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기자 코리안드림] 낮은 기대치와 불운 딛고 생존한 해커

조회수 2017. 7. 6. 09:1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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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전 낮은 기대치와 불운을 딛고 생존
에이스로 진화한 해커의 대한민국 야구 이야기

올 시즌 16번의 선발 등판에서 퀄리티 스타트(6이닝 이상 3자책점 이하) 10번에 7이닝 이상까지 간 퀄리티 스타트 플러스도 7번이나 됩니다.

가장 최근 롯데전에서 7이닝 2실점하고도 패하기는 했지만 경기당 6과⅓이닝을 꼬박꼬박 소화하며 팀에 승리의 기회를 부여합니다. 평균자책점 2.93은 리그 2위이며, 104와⅓이닝은 리그 4위입니다. 5년전 NC 다이노스가 처음 영입한 3명의 외국인 투수 중에서 사실은 지명도가 가장 떨어졌던 선수. 그러나 벌써 KBO리그 5년차로 장수하며 다이노스에서 52승을 거둬 ‘에이스’라는 호칭이 어울리게 성장한 에릭 해커를 만나봅니다.


신중하고 생각이 깊은 해커는 야구와 NC 다이노스와 코리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 올 시즌 더 나은 피칭을 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지?

▶ 음....... 더 영리해졌다고 해야 할까. KBO리그는 투수에게 까다로운 리그다. 타자들이 아주 잘 친다. 내가 완투승을 거둔 SK와 경기(6월21일) 마지막 타석이 타자들의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 타자(이성우)는 올 시즌 1군에서 거의 뛰지 못했는데 그 힘든 상황에 올라와 10개 넘는 공을 던지게 하며 싸웠다. 물론, 그가 베테랑인걸 알지만 아직 올해 메이저리그(그는 KBO리그 1군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안타가 없었다. 그날 나는 컨디션이 좋았고 구위도 아주 괜찮았는데 마지막 타자와 고전했다. 그게 리그 타자의 수준이다. 그래서 늘 뭔가 변화를 주고 발전하려고 노력한다.


- 그 경기 기억난다. 팀의 승리가 절실한 경기였는데 완투승, 그러나 마지막에 꽤 힘겨웠다. (9회말 1실점하고 2-1 승리)

▶ 그게 야구 아닌가. (야구에서)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은 없다. 우리는 정말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또한 그런 상황을 늘 준비한다. 어려서부터 9이닝 투아웃 상황을 타자든 투수든 늘 상상하지 않는가? 그런 상황에 대해 몸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 그 경기, 혹은 매 경기마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마운드에 오르나?

▶ 아니, 꼭 그렇지는 않다. 간혹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 하나, 우리 팀에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려는 것이 목표다. 컨디션이 안 좋고 힘들 때라면 5이닝이라도 어떻게든 버티려고 한다. 타선이 지원을 해주든 못 해주든, 내 컨디션이 좋은 안 좋든 어떻게 해서든 팀 승리 기회를 줘야하는 게 선발 투수다.


- 결정적인 순간에 내야 뜬 공을 떨어뜨렸다.

▶ 그러니까. 실수는 야구의 일부이고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멘탈 게임이라고 하지 않나. 만약 거기서 내가 낙담하고 무너졌다면 우린 역전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수가 발생하자마자 바로 마음에서 떨쳐버려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마음에 둔다고 바꿀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그 플레이를 고칠 수는 없지만 다음 타자는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니까. 그래서 더욱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 그런 상황에서의 마음 자세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는데 이미 대답을 했네. ‘깨끗이 잊어라!’가 답이네. 그렇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 그래도 잊어야 한다. 지난 걸 걱정해봐야 소용이 없다. 내가 실수를 하든, 혹은 동료가 수비에서 실수를 하든지 그걸 바꿀 수는 없다. 때론 심판도 실수를 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바꿀 수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어떻게 상황에 반응하고 제어할 것인지, 그리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 지다. 그것이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다.


