실책 때문에 패전 투수가 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가 있게 됩니다.

채드윅에게 이런 기록이 필요했던 건 그가 뉴욕타임스 등에서 일한 야구 기자였기 때문입니다. 기자에게는 항상 ‘이야기’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채드윅은 이런 기록을 고안해 스스로 이야기 감을 만들었던 겁니다.

그리고 100년이 넘게 흐른 뒤 태평양 건너편에 사는 저 역시 그 덕에 이렇게 길고 긴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 있게 됐습니다. 긴 글을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모두 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대를 자책점 없이 승리 투수로 마무리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황규인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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