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야구

[야구는 구라다] 사인 훔치기의 추억(?)

백종인 입력 2019.11.19. 09:38 수정 2019.11.19.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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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

30년은 된 일이다. 야구판이 시끌시끌했다. 대전 경기 때였다. '이거 좀 이상한데?' 원정 팀 코치가 갸웃거렸다. 코치 박스 때문이었다. '1루쪽 위치가 다른 곳과 다른데.' 그 얘기에 어느 부지런한 기자가 줄자를 들고 재봤다. 그랬더니 사실이었다. 규정보다 90cm 정도 앞에 그려졌다.

'그거 봐. 내가 뭐랬어.' 원고측이 발끈했다. 해태였다. 피고 빙그레의 라이벌이다. '저렇게 해놓으면 우리(3루쪽) 덕아웃이 잘 보인다니까. 사인 훔치려고 저러는 거야.' 보이콧 성명까지 냈다. '적절한 해명이 없으면 앞으로 빙그레하고는 게임 못한다.'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김승연 구단주도 격노했다. 그룹 차원의 일이 됐다. 미국 출장 중이던 구단 사장(정인현)을 급거 귀국시켰다. 사건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문책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KBO는 빙그레에 엄중 경고 조치를 내렸다.

용의자는 휴스턴의 휴지통 (쓰레기통)

용의자가 특정됐다. 잠실에서도 천대받더니. 하여간 죄 없는 쓰레기통이 문제다. 관련 영상도 속속 올라온다. '둥둥', 영어로는 'BANG, BANG' 혹은 'BOOM, BOOM'이다. 애스트로스 타자의 타석에서 들린다. 때로는 한 번, 때로는 두 번이다. 안 나올 때도 있다. 외야 카메라로 포수 사인을 엿보고, 결과를 전달했다는 얘기다.

쓰레기통 위치는 덕아웃 바로 뒤다. 구단 스태프 한 명이 책상을 놓고 곁에 있다. 타월로 가려진 뒤에는 모니터(외야 카메라와 연결된)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걸 보고 쓰레기통을 두들겨 신호를 줬다는 말이다. 사실이라면 의외다. 사이버매트릭스 시대에 너무 원시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커뮤니티를 달구고 있는 영상들 캡처 화면.

어쨌든. 사건은 점점 커진다. 시작은 내부고발자였다. 2017년 뛰었던 투수 마이크 피어스의 폭로에서 비롯됐다. 피해자가 빅마켓이라는 점도 중요하다. 다저스, 양키스 팬들이 눈을 부릅뜨고 있다. 2017년과 2019년 포스트시즌서 패배한 팀들이다.

잘 나가는 감독들 이름이 오르내린다. 휴스턴의 A.J. 힌치, 보스턴의 알렉스 코라, 메츠의 카를로스 벨트란 등이다. 이들은 2017년 우주인이었다. 감독, 벤치코치, 주력 타자로 뛰었다. 모두 그들의 입을 주목한다.

당시 스카우트 책임자의 이메일까지 공개됐다. 사인 파악과 정보 관리의 필요성, 외야 카메라의 활용법이 언급됐다. ML 사무국은 대대적인 TF 팀을 꾸렸다. 철저하고 광범위한 조사를 시작했다. 벌써 핵심 관련자들의 영구 제명이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우승 박탈도 주장한다.

사인 훔치기 정황으로 유포된 화면. 수건에 가려진 뒤에 모니터가 있다는 주장이다. 출처=좀보이 트위터 


일본의 사인훔치기

1970~80년대 일본은 정보전의 시대였다. 야구장은 스파이들의 천국이었다. 원정 팀이 구장에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있다. 덕아웃 검문/검색이다. 카메라나 도청기가 숨겨져 있는 지를 찾는 것이다. 혹은 볼 보이가 의심받을 때도 있었다.