- 하비 도프만씨의 이론이 생각한다. 그 책을 읽었나?

▶ ‘멘탈 ABC 오브 피칭’ 그 책을 물론 읽었다. 2011년 팀을 옮기고 미네소타에서 좋은 기회를 잡았지만, (아 근데 여담이지만 맨십과는 미네소타와 애리조나에서 같이 뛰었고, 스와잭도 같이 뛴 적이 있다.) 그걸 제대로 잡지 못했다. 경기 외적으로 힘든 일들이 있었고, 그것이 운동장에서까지 영향을 주며 그 좋은 기회를 잡지 못하고 힘든 시즌을 보냈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고 TV에서 월드시리즈를 보는데 투수 로이 할러데이 얘기를 하면서 도프만 씨 이야기를 하더라. 그래서 그 책을 찾아 읽었고, 그 책의 많은 부분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정신적으로 정말 배운 게 많았고, 아마도 나의 커리어를 바꾼 책이었다.


- 예전 얘기로 돌아가 보자. 텍사스 주 던컨빌 출신인데 거기가 어디쯤인가?

▶ 댈러스 바로 인근이다. 지금은 사우스 레이크에 산다. 텍사스 레인저스가 있는 알링턴 인근이다.


- 언제부터 야구를 했는지.

▶ 아마 4살 때 쯤. 뒷마당에서 뜬공을 잡고 놀았다. 지난 번 경기에서 떨어뜨렸던 그런 뜬 공 잡기. (웃음) 티볼도 했고 아버지와 연습도 많이 했다. 형이 있어서 형과도 정말 야구를 많이 놀았다.


- 형도 야구 선수를 했나?

▶ 그렇다. 정말 뛰어난 선수였는데 나이를 들면서 야구에 점점 관심을 잃더니 그만뒀다.


- 야구뿐 아니라 뛰어난 풋볼 쿼터백이기도 했다는데.

▶ 풋볼도 4살 때부터 했다. (웃음) 야구와 풋볼을 모두 정말 좋아하고 즐겼다. 고등학교에 가서도 같이 했고, 대학도 야구와 풋볼 선수 모두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졸업반 때 풋볼을 하다가 큰 부상이 왔다. 풋볼 시즌 두 번째 경기 쿼터백으로 나갔다가 발이 골절됐고, 수술을 두 번이나 받고 야구 시즌이 시작될 때까지 거의 운동을 못했다. 야구 시즌은 잘 끝냈고 그리고 양키즈에서 드래프트되면서 풋볼은 접었다.


- 야구 선수, 심지어 풋볼 선수로 장학금은 제시한 대학이 꽤 있었다고 들었다.

▶ 그래서 결정하기가 정말 어렵기는 했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프로 선수였다. 그런데 어린 나는 당시 프로의 시스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물론, 내 목표는 프로 선수였지만 스카우트가 왔을 때 내 요구가 너무 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양키스는 낮은 라운드는 23라운드엔가 나를 드래프트했다. 프로가 안 되면 대학에 가서 야구와 풋볼을 하고 나중에 프로를 생각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여름이 지나면 양키스는 내게 23라운드의 계약금이 아닌 5라운드 정도의 액수를 제시했고, 결국 프로를 선택했다.


- 마이너리그에서 순조롭게 승격했지만 두 시즌인가는 기록이 없기도 하다. 부상이었나?

▶ 2004년 3월에 토미존 수술을 했다. 다음 해 돌아와 싱글A에서 아주 잘 던졌는데 시즌 막판 경기에서 어깨가 좀 아팠다. 그리고 다음 날 팔을 들지 못할 정도가 됐다. 통증을 달래며 2005시즌을 치렀지만 결국 10월에 어깨 수술을 했다. 18개월 만에 팔꿈치와 어깨 수술을 연속으로 한 셈이었다. 아마도 어려서부터 야구와 풋볼을 병행하면서 어깨를 혹사한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7년 이후로 작년에 NC에서 잠깐 아팠을 때까지 단 한 번도 내 등판을 거른 적이 없었다.


