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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까탈스러운 이치로, 뜻밖의 수상 소감

조회수 2017. 12. 27. 12:4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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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우익수 스즈키 이치로의 글러브 이야기

그는 은둔의 고수다. 별 일이 없으면 결코 자신을 드러내는 법이 없다. 그러다 보니 미디어와 관계도 띄엄띄엄하다.

당연히 기자들에게 별로 친절한 성격이 아니다. 자기는 앉고, 상대는 서서 얘기하는 경우는 일상이다. 아예 등을 돌린 채 문답을 주고 받는 일도 흔하다. 아무리 길게 질문해도, 대답은 늘 간단하다. 그마저도 감지덕지로 여기는 일본 보도진들이 꽤 있다. 몇 시간 기다려 달랑 코멘트 한 줄 얻으면 다행이다.

특히 요즘은 더 꽁꽁 숨었다. 자신의 처량한 처지 탓이다. 원 소속팀에서는 일찌감치 방을 뺐다. 불러만 주면 어디라도 갈 태세다. 하지만 그게 만만치 않다. 오라는 데가 없다. 곧 45살이 되는 외야수다. 관심 가질 곳이 어디 있겠나. 사람들 마주치면 피차 곤란하다. 묻기도 괴롭고, 대답도 즐겁지 않다.

그러다가 외나무 다리가 등장했다. 자기 이름을 딴 어린이 야구대회였다. 먼 곳이라면 핑계라도 있다. 하지만 쉬고 있는 고향집(아이치현 도요야마시) 근처였다. 폐막식/시상식 때 얼굴이라도 비춰야 도리 아닌가. 참석한다는 소식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느냐였다. 차마 입이 안 떨어져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였다. 크리스마스의 기적이 일어났다. 모두의 수고를 덜어준 구세주가 등장한 것이다. 참가자였던 초등학생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이치로상, 이제 일본으로 돌아오실 건가요?”

천하의 ‘뻣뻣남’도 어쩔 수 없다. 아이들을 외면할 수는 없지 않은가. 특유의 빙빙 돌리기 말투가 시작됐다. “가능성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지요. 제로가 아닌 이상 무엇이든 지 가능하다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3년 전에도 비슷한 기분이었어요. 나이가 문제인 것 같네요.” 대답이 이걸로 끝이었으면 실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누군가, 야구 선수로 빙의한 철학자 아닌가. 멋들어진 비유가 작렬했다. “마치 애완동물 가게에서 팔다 남은 큰 개가 된 것 같아요.” 모두의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내 손에 다른 무게나 감각이 남는 것이 싫다”

‘큰 개’의 일생은 오직 야구뿐이다. 마치 도를 닦는 것 같다. 모든 생각과 일상이 그곳에 맞춰졌다. 밥 먹는 것부터, 앉는 것, 걷는 것, 자는 것까지 모두 그렇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 밥 먹는 것 = (시즌 중) 매일 아침 식사 메뉴는 똑같다. 예전에는 카레라이스, 요즘은 페파로니 피자다. 식성 때문이 아니다. 혹시 이것저것 먹다가 컨디션이 달라질까를 염려해서다.

※ 앉는 것 = 소파는 NO, 딱딱한 의자만 택한다. 허리를 생각한 탓이다.

※ 걷는 것 = 경기 전에 스파이크를 신으면 계단을 피한다. 장애인용 슬로프를 이용한다. 발목이 삐끗할까봐서다.

※ 자는 것 = 전용 베개가 있다. 원정지 어디를 가나 가지고 다닌다. 물론 목의 안녕을 위해서다.

이렇게 모든 것이 철두철미한 성격이다. 그러니 야구장에서 쓰는 용품은 오죽하겠나. 배트, 스파이크, 유니폼에 대해서는 관심과 집착이 거의 병적인 수준이다.