틈틈이 관중석도 살펴야한다. 어디서 망원경이라도 보이면 신경이 곤두선다. 구단 직원을 가장해 청기백기식 수신호를 준 사건도 있었다. 며칠 전 다르빗슈의 의심도 비슷했다. 옐리치의 시선이 갑자기 외야 쪽으로 향했다는 점이다. 그걸 보고 이상해서 투구를 멈췄다는 의혹 제기였다.

특수 장비도 등장했다. 타자의 허벅지에 전류 신호를 보내는 방식이다. 오른쪽 허벅지가 찌릿하면 직구, 왼쪽이 찌릿하면 변화구라는 신호다. (헐렁한 유니폼을 입을 때였다.) 심지어 투포수가 난수표로 사인을 교환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걸려 오래 가지 못했다.

이 당시 일본에서는 복장 규정이 엄했다. 투수는 반팔 언더셔츠가 금지됐다. 팔뚝을 보여주면 안되기 때문이다. (팔뚝) 근육의 움직임으로 포크볼을 알아차리는 경우도 있었다.


미국, 그리고 순진한 KBO 리그의 사례

미국은 (야구) 종주국이다. 사인 훔치기 사건의 역사도 길다. 1951년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의 플레이오프가 유명하다. 자이언츠가 최종전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했다. 그런데 이게 커닝의 결과였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외야 쌍안경→불펜 포수→덕아웃→타자로 전달되는 방식이었다.

2013~14년 포스트시즌에도 있었다. 커쇼가 연달아 KO당했을 때다. 카디널스의 3루 코치가 의심받았다. 위치를 이탈해서 포수 사인을 훔쳐봤다는 의혹이다. 지난 해는 레드삭스가 걸렸다. 양키스전에 애플 워치를 쓴 게 탄로나 사무국의 징계를 받았다. 사과 성명을 내면서도 한 마디는 잊지 않았다. "양키스도 리플레이 카메라를 동원해 계속 사인을 훔쳤거든요."

KBO 리그도 다를 바 없다. 선진 야구에 유독 민감하지 않은가. 지난 해 봄 프린트 한 장에 난리가 났다. ‘KIA 구종별 사인’이라는 제목이 붙은 A4 인쇄물이었다. ‘몸쪽(검지 왼쪽 터치) 바깥쪽(검지 오른쪽 터치) 커브(검지, 중지) 슬라이더(검지, 중지, 새끼) 체인지업·포크볼(검지, 중지, 약지, 새끼)’이라는 내용이었다.

순진무구한 트윈스였다. 너무나 버젓이 게시했다. 덕아웃와 라커룸 통로였다. 그것도 원정 구장에서다. 관계자들이 다니는 길이다. 덕분에 한 매체 사진기자의 눈에 띌 정도였다.

2013년 일이다. 류제국과 홍성흔이 2루 사인 훔치기로 언쟁을 벌였다.


도덕성이 훼손되면 외면당한다

사인 훔치기는 애매하다. 스포츠맨십의 영역이라는 관념이 강하다. 한편으로는 능력으로 치는 경우도 많다. 알아내면 대단한 것이고, 들키면 무능하다는 인식이다.

그래서인지 메이저리그는 규정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반면 KBO는 조항이 있다. "벤치 내부, 베이스코치 및 주자가 타자에게 상대 투수의 구종 등의 전달 행위를 금지한다"고 명시했다. 하지만 명확한 입증은 쉽지 않다.

다만 어느 리그에서나 절대적인 금기가 있다. 장비나 (선수단이 아닌) 별도 인력이 개입되는 경우다. 이번 애스트로스의 케이스다. 카메라와 구단 스태프가 의심받고 있다.

사안은 심각하다. 연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급기야 커미셔너까지 등장했다. 롭 만프레드의 코멘트다. "누가 연루됐는지, 얼마나 진행됐는지, 확실히 조사해서 밝히겠다. (사실이라면) 엄중하게 처벌하겠다. 그것만이 팬들의 실망감을 달랠 수 있다."

어느 리그나 마찬가지다. 도덕성은 정체성의 본질이다. 훼손되면 아무에게도 존중받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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