-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인가?

▶ 야구를 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부정적이면 더욱 어려워질 뿐이다. 긍정적일 수 있도록 스스로를 훈련시켜야 한다.


- 피츠버그로 트레이드된 후에 마침내 빅리그 기회를 잡았다.

▶ 그렇다, 2009년 5월에 트레이드됐다. 실은 2008년이 끝나고 난 마이너리그 FA가 됐고, 양키스는 나를 빅리그 40인 로스터에 포함시켰다. 그래서 2009년 스프링 캠프를 메이저에서 했지만 다시 AAA에서 시즌을 시작했다가 결국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기회를 얻었지만 많지는 않았고(3경기) 그 후 미네소타와 샌프란시스코 등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 MLB에 오르기도 힘들지만, 머물기는 더 힘들다는 말을 한다. 개인적으로 무엇이 가장 힘들었는지.

▶ 기회, 기회였다. 그리고 메이저리그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팀의 믿음. 나는 길게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올라가도 짧게 있다가 다시 마이너로 가곤했다. 짧은 메이저리그 성적이 나쁘지 않았지만 마이너에서 선발을 하다가 메이저 가면 불펜에서 던졌다. 통계라든지 상대 타자에 대한 공부 이런 것이 중요한데, 마이너엔 그런 게 아예 없었고 메이저에 가면 워낙 짧게 머물고 마니 역시 그럴 기회가 없었다. 한국에 와서는 그런 것을 학습할 기회와 시간이 주어졌고, 내겐 정말 큰 도움이 되면서 더욱 좋은 투수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샌프란시스코에서 선발 기회가 한 번 있었는데 잘 던졌다. (2012년 4월 27일 샌디에이고전 6이닝 3실점)

▶ 딱 한 번 있었다. 퀄리티 스타트하고 패전 투수가 됐다. 그게 인생이고 야구는 비즈니스 아닌가. 다른 직종에서도 기회가 많지 않은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지난 2015년 올스타전 가족 사진. 딸 칼라는 한국에서 태어났고 이제 둘째 아들까지 네 식구가 됐습니다.


- 그러나 아직 비교적 젊은 나이인 2012년에 한국행을 선택했다. 어떤 배경이었나?

▶ (잠시 생각) 꽤 힘든 결정이었다. 그러나 선수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가치를 인정받고 싶은 건 당연하나도 생각한다. 그리고 운동선수라면 최고가 되고 싶고 스타가 되고 싶고, 인정받는 누군가가 되고 싶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정말 많은 선수들이 있고 선택의 폭이 워낙 넓기 때문에 나는 내게 합당한 기회를 받지 못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아내와 가족이 있는 내게는 야구가 게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비즈니스이기도 하다. 내겐 부양할 가족이 있다. 그래서 내게 눈앞에 주어진 기회는 가족 부양과 함께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다른 세계를 보고 또 새로운 야구를 주전급으로 뛸 수 있는 기회였다. 아내는 아버지가 싱가포르에서 일해 어려서 거기서 산 경험이 있고, 전폭적으로 한국행을 지지해 주었다. 우리에겐 지나칠 수 없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 당시 NC는 세 명의 외국인 투수를 뽑았다. 상대적으로 다른 둘이 더 지명도가 있었던 데다, 첫 시즌은 잔인할 정도로 운이 없었다. 어떻게 이겨냈는지. (첫 해 3번의 완투 포함 27경기에서 3.63의 평균자책점에 4승11패)

▶ 정신력, 정신적으로 집중력을 잃지 않으려고 했다. 야구는 적응의 경기이고, 적응하지 못하고 경기와 함께 변화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처음 한국에 왔을 때 나는 성공에 필요한 도구는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적용할지를 배워야했다.

