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야구학] ⑩난 후배들을 잘못 가르쳤다

입력 2020. 11. 11. 06:01 수정 2020. 11. 11.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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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다저스 클레이튼 커쇼(22번)가 지난달 26일 열린 월드시리즈 5차전 6회 초 강판되고 있다. Gettyimages

메이저리그(MLB) 포스트시즌 덕분에 가을이 풍성했다. 야구는 항상 재미있지만, 올봄 MLB 연수를 가려다가 못 간 탓에 더 그랬던 것 같다.

LA 다저스가 승리한 월드시리즈 5차전. 데이브 로버츠 다저스 감독은 6회 초 2사에서 클레이턴 커쇼를 더스틴 메이로 교체했다. 커쇼는 마운드에서 한참 동안 뭔가를 이야기했다. 관중석에서는 로버츠 감독을 향한 야유가 터졌다. 커쇼의 투구 수는 85개에 불과했으니, 적어도 6이닝을 채우게 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츠 감독은 커쇼를 설득했다. 마운드를 내려오는 커쇼는 팬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교체 결과는 성공이었다. 메이는 7회까지 탬파베이 타선을 잘 막았다. 로버츠 감독은 “경기 전부터 예정된 교체였다. (팬들의 반응에 따른) 감정 때문에 계획을 바꾸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원칙이 승리했다.

다저스는 지난 몇 년 동안 포스트시즌에서 '전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투수 운용의 실패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다저스는 이를 바탕으로 실패를 반복하지 않는 매뉴얼을 만든 것 같다.

선수층이 두껍지 못한 탬파베이는 변칙을 간간이 썼다. 뉴욕 양키스와의 디비전시리즈 5차전 선발 투수는 타일러 글래스노우였다. 앞서 2차전에서 5이닝(4실점)을 던진 에이스에게 휴일을 이틀만 줬다.

글래스노우는 2⅓이닝 2볼넷 2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한 뒤 교체됐다.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한 번씩만 상대한 것이다. 탬파베이는 2018년 오프너(opener) 전략을 MLB에 선보인 최초의 팀이다. 선발 투수가 마땅치 않은 날 불펜 투수에게 1~2회를 맡긴 뒤 상황에 따라 불펜을 총동원하는 작전이다.

이번에는 에이스를 오프너처럼 쓰는 ‘변칙의 변칙’을 선보였다. 글래스노우의 에너지가 떨어질 때를 예측해 불펜을 가동했다. 디비전시리즈를 성공으로 이끈 전략이었다. 그러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과 월드시리즈에서는 잘 통하지 않았다.

2020 월드시리즈 6차전 케빈 캐시 템파베이 감독은 6회말 한 점차 승부에서 에이스 블레이크 스넬을 교체했다. 하지만 후속 투수 앤더슨이 실점했고, 팀은 결국 1-3로 패했다.

탬파베이는 결국 월드시리즈 6차전에서 패했다. 탬파베이가 1-0으로 앞선 6회 말 1사 1루에서 케빈 캐시 감독이 선발 블레이크 스넬을 교체한 걸 두고 현지에서도 말이 많은 모양이다. 5⅓이닝 동안 73개를 던져 2피안타 무실점으로 호투한 투수를 너무 빨리 바꿨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부터 27년 동안 투수를 했고, 이후 투수 코치와 감독을 한 나에게도 가장, 여전히 어려운 건 투수 교체다. 마운드에서 혼을 다해 던지는 투수를 언제, 누구와 바꾸느냐는 어렵고 외로운 결단이다.

고려해야 할 요소가 너무 많다. 투수의 구위와 멘탈을 살펴야 하고, 타자와의 상대성을 고려해야 한다. 주자 유무와 견제 능력도 참고해야 한다. 직전 경기와 다음 경기까지 계산할 필요가 있다. MLB 중계를 통해 모든 투수와 감독이 같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걸 보니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원칙은 투구 교체는 가급적 빨라야 한다는 점이다. 투수의 체력과 기술, 심리의 한계를 확인한 뒤에 바꾸면 너무 늦다. 투수 교체에는 직관이 어느 정도 필요한 이유다.

MLB는 팀마다 매뉴얼이 잘 정립돼 있다. 각종 데이터를 우리보다 잘 활용한다. 그래도 수없이 실패하고 갈등한다. 야구는 결국 사람이 하기 때문이다. 멀게만 느껴졌던 MLB도 우리 야구와의 공통점을 발견하면서 조금씩 친숙해지고 있다.

2015년부터 메이저리그에서 제공 중인 스탯캐스트. 사진=MLB.com 캡처

직관이 아닌 데이터가 말한다

지난 1년 동안 내 공부의 목적은 데이터에 기반을 둔, 최신 야구의 트렌드였다. 1990년대에도 ‘데이터 야구’라는 개념이 있었다. 2000년대에는 야구를 통계학으로 설명하는 세이버메트릭스가 일반화했다.

2015년 MLB에 등장한 스탯캐스트는 몇 년 만에 정말 많은 걸 바꾸었다. 초고속카메라와 레이더 추적 기술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없는 걸 보게 해줬다. 초당 882프레임을 찍는 초고속카메라를 통해 투수의 공을 분석할 수 있다. 스피드뿐 아니라 회전수와 회전축, 이에 따른 무브먼트까지 다 나온다. 타구도 마찬가지다.

야구 룰은 100년 넘게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투구의 본질, 타격의 기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야구를 보는 시각과 방법은 몇 년 사이 급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새로운 용어와 데이터를 하나 배우면, 내가 모르고 있었던 것이 몇 개는 더 나왔다.

