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KOBE] ② 코비의 '커리어하이' 81득점, 그 경이로웠던 과정

손대범 입력 2021. 1. 2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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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프볼=편집부/손대범 기자] 코비 브라이언트가 농구팬들 곁을 떠난 지 1년이 됐다. 2020년 1월 26일(미국시간), 코비는 딸 지아나와 함께 농구 훈련을 가던 중 불의의 헬기사고로 세상을 떠나 많은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NBA 선수들은 물론 전 세계 선수들, 농구팬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애도했다. NBA도 올스타전 방식까지 바꿔가며 코비를 추모했다. 그렇게 1년이 흘렀다. 점프볼 역시 그를 추억하는 의미에서 기억에 남는 코비의 순간을 준비해보았다. 

 

2006년 1월 23일(한국시간)에는 9경기가 열렸고, 나는 그날 오전 분당의 한 스튜디오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피닉스 선즈의 경기를 중계했다. 2차 연장까지 가는 접전 끝에 시애틀이 152-149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레이 앨런이 42득점을 터트리며 스티브 내쉬(28득점 16어시스트)를 좌절시켰다. 당시만 해도 NBA 인기가 그리 높지 않았기에, 이 정도 경기라면 충분히 커뮤니티에서도 화제가 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경기 후 커뮤니티에서 이 경기가 언급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더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LA 레이커스는 토론토 랩터스에 122-104로 승리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코비 브라이언트는 무려 81득점을 퍼부었다. 출전시간 41분 56초. 46개의 야투를 시도해 28개를 넣었고, 3점슛은 7개, 자유투는 20개를 던져 18개를 넣었다. 

 

81점이라는 기록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윌트 채임벌린(100득점) 이후 개인이 한 경기에서 올린 최다 득점이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로빈슨이 71점을 올린 경기도 있지만, 그때는 득점왕 경쟁에 의해 밀어주기 성격도 강했기에 감흥이 덜 했다. 그러나 이 퍼포먼스는 '찐'으로 이기려고 몸부림 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기에 더 놀라웠다.

 

코비의 81점은 당시 내가 몸담고 있던 잡지사도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는 12월 20일에도 62점을 기록했고, 당연히 우리는 62점의 모든 과정을 담아 커버스토리로 내보냈다. 

 

그런데 소식이 나간 지 겨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62점 기록을 '옛날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고, 여기에 그치지 않고 '덜 대단한' 기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고군분투, 그 자체

 

레이커스는 2006년 플레이오프에서 7번 시드였다. 샤킬 오닐과의 콤비가 깨진 뒤 한동안은 강팀으로 보기 애매했다. 2004-2005시즌에는 플레이오프조차 오르지 못했고, 결국 필 잭슨 감독이 복귀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리더십과 사생활을 둘러싼 논란도 많았다. 경기 방식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이 있었다. 당시 포털사이트 댓글의 지분은 코비가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코비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난국을 이겨나가고자 했다.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 바로 득점이다. 7번 시드임에도 불구, 코비는 그 시즌에 '금주의 선수'상을 5번 받았다. 그만큼 개인 퍼포먼스가 훌륭했다. 

 

2005-2006시즌 그가 남긴 평균 35.4득점은 그 당시 기준으로 단일시즌 평균득점 8위에 해당했다. 또한 1987-1988시즌 마이클 조던(34.98점) 이후 최다 득점이기도 했다. 한동안 35.4점 벽을 넘는 자가 나오지 않았으나, 2018-2019시즌 제임스 하든(당시 휴스턴 로케츠)이 36.1점으로 기록을 넘어섰다.

 

그 바탕에는 놀라운 득점 퍼포먼스가 있었다. 이 시즌에만 6번이나 50+득점을 기록했다. 프랜차이즈 신기록이었고, 역시나 조던 이후 최다 기록이었다(엘진 베일러의 5회). 

 

2005-2006시즌 이전까지 코비가 50점을 올린 경우는 5번에 불과(?)했다. 마지막 50+득점 경기도 2003년이었다. 

 

12월 20일 댈러스 매버릭스 전에서는 32분 53초 만에 60점을 돌파했고, 그로부터 한 달여만에 81점을 올렸다. 

 

62점을 넣을 당시 코비는 림밖에 보이지 않는 듯 했다. 

 

좌/우/정면, 골밑/외곽/중거리 가리지 않고 올라갔다. 댈러스에서 그를 막던 조시 하워드도 나쁘지 않은 수비수였지만 당해내지 못했다. 마퀴스 다니엘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손을 들고 허우적대는 일뿐이었다. 2쿼터가 지날 무렵부터는 중계진들도 기가 막히다는 듯 웃었다.