프로 초창기인 오릭스 시절 때였다. 그러니까 혈기왕성한 20대 초반 시절이었다. (아마 삼진을 당했던 지) ‘욱’ 해서 방망이를 집어던졌다. 그걸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평생 가장 창피하고, 후회스러운 순간이었죠. 배트나 글러브는 도구가 아니예요. 내 정신과 몸의 일부나 다름 없습니다.”

그가 가장 질색하는 것이 있다. 자신의 용품에 남이 손대는 것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남의 것도 절대 만지지 않는다. 손에 다른 무게나, 감각이 남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늘 깔끔하게 닦고, 쓸고, 왁스칠한다. “깨끗하게 직접 손질한 글러브로 훈련한 것은 몸에 남는다. 그런 기억은 계속 몸 속에 새겨진다. 하지만 더러운 글러브로 플레이 하고 있으면 그런 운동은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런 의미가 크다.”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노년의 명인이 만난 고약한 고객

쓰보타 노부유시는 오사카 태생(1933년생)이다. 초등학교 때 패전을 맞았다. 15살. 중학생이어야 할 나이에 공장으로 갔다. 야구 공과 글러브 만드는 라인에서 잔심부름을 도맡았다. 눈썰미와 손재주가 좋았던 탓에 일찍 인정받았다. 머지 않아 A급 일꾼이 됐다. 제법 유명한 프로 선수들이 쓰는 것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스즈키 게이시(긴테쓰 투수ㆍ통산 317승) 상은 무거운 글러브를 좋아했어요. 850그램을 넘어야했죠. 반대로 히가시오 오사무(니시데쓰 투수ㆍ251승) 상은 540그램을 넘으면 안됐죠. 스즈키 상은 투구 폼의 리듬을 이용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무게가 필요했던 거예요. 그러나 히가시오 상은 정교한 컨트롤을 위해 가벼운 글러브가 편했던 거죠.”

일본 뿐만이 아니었다. 나중에는 미국까지 명성이 알려졌다. 1970년대부터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를 찾아 워크샵을 열었다. 바비 발렌타인이 첫 손님이었다. 이후로 조 모건, 피트 로즈, 더스티 베이커를 이어 배리 본즈, 데릭 지터, A 로드까지 고객이 됐다. ‘신의 손(God’s Hand)’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일본 정부에서 주는 훈장까지 받았다. 명인의 칭호는 당연했다. 그러나 말년에 가장 고약하고, 까다로운 손님을 맞게 됐다. 1994년 처음으로 200안타를 돌파하며 혜성과 같이 떠오르던 스타였다. 타격도 타격이지만, 예술같은 수비가 일품이었다. 그걸 보기 위해 오른쪽 관중석에 그만의 ‘존(zone)’이 생길 정도였다.

“아주 특별했죠. 수비를 정말 잘하는 선수였잖아요. 그래서 더욱 신경이 쓰였죠.” 60년 동안 한 길을 걸었던 장인이 기억을 더듬었다. “미국산 소만 써요. 생후 3~6개월 사이에 거세된 숫소라야 해요. 그걸 2살까지 키운뒤 머리 뒤쪽 등에서 얻는 가죽으로 재단하죠. 1마리에서 글러브 0.5~1개 밖에 못 얻어요.”

하지만 여기까지는 시작에 불과하다. “그의 글러브를 만들 때는 늘 그의 플레이를 머리 속에 그립니다. 손과 손가락의 감촉을 상상하죠. 인상 깊은 수비에 대한 신문 기사는 모두 오려놨어요. TV로 본 멋진 수비 장면은 계속 리플레이 하면서 뇌리에 새깁니다.”

명인이 설명하는 글러브의 특징은 3가지다. ① 부드럽고 ② 가볍고 ③ 잘 열려야 한다. 미국 진출 후에는 ④ (공을 잡는) 포켓을 더 깊게 했다. 천연 잔디가 많은 특성을 고려한 것이다.