예를 들어 다른 팀은 나를 상대로 도루를 많이 성공시켰다. 그래서 변화가 필요했다. 나는 운동신경이 뛰어난 편이고 고교 때까지는 유격수도 했다. 그래서 적응할 자신이 있었고 투구 동작을 빠르게 하는 등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구종도 배우고 마운드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워갔다.

이제는 KBO리그 타자들을 많이 상대해봤고, 그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많이 상대했지만, 그들의 약점과 강점을 파악하고 있다. 그것을 내게 유리하게 적용하려고 계속해서 공부하고 노력하고 있다.


- 타자들 역시 해커에 대해 잘 알고 있다.

▶ 물론이다. 그래서 계속해서 다른 해법을 찾아야 한다. 때로는 타자들이 원하는 것, 혹은 강한 것을 던져야 한다. 예를 들어 커브에 강한 타자가 있다면 그에게 일부러 커브를 던져 그 타자가 커브에 강한 것을 내가 두려워하지 않음을 알릴 필요도 있다. 물론 필요한 시점에는 타자의 약점도 공략해야 하지만. 리듬이나 템포 등 여러 가지에서 타자들을 공략할 수 있는 법을 여전히 배우고 있다.


- 그 독특한 투구 동작도 그런 노력 끝에 나온 건가? 미국에서도 그렇게 던졌나?

▶ 나의 와인드업 동작은 늘 느린 편이었다. 밸런스를 잡는데 어려움을 겪어 늘 마운드에서 서두르는 편이었다. 서두르면 나쁜 투구가 나왔다. 그래서 중간에 약간의 멈춤 동작을 시도했는데, 그것도 익숙해지는 데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그러다가 결국 나의 밸런스와 팔 동작, 릴리스 포인트 등에 가장 적합한 투구 동작을 이루게 됐다.


- 벌써 5년이 지났고 첫 세 명 중에 유일하게 남아 에이스가 됐다. 돌이켜보면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는지, 야구든 야구 외적이든.

▶ (약간의 한 숨) 여러 가지가 복합적인 것들이 있었다.

야구 외적으로는 아내가 워낙 모든 것을 잘 해주어서 큰 도움이 됐다. 크리스틴이 내게 영향이 없도록 음식이나 아이들 양육이나 그런 것들을 모두 알아서 해줬다. 우리 고등학교 때부터 만났고 나의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모든 것을 곁에서 해줬다.  아내는 내가 야구를 얼마나 좋아하고, 얼마나 열심히 하고,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피칭은 나의 직업이고 난 늘 열린 마음으로 어려울 때마다 적응하고 변화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외국인 선수는 1년 계약으로, 매년 살아남아야 한다. 보장이 없기 때문에 늘 긴장을 늦출 수 없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이러니는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다른 외국인 선수는 친구이면서 또 경쟁자가 된다. 친구이자 동료이자 또한 경쟁자라는 것은 참 어렵지만 그게 비즈니스니까 또 이겨내야 한다.


- 팬들의 질문도 있다. 가장 많은 질문이 남은 야구 생애를 여전히 NC에서 던지고 싶은 지였다.

▶(크게 웃음) 앞에서 말한 것과 연결이 되는데 미래에 대해서는 사실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남은 야구 생애를 NC에서 끝내고 싶으냐고 물으면 질문은 물론 YES다. 모든 것이 맞아 떨어져야 하고, 내가 컨트롤할지 못하는 부분도 있지만 내 의견만을 묻는다는 ‘그렇다!’이다.


- 은퇴 후에 NC의 코치가 될 의향도 있는지?

▶ (웃음) 아직 먼 이야기이기는 하다. 현재 나는 타자를 잡는데도 힘겹다. (웃음) 그러나 야구 선수 생활을 하는 것 외에도 야구에 내가 갚아야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코칭이 되던 어드바이스를 주는 일이든 멘토링이든 어떤 식이로든 미래에도 팀을 돕고 싶다는 생각은 분명히 있다.