 

3쿼터 레이커스가 72점에 도달했을 때 그의 득점은 44점이었고, 댈러스에 10여점차로 앞서고 있었다. 그러나 코비의 득점력은 식을 줄 몰랐다. 중계진도 "저 친구 앞에 있는 수비자 2명도 저 친구가 뭐 할 지 알거야. 근데 어떻게 막을 지를 모르는 거지"라며 놀라워 했다.코비는 겨우 32분 만에 62점을 달성했다. 관중들은 코비를 연호했다. 

 

만약 그가 교체없이 4쿼터까지 그 페이스로 뛰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경이로운 81점 과정

 

그 답을 1달 뒤 토론토 전에서 몸소 보였다. 

 

사실, 댈러스 전과 달리 토론토 전은 출발이 좋지 않았다. 1쿼터 10점차로 밀렸다. 코비는 힘을 내기 시작했다. 자유투는 얻는 족족 성공시켰고, 3점슛 역시 깨끗히 림을 통과했다. 득점 방식은 더 다양했다. 돌파, 미드레인지 슛은 물론이고 기브앤고를 이용한 덩크슛도 있었다. 모리스 피터슨, 제일런 로즈, 에릭 윌리엄스 등이 번갈아 막아봤지만 방법이 없었다. 

 

한동안 벌어졌던 점수차는 3쿼터 들어 줄기 시작했다. 그 추격전도 코비가 주도했다. 3쿼터 중반 점수차가 한 자리로 줄자 관중의 데시벨도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가 공을 잡기만 해도 함성이 커졌고, 결국 레이커스는 3쿼터 막판 15점차를 뒤집고 역전에 성공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거의 모든 득점을 혼자 해냈다. 4쿼터에는 그가 자유투라인에 설 때마다 MVP를 연호했다.

 

4쿼터 6분경 커리어하이인 62점을 돌파할 무렵, 레이커스는 104-94로 리드하고 있었다. (그가 63점째 자유투를 넣었을 때 관중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코비의 득점쇼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로부터 1분여뒤 70점을 넘어섰고, 점수차는 17점차로 벌어진다. 

 

코비가 80점 고지를 밟은 건 종료 43.4초전이었다. 자유투 1구를 넣으면서 윌트 채임벌린의 기존 기록을 넘어 80점이 됐다. NBA 한 경기 최다득점 역대 2위. 결국 레이커스는 122-104로 역전승에 성공했다.

 

뭐든 될 것 같았던 경기였다

 

코비는 시즌 후 방한해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당시 코비는 "81점을 넣은 경기는 굉장히 편안했고, 뭐든 잘 될 거 같은 기분이었다"라고 돌아봤다. (훗날 로즈는 이 경기에 대해 "100점 아래로 준 게 어디냐"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나 코비는 다음 시즌에 31.6점을 넣은 이후 한번도 평균 30득점을 넘기지 못했다. 입을 벌어지게 만들 만한 60, 80점 퍼포먼스도 재현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아쉬워했던 것도 아니었다. 개인 퍼포먼스만큼이나 그는 승리를 바랐기 때문이다. 레이커스가 더 강한 전력으로 우승에 도전하길 기대했다. 이 과정에서 트레이드 루머도 있었고, 잡음도 있었지만 레이커스는 파우 가솔을 영입하며 다시 정상에 도전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자면, 2005-2006시즌과 81득점은 코비의 경이로운 득점력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해준 시간이자 에피소드였다. 단지, 1980년대 후반의 마이클 조던이 그랬듯 혼자만의 힘으로는 정상에 설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시즌이기도 했다. 

 

코비는 이 시즌 이후 등번호를 8번에서 24번으로 바꾸었다. 당시 이 질문에 그는 "하루는 24시간이고, 공격제한시간도 24초이다. 그 매 시간이 중요하듯, 나도 매일 최선을 다하고 싶다는 생각에서다"라고 답했다. 

 

코비는 이후 코트 안팎에서 농구에 쏟아붓는 노력만큼이나 동료들과의 관계 정립을 위해서도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샤킬 오닐의 사이드킥'에서 벗어나 리더로서 홀로서기를 위해 노력했던 것이다. 코트 안팎에서 그가 동료, 후배들에게 끼친 농구적 영향력이 본격적으로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그 무렵부터였다.

 

#사진=김민석 작가 

#기고=손대범 전 점프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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