“가볍고 부드러운 것은 다루기가 어려워요. 특히 미국처럼 타구가 강한 곳에서는 더 그렇죠. 이치로 상이니까 (핸들링이) 가능한 겁니다.”

이치로와 쓰보타 명인.             시애틀타임즈 캡처

심혈을 기울인 6개 작품에 가차 없는 불합격 판정

쓰보타 명인이 70세를 넘긴 뒤였다. 은퇴를 고려해야 했다. 그러자니 누군가 대를 이을 사람이 필요했다. 지목된 것은 생산 라인의 두번째 에이스 기시모토 고사쿠였다. 오랜 기간 쓰보타 밑에서 조수 역할을 했던, 무려 40년 경력의 장인이었다.

2006년이었다. 가장 까다로운 고객이 시애틀에서 한창 날릴 때였다. 제작자의 승계 작업에는 이용자의 승인이 필요했다. “한 달 동안 아무 것도 못했어요. 오로지 그를 위한 것만 만들었죠.” 심혈을 기울여 50개를 제작했다. 그 중에서도 또 고르고 골랐다. 6개를 엄선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직접 가지고 갔다.

1대 명인(쓰보타)에는 못 미치겠지만, 나름대로 40년간 달인의 경지에 이른 숙련공이다. 하지만 평생에서 느껴보지 못한 긴장감을 느낀 채 오디션을 치러야 했다. “매리너스의 클럽 하우스에서 만났어요. 가지고 간 6개를 이치로 상 앞에 죽~ 늘어놓았죠. 첫번째를 끼어 보더니 곧바로 답을 주더군요. ‘이건 못 쓰겠네요.’ 다음 것도 마찬가지였죠. ‘이것도 아닌데요.’ 그렇게 6개 모두 거절당했죠. 1분이 뭐예요. 다 합해서 30초도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새로운 제작자는 그 때 고객의 말을 아직도 기억한다. “이건 아주 잘 만든 도구의 한 조각 같네요. 제가 원하는 것은 제 몸의 일부 같은 느낌입니다. 대부분 한번 끼어보면 직관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어느 한 부분의 수정을 말씀드리면 아마도 전체적인 밸런스가 깨질 거예요. 그걸 유지한 채 수정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결국 그 시즌에는 글러브 제작자의 세대교체가 무산됐다. 당연히 쓰보타 명인의 은퇴도 미뤄졌다. 6개월 뒤 절치부심한 샘플이 다시 제작됐다. 비로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건 좀 가능성이 있군요.”

쓰보타(오른쪽)와 제자 기시모토. 시애틀 타임즈 캡처

2007년 골드글러브 수상 소감 

1세대 명인은 2008년에야 현장에서 떠날 수 있었다. 당초 은퇴 계획이 2년이나 미뤄진 것이다.

그는 마지막 글러브 2개를 제작했다. 자신의 최고의 고객을 위해서였다. 평생의 혼을 담아서였음은 물론이다. 손편지를 하나 동봉했다. ‘내 생애 최후의 작품입니다. 부디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정중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정작 주인공이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나중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이치로 상이 어느 미국 신문과 인터뷰에서 그렇게 얘기했다는 걸 들었어요. 내가 보내준 2개는 곱게 포장해서 집에 잘 보관하고 있다는군요. 행운을 부르는 상징으로 말이죠. 내게는 그보다 더한 영광이 없는 셈이죠.”

사진 = 게티이미지 제공

까탈스러운 고객이 새로운 글러브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07년부터였다. 그 해 역시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사실 이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진출 후 7년 째, 한번도 놓친 적이 없는 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상 소감은 조금 달랐다.

“난 올해 특별히 긴장을 많이 했다. 만약 이 상을 받지 못했다면 (새로 글러브를 만들어준) 기시모토 상이 자기 책임이라고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난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해야 했다.” 

백종인 / 칼럼니스트 前 일간스포츠 야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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