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부메랑이 돼 돌아온 '합의서 패싱'

김형준 2021. 2. 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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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유망주의 해외이적 관련 소식에 '대승적 결단'이란 단어가 자주 붙었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해외를 포함한 더 큰 무대에 도전하는 선수 측의 요구를 구단이 당장의 이익을 조금 포기하되 받아들이면서 판 전체의 가치를 키워왔다.

키워 준 팀과 데려가려는 팀 모두에게 민폐가 되고, 결국 선수 본인에게도 부메랑이 된 '합의서 패싱'의 더 큰 문제는 K리그 구단들의 유소년에 대한 투자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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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2부 분데스리가 다름슈타트의 백승호. 대한축구협회

축구유망주의 해외이적 관련 소식에 ‘대승적 결단’이란 단어가 자주 붙었다. 큰 꿈을 이루기 위해 해외를 포함한 더 큰 무대에 도전하는 선수 측의 요구를 구단이 당장의 이익을 조금 포기하되 받아들이면서 판 전체의 가치를 키워왔다. 사사로운 이익에 얽매이지 않고, 큰 시각으로 판단하고 행동 것을 의미하는 ‘대승적’이란 표현은 2002 한일월드컵 이후 잦아진 국내 선수들의 해외진출 및 성장 과정에선 미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대승적 결단’에 따른 분쟁이 수면 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구단들이 유망주의 해외진출 시 작성해 둔 서면 합의가 무시되면서다. 지난해엔 기성용(32)이, 올해엔 백승호(24)가 K리그1(1부리그) 최강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전북으로 향하려다 각각 FC서울과 수원삼성과의 과거 합의서 내용이 해결되지 않으면서 분쟁으로 번진 모습이다.

이 과정에서의 공통점 가운데 하나는 합의서 작성 시기보다 구단의 명성은 떨어지고, 선수 명성은 크게 높아졌단 점이다. 구단들로선 당시 유망주들의 앞길을 가로막기 어려운 대신 훗날 돌아와 팀의 자산이 돼 주길 바라며 안전장치 차원에서 내민 서류인데, 선수 쪽에선 ‘지금의 그 팀 명성은 예전과 다르다’거나, ‘어차피 이젠 나의 몸값을 지불하기 어려운 팀들’이라는 판단이 선 탓인지 과거의 약속을 가볍게 여기거나 아예 무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구단들도 좌시하지 않았다.

책임은 결국 부메랑이 돼 돌아와 선수를 다치게 했다. 합의를 매끄럽게 이행하지 못한 기성용은 구단과 감정이 상했고, 반 년이 지나서야 전북이 아닌 서울 유니폼을 입고 K리그에 복귀할 수 있었다. 백승호도 일단 수원과 실타래를 풀어야만 전북을 포함한 어느 팀이든 이적이 가능해진 상황이다. 두 차례 모두 물러설 수밖에 없는 전북으로서도 찜찜한 전력을 남긴 셈이다.

지난해 12월 FC서울에 입단한 박정빈. FC성루 제공

비슷한 시기엔 전남 유스 클럽인 광양제철중 출신 박정빈(27)의 합의서가 뒤늦게 등장해 논란은 더 커졌다. 이미 지난해 12월 서울과 계약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먼저 대화해야 했던 전남을 쏙 빼놨다. 전남에 따르면 박정빈은 광양제철고 진학 전 구단 모르게 독일 볼프스부르크 입단을 확정했고, 법적 분쟁에서도 억대의 지급명령 판단을 받았다. 이후 박정빈은 K리그로 오면 반드시 전남으로 돌아와야 하고, 위반 시 법원으로부터 지급명령 받은 금액을 전남에 상환한다는 합의서를 쓰고 독일 무대를 향했다.

백승호 사례와 달리 이번엔 아예 계약 이후 ‘합의서 패싱’이 드러난 사례라 배상 절차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전남은 박정빈 측에 내용증명을 보냈고, 서울은 “박정빈 측이 전남에 대한 배상 의지가 확실하다”고 했다. 그러나 최근 독일 생활을 일단 접고 국내로 돌아온 것으로 전해진 박정빈 부친은 구단 측과 연락해 조만간 상환 방법 등을 제시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키워 준 팀과 데려가려는 팀 모두에게 민폐가 되고, 결국 선수 본인에게도 부메랑이 된 ‘합의서 패싱’의 더 큰 문제는 K리그 구단들의 유소년에 대한 투자 의지를 꺾을 수 있다는 점이다. 한 구단 관계자는 “이런 과정이 되풀이된다면 구단은 무엇을 바라보고 투자하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반대로 부모와 에이전트들도 선수 미래가 걸린 합의서 작성엔 신중해야 한다는 게 현장 목소리다. 향후 구단의 몽니에 악용될 수 있다는 점도 반드시 따져봐야 한단 얘기다.

김형준 기자 mediaboy@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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