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 이전에 '상천'이 있었다..고(故) 이상천의 AVG 12.5

권수연 2022. 6.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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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 '당구의 신'으로 불렸던 고(故) 이상천, Carom

(MHN스포츠 권수연 기자) 현재 PBA는 개막전 '2022-23 경주 블루원리조트 PBA-LPBA 챔피언십'을 한창 진행중이다. 

이번 대회는 기존 강호들 말고도 새로운 뉴페이스들이 반가운 프로데뷔를 알리며 주목받았다. 여자부에서는 두 명의 신예 프로가 특히 주목받았다. 국내 아마추어 퀸으로 불리는 김진아(하나카드)가 LPBA에 본격적으로 발을 디뎠다. 

또 주목받은 한 명의 선수는 국내 당구의 신으로 불렸던 고(故) 이상천의 외동딸인 '올리비아 리(30)'다. 

올리비아 리는 LPBA 128강전을 조 1위로 통과한 뒤 인터뷰를 통해 "사실은 프로당구 선수로 나설 마음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서 출전했다"고 말했다.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 나선 선수들과 달리 올리비아 리는 "나는 선수로서 나를 내세울 마음은 없다"고 손을 내저은 점이 독특하다. 그가 프로 타이틀을 단 이유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모두 아버지 이상천 때문이다.  

당구팬들이라면 딕 야스퍼스, 다니엘 산체스, 토브욘 브롬달, 그리고 현재 국내에서 웰컴저축은행의 팀 리더로 활약하고 있는 프레드릭 쿠드롱이 한데 묶여 '3쿠션 4대천왕'이라고 불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당구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당구여왕' 김가영과 지금은 정계로 진출한 차유람의 이름 정도는 익히 알고있다. 

생전 '당구의 신'으로 불렸던 고(故) 이상천, Carom

그러나 살아 생전 '예술구의 신'으로 불리던 이상천은 세상을 떠난 뒤 당구팬들을 제외하고 현재 2030 젊은 층에게는 그 이름마저 흐릿한 실정이다. 대구에서 영어교사로 일했던 딸이 세간의 편견을 감수하고 큐대를 잡고 나선 이유다. 

1954년 생 이상천은 현재 3쿠션계를 주름잡는 '4대천왕'을 논하기 전 한 수 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응용수학과에 재학하던 도중 당구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다. 이후 서울대를 중퇴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일명 '도장깨기'에 나섰다.

그에게 도전하지 않는 선수들에게는 비정상적인 핸디캡을 제시하며 경기에 몰두했다. 4구를 처음 배우고 3개월만에 300점을 쳤다. 일반인이 년 단위로 투자해야 얻을 수 있는 실력을 이상천은 단 몇 개월만에 터득했다. 

1982년 전국체전에서 우승하고 1987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상천은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세계를 무대 삼아 나섰다. 당해 미국선수권, 1991년 베를린 월드컵, 1992년 브뤼셀 월드컵 등 국제대회를 휩쓸며 신들린 감각을 자랑했다. 2002 부산 아시안 게임에서는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미국에서는 상 리(Sang Lee)로 불렸다. 

생전 '당구의 신'으로 불렸던 고(故) 이상천, Carom

길목보는 눈은 인공지능에 가깝지만, 인공지능을 뛰어넘는 우아하고 자유로운 감성샷을 구사했다. 컴퓨터보다 정확하지만, 계산에 얽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가 1993년 세계3쿠션 선수권 대회에서 세운 경이로운 애버리지 12.5는 현재까지 아무도 범접한 선수가 없다. 4이닝만에 50점을 친 것이다.

1996년 한국 오픈 월드컵 당구대회에서 30대 초반의 나이로 마르코 자네티와 벌인 시합은 당구팬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날카롭게 끌어치는 신들린 공격에 지켜보던 관중들이 이마를 닦으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9세의 애띤 산체스와, 청년 티를 벗지 못한 쿠드롱 역시 그와 큐를 맞댄 전적이 있다. 

당시 한국에서 당구장은 자욱한 담배연기, 불량한 이미지의 무리들이 몰려다니는 '노름판'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했다. 프로급 실력을 가진 재야의 고수들조차 내기 당구로 먹고살던 시절이었다. 세계적인 당구 지존에 올라선 이상천은 후련하게 국내로 돌아왔다.

이후 그는 대한당구연맹 4대 회장에 오르며 전방에 서서 국내 당구장의 나쁜 이미지를 걷어내고, 올바른 실력과 매너를 갖춘 선수들을 키우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 스포츠로서의 당구를 만들겠다"며 당구인으로서의 꿈을 완전히 펼치기도 전에 위암이 그를 급습했다. 향년 50세, 당구의 신은 2004년 10월 19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구의 신' 故 이상천의 딸 올리비아 리가 올해 LPBA 무대에 첫 발을 디뎠다, PBA 제공

아버지를 위해 용기내어 나선 올리비아 리는 비록 LPBA 64강에서 미끄러졌지만 궁극적 목표인 '아버지 이름 알리기'는 멈추지 않는다. 

고(故) 이상천의 이름을 당당히 걸고 나설 수 있는 유일한 선수, 올리비아 리의 도전에 다시 한번 눈이 모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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