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인 '코리아 유나이티드'의 탄생..어떻게 구성됐나 [국영호의 스포츠人사이드#8]

국영호 2022. 3. 1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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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년 전인 1954년 3월 스위스월드컵 예선 13조에서 사상 처음 일본을 상대한 한국 축구대표팀은 남한은 물론, 북한, 여기에 재일동포 선수까지 망라된 것으로 확인됐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이북’ 출신 선수들이 선발된 것은 자연스러우나 재일동포까지 포함된 사실이 매우 흥미롭다.

당시만 해도 대표 선발을 위한 청백전이 있던 시절이지만, 강추위가 엄습한 시기였던만큼 그 과정은 생략한 것으로 보이며, 1월쯤 선임된 이유형 감독과 배종호 코치, 일부 축구협회 이사들이 머리를 맞대 1월 28일 대표팀 구성을 완료했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반년쯤 되는 시점이라 대표팀 구성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의구심이 들 수도 있지만, 전쟁 중에 군팀과 일부 기업팀이 활성화하면서 꾸준히 축구대회를 열었기에 가능했다. 대표팀은 한일전이 결정된 전년 4~5월에는 동남아 원정을 떠나 13차례 평가전을 치르기도 했다.

‘남북’ 팔도 최고 선수 선발
대표팀은 그렇게 2월초부터 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성남중학교에서 18명의 ‘태극전사’들로 소집 훈련을 시작했다. 주요 남북한 출신 선수들이 모두 선발된 게 특징이었다. 과거 경평전을 통해 으르렁거렸던 자존심 셌던 남북 선수들이 한데 뭉친 것이었다.

남한에서는 당시 최고 골잡이 중 한 명이었던 전북 김제 출신 정남식을 비롯해 서울 출신인 민병대, 김지성, 함흥철, 최광석 등이 뽑혔다. 북한 출신으로는 평남 진남포 출신의 정국진, 함남 함흥 홍덕영, 평양 출신의 주장 주영광, 박규정, 박일갑, 최정민 등이 선발됐다. 이유형 감독도 황해 신천 출신이었다.

‘지금의 안정환’ 최정민 발탁
이들 중 주목할 선수는 평양 출신의 최정민이다. 그해 3월 최초의 한일전 2경기에서 연속골을 넣은 (것으로 알려진) 최정민은 북한 대표로 뛰었다가 1.4후퇴 때 남하해 기업팀과 군팀을 거친 끝에 한국 대표로 선발됐다.

참고로, 최정민은 당시 한일전 맹활약을 디딤돌 삼아 1950~60년대 아시아 무대를 호령하는 스트라이커로 우뚝 서는데, 최고의 실력은 물론 잘 생긴 외모, 미스코리아 출신(서정례 씨)과 결혼 등 지금으로 따지면, 안정환과 같은 스타로 발돋움했다(※홍콩 무대 진출은 정부 고위층 반대로 무산).

‘최정민의 100m 기록이 11초2. 국내에서는 물론 아시아에서 축구선수로는 최정민을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 현 대표팀의 차범근이 11초4(컨디션이 아주 좋을 때는 11초3)로 아시아 제1의 자리를 자키고 있으니까 아직 최정민 만큼 빠른 축구선수가 아시아지역에서 태어나지조차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정민은 빠른 것만으로 유명한 것이 아니고 무서운 왼발 슈팅의 위력으로 더욱 뛰어난 위치를 확보할 수 있었다. 툭툭 한두 번 볼을 건드리다가 길게 때려놓고 화살처럼 달리는 주력과 돌파력을 막아낼 길이 없고 걸렸다하면 대포알처럼 쏘아대는 왼발슈팅의 위력은 감당할 방법이 없어 당시 아시아지역에서는 그의 다리를 ’1백만불짜리‘라고들 했다.’(주간스포츠, 1977.3.30.)

‘재일동포 1호 국대’ 이석의 합류
태백클럽의 리더였던 이석의. 재일본대한축구협회 홈페이지
1954년 3월 1일 일본 도쿄에 입성한 대표팀은 재일동포 선수까지 합류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름은 이석의(李錫儀)다. ‘재일본대한체육회사’에는 ‘한국 대표 선수에 재일동포 이석의 선수(주오대 축구부)가 급거 발탁돼 정식 멤버로 등록됐다’고 기록됐다. 재일동포가 한국 모든 스포츠 통틀어 최초로 ‘국가대표 선수’에 선발된 것이다(※감독 및 임원 제외).

1996년 일본에서 발간된 <한일 킥오프의 전설>에는 ‘이석의가 두 차례 국내 심사를 거쳐 선발됐다’는 당시 재일본대한체육회 김동춘 이사의 증언도 있다. 물론, 갑자기 합류하다보니 기존 남북한 선수들의 반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석의는 당시 한일전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2년 뒤 일본 도쿄에서 열린 1956년 멜버른올림픽 2차전에는 출전해 활약했다. 지금까지는 지난 2000년 박강조가 대표팀에 선발된 게 재일동포로서 최초의 기록으로 보도되어 왔으나 정정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이석의에 대한 정보는 극히 제한적이다. ‘재일본대한축구협회’는 ‘1960년 태백클럽을 결성했는데 주오대 출신 이석의가 리더가 되어 일본팀들을 꺾고 일본축구계의 전력 형성에 기여했다’고만 짤막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이석의는 남북 주축의 대표팀에 해외동포로서 최초로 선발된, 한국과 일본을 잇는 상징적인 선수로 의미가 크다고 봐야할 것 같다.

다만,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재일본대한체육회, 재일본대한축구협회 등 가능한 모든 채널을 통해 봤지만, 이석의 사진은 구할 수가 없었다. 이석의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으로 전해진다.

‘코리아 유나이티드’의 탄생
이석의의 합류로 당시 대표팀은 한국에 뿌리를 둔 선수 가운데 최고들만을 뽑아 ‘태극호’를 구성한 셈이 됐다. 이름하여 ‘코리아 유나이티드’(Korea united)다. 지금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유례없는 일로 평가된다.

‘코리아 유나이티드’는 그렇게 사상 첫 한일전에서 1차전 5-1 승리, 2차전 2-2 무승부를 기록하면서 승점 3(※당시에는 승리팀에 승점 2 부여)을 획득해 스위스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사상 최초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었다.

해방 이후 한일 양국이 정상국가 지위를 갖고 처음 맞붙은 대결에서, ‘코리아’가 단합(united)해서 일본을 꺾은 역사적인 장면으로 평가하기 충분하다.

두 차례 방송 리포트와 ‘스포츠人사이드’를 통해 집중 추적 및 분석한 ‘1954 최초의 한일전’은 이렇듯 커다란 의미가 있었다. 매우 중요한 역사임에도 소홀했고, 간과했던 기록을 찾아냈다는데서 의의가 있다고 본다.

[국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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