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식의 엔드게임] 최태원 회장은 '퇴장의 품격'을 저버렸다

김식 2021. 1. 27.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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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6월 26일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쓰러진 염경엽 SK 와이번스 감독에게 위로 메시지를 전했다. 그는 직접 병문안을 갈 예정이었으나, 환자가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료진의 권고에 따라 구단을 통해 위로를 건넸다.

"쾌유를 빌며 건강한 모습으로 그라운드로 복귀하길 바란다. 야구팬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게 야구를 관람하는 것이 승패보다 중요하다."

최태원 회장의 전언은 감동적이었다. 두 달 전 그는 그룹 최고경영자(CEO)들과 가진 간담회에서 "행복이라는 목표는 돈이 희생돼도 달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의 최종 목적은 구성원의 행복"이라는 그의 경영 철학은 SK 야구단에도 전달됐다.

건강을 회복 중인 염경엽 감독은 이제 SK로 돌아올 순 없다. 지난 시즌 뒤 그가 사임한 이유도 있지만, SK가 신세계 이마트에 야구단을 팔았기 때문이다. 이 거래는 최태원 회장과 정용진 신세계그룹 부회장 주도로 이뤄졌다고 알려졌다. 26일 양측이 맺은 양해각서(MOU)에 따르면 매각 대금은 1352억8000만원이다.

2018년 한국시리즈 두산 베어스와 SK 와이번스의 6차전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최태원 SK 회장의 모습

야구계는 충격에 빠졌다. SK 와이번스의 연고지인 인천은 벌써 네 번 버림을 받았다. 1982년 원년팀 삼미를 시작으로 청보, 태평양이 자금난으로 문을 닫았다. 태평양을 인수한 현대는 인천 연고팀 최초로 한국시리즈 우승(1998년)을 차지하고, 2년 후 인천을 떠났다.

2000년 창단한 SK는 인천 팬들의 상흔을 위로했다. 닫혀있던 인천 팬들의 마음이 조금씩 열렸다. SK를 가난해서 파산하지 않을 기업, 인천을 떠나지 않을 팀으로 여겼다. 2010년 이후 매년 100만명 안팎의 팬들이 야구장을 찾았다. 서울팀 못지않은 인기와 관중 수입을 얻었다. 그 절정의 순간, SK 구단의 21년 역사가 단칼에 잘려나갔다.

야구단을 운영하는 동안 SK그룹은 급성장했다. 10년 전 하이닉스를 인수하는 등 대규모 인수합병에 성공한 덕분이다. 바이오 등 유망한 신사업에 뛰어들어 미래 전망도 밝다. 모두가 환호하는 순간, SK그룹은 야구단을 팔.아.버.렸.다.

최태원 회장의 '행복 경영'이라는 레토릭과 별개로, 기업은 이윤을 추구한다. 통신·정유 위주였던 20년 전과 달리 SK의 주력사업은 소비자와 접촉면이 줄어든 게 사실이다. 경영 판단에 따라 계열사를 얼마든지 양도할 수 있다.

문제는 명분과 절차다. SK 야구단에는 100명 가까운 선수단, 60명 정도의 직원이 있다. SK그룹이 볼 땐 아주 작은 조직이다. 그러나 300만 인천시민 중 상당수가 SK 팬(고객)이다. 이 가운데 SK 야구단이 팔릴 거라고 생각한 이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SK그룹이 승승장구하는 만큼, 더 많은 지원을 받을 것으로 기대했다.

2018년 네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SK 야구단은 2019년 정규시즌 2위, 지난해 9위로 떨어졌다.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위해 SK 오너 일가와 가까운 민경삼 대표가 지난해 10월 부임했다. 이후 선임된 류선규 단장, 김원형 감독은 모두 민 대표의 측근이다. 누가 봐도 SK그룹이 야구단에 대한 '그립'을 강화하는 그림이었다.

이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스프랭캠프 시작을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시점에서 SK 야구단이 매각됐다. 최태원 회장이 경영의 최종 목표라고 말했던 구성원들은 행복은커녕 충격과 불안에 휩싸였다. 당장 캠프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유니폼을 입는지, 무엇보다 고용 승계가 실제 어디까지 이뤄질지 모른다.

SK 야구단의 청사진은 신세계그룹의 계획과 같을 수 없다. 결국 새 오너의 비전에 따라 사람이 바뀌고, 팀이 달라지며, 구단의 정체성이 변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은 2021년 내내 이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SK그룹의 야구단 매각엔 구성원과 팬들이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다. 야구단 지분 100%를 가진 SK텔레콤 측은 "SK텔레콤과 신세계그룹은 프로야구와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협상 중"이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납득할 만한 명분조차 만들지 못했으니, '한국 스포츠 발전을 위해 SK가 프로야구를 떠난다'는 궤변이 나오는 것이다.

경영인은 돈이 안 되는 사업을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고객(팬)에게 행복을 주고, 사랑을 받는 것이 목표인 스포츠단은 일반적인 계열사와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지난 2018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SK 선수들이 최태원 회장을 헹가래하고 있다. 연합뉴스

2018년 11월 12일 최태원 회장은 최신원 SK네트웍스 회장, 최재원 SK그룹 수석부회장, 최창원 SK디스커버리부회장(SK 구단주)과 한국시리즈 6차전이 열린 잠실구장을 찾아 SK의 우승을 함께했다. 경기 후 최태원 회장은 선수들로부터 헹가레를 받았다. 야구단에 대한 관심과 동시에 형제애를 보여준 그는 얼마 후 사촌들에게 SK그룹 지분을 증여했다. '최태원 체제'의 적통성과 일가의 화합을 세상에 알리는 퍼포먼스에 야구를 활용한 것이다.

이후 SK그룹이 야구단을 불필요하게 느낄 순 있다. 그렇다 해도 최태원 회장의 출구전략은 그답지 못했다. 뛰어난 보안과 5G급 속도로 야구단을 매각했지만, 그 과정이 세련되지 못했다. 구성원은 물론 인천 팬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떠났다.

인천시민은 이미 농구단(인천 전자랜드)과 이별을 앞두고 있다. 전자랜드는 SK그룹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회사다. 몇 년째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다. 전자랜드는 결국 코로나19 직격탄을 맞고 올 시즌 개막 전 농구단 매각 의사를 밝혔다. 전자랜드를 원망하는 이들은 거의 없다.

사람들과 이별하고, 무대에서 퇴장하는 데도 품격이 필요하다. 그 대상이 고객이라면 더 그렇다. 최태원 회장은 '퇴장의 품격'을 보여주지 못했다.

김식 스포츠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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