- 메이저리그에 대한 생각은? 에릭 테임즈?

▶ (한숨을 내쉬며) 알다시피 기회, 에릭 테임즈는 그 기회를 받았다. 모든 선수가 원하는 기회지만 누구나 주어지는 건 아니다. ‘완벽한 세상’이라면 나도 당연히 그 기회를 원한다. 뛰어난 한국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제대로 된 기회가 주어진다면 마다할 이유가 있겠는가.


- 답을 알것 같지만, 좋아하는 풋볼 팀은? (웃음)

▶ 댈러스 지역에서 자랐고, 카우보이스 팬으로 성장했다. 내 등번호는 8번인데, 트로이 에익맨(1990년대 카우보이스 명 쿼터백)이 8번이었다. (웃음) 칼 립켄도 8번이었고, 어려서부터 8번을 달았었다. 올해 8번을 다시 달게 돼 기쁘다.


- 수염을 기르고 나서 더 좋은 피칭을 하는지?

▶ 통계를 보면 아마 그럴지도 모르지만 수염과 피칭과는 사실 관계가 없을 텐데. (웃음) 그렇지만 수염 기르고 나서 더 좋은 성적을 올리는 건 맞는 것 같다.


- 팀의 젊은 투수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나?

▶ 현재는 그들에게 나의 지지를 보내는 데 주력하고 있다. 문화 차이라든지 언어 차이 등으로 내가 주고 싶은 정보를 제대로 전달하기 쉽지는 않다. 그러나 힘든 경기를 치른 후라든지 그럴 때 ‘공은 아주 좋았으니 결과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는 이야기 등을 해주기도 한다.


- 한국은 에릭 린 해커에 어떤 의미인가.

▶ 음, 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큰 의미가 있다.

우선은 기회, 내게 기회를 준 나라이고, NC 다이노스다. 선발 투수로 꾸준히 뛸 기회를 주었고, 적응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다른 팀의 외국인 선수를 보면 그런 적응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경우도 종종 봤다. 그런 점에서 정말 감사한다.

가족들을 부양할 기회를 한국이 주었고 딸 칼라는 한국에서 태어났으니 정말 큰 의미가 있다. 벌써 5년째이고 앞으로도 오래 뛰고 싶은 한국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추억을 주고 있다. 내 야구 생애에서도 정말 큰 부분이다. 양키즈에서 8년 있었는데 이제 다이노스에서 5년째이니 두 번째 오랜 세월 몸담은 팀이다.

그리고 팬들은 정말 대단하다. 늘 소통하려고 노력하고 원정에서도 다른 팀 팬들과도 어울리려고 한다. 야구장 분위기는 홈뿐 아니라 원정도 정말 즐겁다. 그리고 많은 우정들, 그 모든 것을 한국이 나와 우리 가족에게 준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면 보여줄 사진이 정말 많다. 마산은 나의 두 번째 고향이고, 은퇴하고 먼 훗날 아이들과 다시 방문하면 정말 즐거운 추억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한다.


 에릭 해커는 진중하고 자신의 생각이 뚜렷한 선수입니다. 고집도 있어 보이지만 변화에 대한 오픈 마인드와 적응에 대한 노력과 마음 자세도 아주 좋아 보입니다. 한국 생활 5년이 그의 삶을 많이 바꿔 놓았고, 또 야구 선수로서 많이 발전하는 좋은 인연이 됐습니다. 그러나 당장 남은 시즌 꾸준한 활약을 이어주는 것이 외국인 에이스로서 주어진 임무이기도 합니다. 누구의 삶이든 유사하지만 중압감은 늘 존재합니다. 그의 말대로 미래는 우리 누구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의 활약이 앞으로도 이어진다면 KBO리그에서 해커를 오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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