야구는 변하지 않았지만, 야구를 보는 방법이 달라졌다. 아니, 세밀해졌다. 정확해졌다. 젊은 선수들은 이미 데이터를 읽고 활용하는 데 익숙하다. 이들과 소통하려면 코치나 감독도 스탯캐스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물론 모든 선수가 MLB의 새 이론과 데이터 해석에 능한 건 아니다. 선수들이 인터넷을 통해 많은 정보를 얻고 활용하도록 돕는 것도 야구 선배의 몫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나도 많이 배웠다.

여러 기록과 인터뷰 자료를 보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크리스티안 옐리치(밀워키)의 말이었다. MLB에서 ‘플라이볼 혁명’이 유행할 때 그는 “난 의식적으로 발사각을 높이려 한 적이 없다. 다른 건 스윙 궤적이 아니라 사고방식이다. 발사각에 매달려 성공한 선수가 있고, 그렇지 않은 선수가 있을 뿐이다. 나는 그 가운데 있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주제에 대해 몇 시간이고 말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옐리치 말의 내용도 인상적이었지만, 서른 살도 되지 않은 선수가 자기 생각과 이론을 자신 있게 펼치는 게 놀라웠다. KBO리그 선수들은 인터뷰가 서툰 편이다. 그래도 나를 비롯한 우리 세대보다는 말솜씨가 훨씬 좋아졌다. 우리 선수들도 기회를 만들어주면 더 고민하고, 공부하며, 표현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선수들은 이미 그렇게 바뀌고 있다. 이제 선배들이 바뀌어야 같은 눈높이에서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 2006년 2월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대표팀에 합류한 김선우(오른쪽)가 선동렬 코치에게 투구 폼에 대해 묻자 선동렬 코치가 직접 시범을 보이고 있다. IS포토

조련과 육성에서 소통으로 바뀐다

1980~90년대 프로야구에서는 조련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 심지어 2000년대에도 ‘투수 조련’ 같은 군대식 단어가 사용됐다. 이런 말이 오랫동안 쓰인 건 상명하복의 문화가 실재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육성이라는 말도 유행처럼 쓴다. 프로 선수들을 여전히 학생처럼 보는 시각을 담겨 있다. 물론 육성이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학생 야구 시스템이 부실하고, 프로 선수층마저 두껍지 못한 KBO리그 팀에서는 교육의 기능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감독과 코치들은 ‘칭찬’이라는 말도 자주 쓴다. “오늘 선발 투수를 칭찬하고 싶다”는 말이 어느 순간 내게는 어색하게 들렸다. 이 말에서도 상하관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느 점이 좋았다”, “이래서 고맙다”는 표현이 좋을 것 같다.

정말 중요한 건 선수들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것이다. 그들을 당당한 프로 선수로 대하고, 그들의 얘기를 들을 준비가 됐는지 나 자신에게 묻게 된다. 선수들의 인생을 건 도전을 내가 선배로서 충분히 도왔는지 반성하게 된다.

야구를 공부할수록 느낀 건, 난 선수들을 잘못 가르쳤다는 점이다.

선수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줬다는 말이 아니다. 선수들의 눈높이로, 최신 이론과 데이터를 통해 선수들을 충분히 납득시켰느냐고 물으면 사실 할 말이 없다.

내가 투수 코치와 감독을 할 때 선수들은 내 후배들이었다. 그들은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같은 시대를 살았다. 선수 생활을 몇 년 더 했고, 일본 야구까지 경험한 내가 뭐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 방법이 수직적인 관계에서 비롯됐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선배들에게 배운 대로 후배들을 가르쳤다.

내가 그라운드를 떠난 지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난 ‘각동님’으로 불렸다. 2012년 KBO리그로 온 박찬호에 대해 조언을 해달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팔각도가 조금 벌어져 있더라”고 말한 게 화근이었다. 박찬호는 내가 늘 강조하는 하체 이동을 나무랄 데 없이 잘하고 있었다. 그래서 미시적인 부분을 말한 것인데, 아시아인 MLB 최다승(124승) 투수 박찬호를 ‘감히’ 가르치려 한다는 오해를 받았다.

또 2018년 국회 국정감사장에도 섰다. 아시안게임 대표선수들을 선발하는 과정에 부정이 있었다는 정치권의 의혹에 맞섰다. 내 억울함을 풀기는 했지만, 젊은 세대가 현실에서 느끼는 박탈감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지금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은 내 아들뻘이다. 30대가 된 아들, 지난해 결혼한 딸이 있는 부모 입장에서 선수들을 보게 된다.

집에서 귀한 아들로 자랐을 요즘 선수들은 기성세대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영리하고 똑똑하다. 정보를 접하고 해석하는 것에 익숙하고, 직관보다 데이터를 신뢰한다. 무엇보다 믿어주고 도와주면 기성세대가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잘해낸다.

한 편의 드라마 같은 MLB 포스트시즌이 끝났다. 최첨단 장비와 빅데이터로 움직이는 MLB에서도 투수 교체를 놓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그걸 보면 야구는 계산대로만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수 교체가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 몇 번의 성패로 야구는 끝나지 않는다. 기본을 잘 지키고, 원칙을 따르면 결국 이길 수 있다. 그건 팀이 가지고 있는 시스템이자 매뉴얼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신뢰라고 생각한다. 작전은 실패할 수 있다. 그러나 구성원 사이에 배려와 믿음이 있다면, 작은 실패를 딛고 결국 성공할 것이다. 그게 승리로 가는 길, 팀과 리그의 가치를 높이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선동열 야구학’ 시즌1을 마친다. 시즌1이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야구를 보는 것이었다면, 시즌2는 야구와 사람에 대해 공부할 생각이다.

나는 야구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야구 공부도 계속할 것이다. 다시는 선수들을 잘못 가르치지 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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