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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 여자 선수' 넘어 최고의 야구 선수로, 새 길의 개척자로 ['유리천장' 뚫은 킴 응, 한국 야구에도 있다 (3)]

이용균 기자 입력 2021. 01. 12.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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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라경..'최초'를 던지는 야구 소녀

[경향신문]

서울대 야구부에서 뛰는 김라경이 지난 5일 경기 남양주에서 경향신문과 인터뷰한 뒤 야구공을 허공으로 던지며 미소짓고 있다. 남양주 | 박민규 선임기자
국내 대학리그 마운드에 선
최초의 ‘여자’ 선수로 기록
정규 경기 삼진·안타 기록도
차별적 시선 점점 사라지는 중
2022년 일 여자프로 진출해
리그 운영 방식 등도 배울 것

지난해 개봉한 영화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영(이주영)은 134㎞를 던지는 투수였다. 주수영은 “야구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라고 말한다. 야구 규칙은 남녀를 구별하지 않는다. 메이저리그 공식 야구규칙 151쪽에는 ‘이 책에 나오는 남성 대명사는 해당 인물이 여성일 경우 여성 대명사로 간주된다’고 적혀 있다. 2016년 방영된 미국 드라마 <피치>의 주인공 지니 베이커는 87마일(약 140㎞)을 던지는 투수로 샌디에이고 유니폼을 입고 빅리그에 데뷔했다.

1952년 메이저리그는 ‘여자 선수와의 계약을 금지한다’는 규정을 만들었지만 1992년 이 규정도 사라졌다. 야구는 양성 모두의 스포츠지만, 현실의 벽은 상당하다. 야구는 남자의 종목, 소프트볼은 여자의 종목으로 간주된다.

김라경이 서울대 투수로 마운드에 서 있다. 오른쪽 사진은 2019년 부산 기장에서 열린 세계여자선수권대회 미국전에서 투구하는 모습. 김라경 선수 제공
김라경이 서울대 투수로 마운드에 서 있다. 오른쪽 사진은 2019년 부산 기장에서 열린 세계여자선수권대회 미국전에서 투구하는 모습. 김라경 선수 제공

지난주 경기 남양주에서 만난 김라경(21)은 “솔직히 최초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최초는 항상 무겁고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덕수고에서 공을 던졌던 안향미와 함께 영화 <야구소녀>의 모티브가 된 주인공이다. 주수영의 등번호 29번은 김라경의 번호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리틀야구를 시작했고, 중3 때는 여자 야구 국가대표에 뽑혔다. 2020년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해 대학리그 마운드에 올랐다. 대학리그 마운드에 선 최초의 여자 선수다. 프로를 노리는 엘리트 선수들을 상대로 4경기 등판해 9.2이닝 평균자책 9.90을 기록했지만 삼진도 4개나 잡았다. 투수 김라경의 공식 경기 최고 구속은 117㎞. 2019년 부산 기장 세계여자야구선수권대회 미국 전에서 기록했다. 연습 때는 119㎞까지 던졌다.

한화에서 뛴 오빠 김병근(28)의 영향이 컸다. 김라경은 “더 어릴 때부터 오빠와 캐치볼했는데 초등학교 때 야구하던 남자 애들이 ‘넌 야구 못해’라는 말에 오기가 생긴 측면도 크다”고 말했다. 초6 리틀야구 테스트를 받을 때 이미 100㎞를 던졌다. 그럼에도 여자 야구선수로 사는 삶은 충돌의 연속이었다. 김라경은 “주변에 젠더적 고정관념으로서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컸다. 오빠한테 ‘원래 이런 거냐’고 물어본 적도 있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 더 쿨하게 행동하려 애썼다”고 말했다. <야구소녀> 주수영은 ‘여자건 남자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라고 외치지만 야구는 여전히 ‘남성의 세계’로 둘러싸였고, 그들의 문법을 강요하는 곳이다.

김라경 역시 나이와 함께 성별이 갈리면서 야구할 곳을 잃었다. 리틀야구는 규정상 중1까지만 할 수 있는데 김라경 특별룰이 생겨 여자선수는 중3까지 뛸 수 있게 됐다. 고교에 진학한 뒤는 사회인 여자야구팀 ‘후라’에서 뛰었다. 주말에 서울에서 경기하고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김라경은 “부모님이 태워주시느라 고생 많으셨다”고 말했다.

서울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뒤 다시 야구를 할 수 있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신입생의 열정과 흥분은 제대로 즐길 수 없었지만 기숙사에 있어서 학교는 익숙해졌다. 김라경은 “체력훈련을 위해 매일 아침 학교 순환도로(약 5.6㎞)를 뛰었다. 여느 신입생보다는 학교 지리에 익숙하다”며 웃었다.

대학리그 데뷔는 조금 늦었다. 코로나19로 대회가 연기됐고 번트 연습을 하다가 오른손 중지를 맞아 골절상을 당했다. 지난해 7월8일 연세대와의 경기에 3루수로 데뷔전을 치렀고, 안타와 타점도 올렸다. 7월30일 서울문화예술대와의 경기에 투수로 데뷔해 2.1이닝 4안타 3실점했다. 김라경은 “고려대와의 경기 1회 1사 만루에서 삼진과 뜬공으로 실점 없이 막은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3회 이후 실점이 늘었지만, 2이닝 무실점으로 큰 박수를 받았다.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바뀌는 중이다. 대학리그에서는 차별적 시선이 사라졌다. 김라경은 “나와 승부했을 때 안타 치고 기뻐하고, 삼진당하고 화내는 모습이 정말 고마웠다. 여자 선수라 얕잡아보지 않고 야구 선수로 인정해준 것 같아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2021년은 새로운 도전을 위한 준비의 시간이다. 김라경은 “어쩔 수 없이, (여자 야구선수로서) 의무감 같은 걸 느낀다”고 했다. 선수로서 길을 만들어야 더 많은 여자 야구 선수들이 그 길을 따라올 수 있다. “그래야 부모님들이 여자아이들이 야구 하는 것을 막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일본에는 5개팀으로 된 여자 프로리그가 있고 실업팀이 활성화돼 있다. 김라경은 “2022년에 거기서 뛰는 게 목표다. 선수로서 도전해보고 싶고, 거기는 어떻게 여자 야구가 활성화될 수 있었는지 노하우와 리그 운영 방식 등도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세운 새해 목표가 일본어, 한국사, 운전, 체중감량 등이다. 김라경은 “킴 응 단장님처럼 야구 발전을 위한 역할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킴 응이 마이애미 단장 취임식에서 말했다. “볼 수 없으면 될 수 없다. 이제 여러분은 볼 수 있게 됐다.” ‘최초’라는 수식어가 익숙한 김라경 역시 누군가가 볼 수 있는 자리에 오르기 위해 새 길을 찾는 중이다.

이용균 기자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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