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첫 태권도 메달리스트 주정훈 "동정의 대상이 아닌 '동경의 대상'이 되자"

도쿄=황규인기자 2021. 9. 5.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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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도쿄 패럴림픽 태권도 남자 79kg급 동메달리스트 주정훈. 지바=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이 되자’고 이야기했는데 정말 동경의 대상이 됐습니다.”

한국 태권도 선수로는 처음으로 패럴림픽(장애인올림픽) 메달리스트가 된 주정훈(27·SK에코플랜트)은 4일 오전 일본 도쿄 미나토구(港區) 베이사이드 호텔 아주르 다케시바(竹芝) 내 ‘코리아 하우스’에서 취재진과 만나 이렇게 말했다.

패럴림픽공동취재단과 인터뷰하는 주정훈. 도쿄=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주정훈은 태권도가 처음 정식 종목이 된 2020 도쿄 패럴림픽에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전날 남자 75kg급 동메달을 차지했다.

주정훈은 전날 이 대회 첫 경기였던 16강전에서 마고메자기르 이살디비로프(30·러시아패럴림픽위원회)에 31-35로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패자부활전에서 2연승을 거둔 뒤 ‘리턴 매치’로 열린 3, 4위 결정전에서 이살디비로프를 24-14로 꺾고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메달 확정 후 경기장에 앉아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던 주정훈은 “경기 시작 전부터 ‘아, 오늘 하루가 내 태권도 인생 같다’는 생각을 했다”면서 “메달을 따고 났더니 부담감과 압박감을 털어냈다는 생각이 들어 온갖 감정이 북받쳐 올라왔다”고 말했다.

동메달을 딴 뒤 오열하고 있는 주정훈. 지바=패럴림픽공동취재단
주정훈은 태어난 직후부터 맞벌이를 하던 부모님 대신 할머니 밑에서 컸다. 두 살 때 할머니가 지리를 비운 사이 농기구에 오른손이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손목 아래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가장 하얗지만 그래서 가장 쉽게 더러워지는 도복처럼 태권도는 주정훈에게 희망이자 절망이었다. 원래 비장애인 전국 대회에서 4강까지 오르며 기대를 모으던 주정훈은 사춘기 시절 경기장 곳곳에서 들리는 수근거림에 상처를 받아 고등학교 2학년 때 태권도를 접었다.

태권도가 패럴림픽 정식 종목이 되면서 주정훈은 태권도복을 다시 꺼내 입었다. 2017년 12월 장애인 선수로 변신한 그는 올해 요르단 암만에서 열린 아시아 선발전을 1위로 통과하면서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도쿄행 티켓을 거머쥐었다.

하루에 두 번 맞대결을 벌인 이살디비로프를 안아주고 있는 주정훈(오른쪽). 지바=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주정훈은 “사실 저말고 다른 선수(김태민)도 있었는데 저만 패럴림픽에 출전하게 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 같다. 먼저 길을 닦아 주신 선배들도 계셨다”며 몸을 낮춘 뒤 “이제 내가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어야 한다. 실력이 조금 부족해도 강한 정신력과 의지가 있다면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실 첫 번째 경기 도중 다리 등을 많이 다쳤다. 그래도 다리가 부러져도 발차기를 멈추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임했다. 한국 장애인 태권도를 대표하는 선수로서 한국 태권도가 외국에서 무시당하지 않게끔 정신력으로 버텨내려 했다”고 덧붙였다.

주정훈의 인터넷 메신저 자기소개 문구.
주정훈은 인터넷 메신저 자기소개 문구에도 ‘강한 정신력’이라는 다섯 글자를 써놓았다. 배경 이미지에는 “가장 위대한 영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음이 아니라 실패할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는 문구를 적어 뒀다. “안 된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끝까지 해보는 사람(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이라는 ‘논어’ 구절을 변주한 문장이다.

주정훈은 “솔직히 장애가 있기 때문에 남들과 틀리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런데 (대한장애인체육회 이천) 장애인선수촌에 들어가고 나서 장애는 그저 남들과 다를 뿐이라는 걸 알게 됐다”면서 “나는 뒤늦게 알았지만 장애가 있는 유년기, 청소년기 여러분들도 ‘내가 남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하루 빨리 밖으로 나와야 동경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많이 도전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2020 도쿄 패럴림픽 경기에서 발차기 공격을 선보이고 있는 주정훈. 지바=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주정훈에게도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 있다. 2024 파리 패럴림픽 금메달이다.

주정훈은 “파리 패럴림픽 경기장을 미리 찾아봤다. 꼭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대회를 통해 금메달은 가장 많이 노력한 사람이 가져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파리에선 저도 1등을 할 수 있도록 죽어라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 장애인 태권도 실업팀은 비장애인 팀처럼 합숙 훈련을 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 정식 실업팀이 생기면 기량 발전에 크게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지원을 부탁했다.

계속해 “패럴림픽보다 먼저 내년 세계선수권대회와 장애인아시아경기 준비를 해야 한다. 이번 메달이 동료들에게 더욱 절실함을 느끼게 해줬을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사람들이 장애가 있다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편견을 깰 수 있도록 더욱 많이 노력하겠다”는 말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2020 도쿄 패럴림픽 시상대에서 두 팔을 높게 쳐든 주정훈. 지바=패럴림픽사진공동취재단
취재진 질문이 끝나자 주정훈이 취재진에게 부탁 아닌 부탁을 하나 했다. “제가 V로그를 찍고 있거든요. 웃으시면서 ‘파이팅’이라고 크게 한 번만 외쳐주세요.”

편견 가득한 세상을 향해 오른쪽 로켓 주먹을 발사한 ‘태권V’는 어느새 주전자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해맑게 웃는 철이가 되어 있었다.

도쿄=황규인기자 kini@donga.com·패럴림픽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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