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오마이뉴스

때가 어느 땐데.. 금메달 못 땄다고 배신 낙인, 강제 소환도

윤현 입력 2021. 08. 04. 10:54

기사 도구 모음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 쏟아지는 SNS 비난 도 넘었다.. 강제 송환에 IOC 개입

[윤현 기자]

 국가 명예를 훼손했다며 자국으로 강제 송환될 뻔했다가 일본 공항에서 구출된 벨라루스 육상 대표 크리스치나 치마노우스카의 망명을 보도하는 NHK 갈무리.
ⓒ NHK
 
올림픽의 목표는 오로지 금메달이었다. 선수 개인을 넘어 한 국가와 민족의 사명을 짊어진 도전이었다. 죽을 힘을 다했더라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에 그치면(?) 마치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정상에 오른 금메달리스트에게 많은 박수와 보상이 돌아가는 것은 당연하지만, 금메달이 아니거나 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경기 그 자체를 즐기는 문화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선수들도 마찬가지다. 메달이 없어도 당당하게 도전을 즐겼다며, 다음번에 더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며 환하게 웃는다. 

오히려 메달 색깔보다는 부상이나 역경을 딛고 최선을 다한 선수들의 스토리가 더 많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아직도 부족하지만, 이른바 '비인기' 종목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예전보다 크게 늘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단거리 수영에서 결선에 오른 황선우는 금메달리스트 못지않은 스타로 떠올랐고, 남자 높이뛰기에서 한국 신기록을 세운 우상혁은 4위로 아깝게 메달을 놓쳤으나 전혀 실망한 티 없이 환하게 웃었다. 탈락이 확정된 후 보여준 멋진 거수경례는 외신에서도 화제가 됐을 정도다.  

하지만 여전히 몇몇 나라들은 과거에 머물고 있다. 금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에게 국가를 배신했다는 낙인을 찍어 비난을 퍼붓거나, 국가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올림픽 도중 선수를 강제 송환하려는 일도 벌어졌다. 

경기 출전 거부했다는 이유로 강제 송환... 결국 '망명' 선택

이번 도쿄올림픽에 벨라루스 여자 육상 대표로 참가한 크리스치나 치마노우스카는 대회 도중 자국에 강제 송환될 뻔 했다가 간신히 구출됐다. 

100m, 200m 등 단거리 경주가 주종목인 치마노우스카는 코치로부터 갑자기 1600m 계주에 출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부당하다고 느낀 그는 상의도 전혀 없이 한 번도 뛰어본 적 없는 계주 경기에 강제로 출전하라는 부당한 지시를 받았다며 자신의 소셜미디어를 통해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자 벨라루스국가올림픽위원회(NOC RB)는 지난 1일 치마노우스카에게 본국으로 귀국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코치들이 그를 차에 태워 공항으로 데려갔다. 하지만 비행기에 탑승하기 직전 공항 경찰에 도움을 요청했고, 신고를 받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와 일본 정부가 개입하면서 강제 송환을 막았다. 

일본 경찰의 보호를 받으며 인근 호텔로 옮겨진 그는 벨라루스로 돌아가면 국가 명예를 훼손했다는 이유로 무거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며 제3국으로 망명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치마노우스카의 사연이 알려지자 벨라루스와 인접한 폴란드가 망명을 받아주겠다고 나섰고, 곧바로 도쿄에 있는 폴란드대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벨라루스 대통령 "메달 못 딴 선수들, 배고픈 줄 몰라"
 
 주일 폴란드대사관의 벨라루스 육상 대표 크리스치나 치마노우스카 보호 소식을 전하는 NHK 갈무리.
ⓒ NHK
 
주일 폴란드대사관은 공식 트위터 계정에 "치마노우스카는 건강하며, 우리의 보호를 받아 안전한 상태"라며 폴란드 대사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일본 공영방송 NHK에 따르면 곧 폴란드로 출국할 예정인 치마노우스카는 이날 외신과의 화상 기자회견에서 "코치가 나를 공항으로 데려가며 벨라루스로 돌아가면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며 "나는 아직 24세로 젊으며, 앞으로 더 많은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도 "벨라루스 정부의 행위는 올림픽 정신과 기본권을 정면으로 거스른 것으로 절대 용인될 수 없다. 인도적 차원에서 망명을 허가한 폴란드 정부의 결정을 환영한다"고 전했다. 

벨라루스는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의 철권 통치 하에 놓여있다. 1994년부터 27년째 정권을 잡고 있는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해 가을 치러진 대선에서 6선에 성공했지만, 벨라루스에서는 그가 개표를 조작해 부정 선거를 저질렀다며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시위대를 유혈 진압하고 3만 명 넘게 체포했다. 이런 전력 때문에 미국과 유럽 등 서방 국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고 있는 데다가, IOC는 벨라루스올림픽위원회 위원장을 겸하고 있는 루카셴코 대통령의 도쿄올림픽 개회식 및 경기 참석을 금지하는 등 사실상 제재 명단에 올려놓은 상태다. 

그는 최근 한 연설에서는 도쿄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자국 선수들을 향해 "배고픔을 모르기 때문"이라며 "그들은 국가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지만 국민들이 메달을 보고 싶어하는 것을 잊었다"고 맹비난했다. 그러면서 "아프리카 선수들은 올림픽에서 성공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고, 반면에 실패하면 빵 한 조각도 못 먹을 정도로 힘들어진다"고 비교하기도 했다. 

금메달 못 딴 중국 선수들에 도 넘은 비난... 중국도 '당황'

중국에서도 지난달 26일 탁구 혼합복식 결승전에 나선 쉬신-류스원이 일본 선수들에게 패해 은메달에 그쳤다는 이유로 중국 누리꾼들의 거센 비난을 받아야 했다. 쉬신과 류스원은 결국 "중국 국민이 받아들이지 못할 결과를 얻었다"며 "정말 죄송하다"라고 눈물을 흘렸다.

배드민턴 남자 복식 결승전에서 대만의 리양-왕치린 선수에게 패한 중국의 리쥔휘-류위천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누리꾼들은 특히 미국, 일본, 대만 등 관계가 껄끄러운 나라의 선수들과의 경기에서 패한 자국 선수들을 향해 매국노라며 인격 모독에 가까운 비난을 쏟아내고 있다.
 
 도쿄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놓친 중국 선수들에 대한 과도한 비난을 보도하는 BBC 갈무리.
ⓒ BBC
 
영국 공영방송 BBC는 3일 "특정 국가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주의 광풍이 불고 있는 중국에서 올림픽 메달은 스포츠에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특히 극단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올림픽 금메달 순위는 곧 국가의 존엄성이며, 금메달을 놓친 것은 조국을 실망시킨 것으로 간주한다"고 소개했다.

그러나 선수들을 향한 비난이 도를 넘어서고, 외신도 비판의 목소리를 내자 중국은 뒤늦게 진화에 나섰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중국 국민 모두가 승패에 대해 합리적인 시각을 갖고, 올림픽 정신을 만끽하길 바란다"고 자제를 촉구했다.

미 아이오와주립대학의 조너선 해시드 박사는 BBC에 "중국 공산당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온라인의 민족주의를 이용해왔지만, 이번 사태는 민족주의자들이 도를 넘어 화를 내면 국가도 통제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준다"라며 "민족주의 정서를 악용하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Copyrights ⓒ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시각 인기영상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