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야구

[야구는 구라다] 류현진의 미제 글러브

백종인 입력 2019.08.20. 06:44
음성 기사 옵션 조절 레이어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o i

번역할 언어 선택
글자 크기 조절 레이어

2017년 11월이다. 오타니 쇼헤이가 LA 이주를 결심했다. 일본 기자들은 난리가 났다. 화장실 갈 틈도 없다. 관련 기사가 쏟아졌다. 몇몇 신문은 호외를 발행했다. 그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정신없이 바쁜 곳이 또하나 있었다. 일본 최대의 스포츠용품 업체 A였다. 고베의 본사에서는 만세가 터졌다. 자기네 제품을 쓰는 선수였기 때문이다. 홍보관의 <오타니 코너>가 더욱 크게 확장됐다. 주가도 제법 뛰었다. 얼마 뒤에는 이런 보도자료까지 띄웠다. “본사는 오타니 선수의 철저한 서포트를 위해 전담 어드바이스 스태프와 계약을 마쳤습니다.”

관련 패키지 상품도 개발됐다. 오타니가 LA에서 쓸 빨간색 용품을 한데 모았다. 글러브, 스파이크, 배트, 배팅용 장갑까지 세트로 된 구성이다. 가격은 2900달러(약 350만원)로 책정됐다.

2006년 무렵이다. M사에 비상이 걸렸다. 글러브 생산 라인에 문제가 생긴 때문이다. 사연은 이렇다.

50년 가까운 근속자 쓰보타 노부유키 명인이 은퇴를 맞았다. 70이 넘은 고령 탓이다. 후계자가 지정됐다. 차세대 에이스 기시모토 고사쿠였다. 역시 30년 넘게 글러브를 만들던 장인이다.

내부적인 승계는 끝났다. 그러나 승인이 필요했다. 최종 결재권자는 외부에 있었다. 스즈키 이치로였다. 이제껏 그의 글러브는 쓰보타 명인이 전담했다. 그걸 제작해야 후계 작업이 끝난다.

새로운 책임자는 한 달간 모든 업무에서 배제됐다. 오로지 이치로용에만 몰두했다. 만들다가 버려진 게 수십개다. 완성품 6개만 남겼다. 그걸 가방에 담아 시애틀행 비행기에 올랐다. 오디션은 매리너스 구장 라커룸에서 열렸다.

신임 제작자의 기억이다. “첫번째를 끼어보더니 곧바로 답을 주더군요. ‘이건 안되겠네요.’ 다음 것도 마찬가지였죠. ‘이것도 아닌데요.’ 6개를 보는 데 30초도 안걸렸어요. 퇴짜를 맞았죠.” M사의 글러브 라인 승계 작업은 중단됐다. 6개월 후에야 간신히 합격품을 생산했다. 이듬해 이치로는 7번째 골드글러브를 수상했다. 소감이 특별했다.

“올해는 수비하면서 긴장을 많이 했다. 만약 이 상을 받지 못했다면 (새로 글러브를 만들어준) 기시모토 상이 자기 책임이라고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늘 최선을 다해야했다.”

쓰보타(오른쪽)와 제자 기시모토.            시애틀 타임즈 캡처 

때가 때인지라, 눈에 들어오는 장면

엊그제 애틀랜타 게임 때다. 1-2로 뒤진 4회였다. 2사 후 타석에 들어섰다. 카운트 1-2로 불리했다. 굴할 리 있나. 4구째 커브(77마일)가 왔다. 먼쪽으로 휘어져나가는 어려운 공이었다. 그런데 반응이 정확했다. 마치 알고 있었다는듯, 날카로운 스윙이 따라붙었다. 중견수 앞 클린 히트였다.

배트를 던지며 달려나간다. 1루에 안착했다. 지난 번 등판 때도 치더니 또 하나 건졌다. 몇 년만의 연속 경기 안타다. 그야말로 ‘절정의 타격감’이다.

때가 때 아닌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이 있었다. 타격 후 예쁘게 나뒹구는 배트다. 짙은 도료가 절반 정도 입혀졌다. T사 제품이다. 다저스 출신 에이드리안 곤잘레스가 애용하던 모델이다. 한국에도 공급된다. 나성범, 박민우, 이원석 등이 쓰는 자작나무 방망이다. 본사가 LA 인근 오렌지카운티로 돼 있다. 그러니까 ‘미제’다.

선수들은 유니폼을 입는다. 모자까지는 팀이 정한 것을 써야한다. 나머지 용품에는 선택권이 주어진다. 배트, 글러브, 스파이크 등등이다.

살펴보면 99번이 쓰는 것들은 거의 미국산 제품들이다. 신발은 유명한 N사 것, 하다못해 배팅 장갑까지 이 회사 물건이다. 배트도 말했다시피 미제 T사 물건이다. 글러브? 이글스 시절부터 W사 제품을 애용한다. 마찬가지로 메이드 인 아메리카다.

그게 뭐 특별하냐고? 메이저리거니까, 당연히 미제를 쓰는 것 아니냐고? 맞다. 대단한 일은 아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다.

ML서 뛰는 아시아계 대부분이 일제 용품 사용

아시다시피 스포츠용품 시장에서 일본산의 파워는 만만치 않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당수 선수들이 A사, M사, Z사 등 일본 브랜드 제품을 애용한다. 물론 용품사에서 지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마케팅 차원이다.

협찬의 형태가 많다. 연간 사용량을 무상 공급하는 방식이다. 거액의 모델료가 지급되는 경우도 있다. 3년전 미국 U사가 브라이스 하퍼와 10년간 계약을 맺었다. 총액은 1000만 달러 규모였다. 새로 런칭한 야구화를 신어주는 조건이었다. (NBA에서는 얼마전 엄청난 딜이 있었다. N사와 신인 자이언 윌리엄슨 간에 5년 7500만 달러짜리 계약이었다. 경기 중 농구화가 터진 유명한 장면 때문이었다.)

일반적인 불매운동과는 다른 시점으로 이해돼야, 하지만…

내셔널리티에 대한 인식은 판단이 간단치 않다. 예컨대 야시엘 푸이그의 미국 국적 취득은 많은 축하를 받았다. 반면 추신수 가족의 문제는 논란이 있었다. 물론 여러 상황이 다르다. 하지만 그만큼 다양한 주장과 생각이 개입될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용품 문제도 비슷하다. 복합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경기력에 영향을 주는 부분이라는 점이 첫째다. 의외로 민감한 선수들이 많다. 이치로는 아예 남의 배트나 글러브를 만지지도 않았다. “다른 무게와 감각이 손에 남는 게 싫어서”였다.

역사적인 점도 외면할 수 없다. 한국 야구를 얘기하면서 일본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다. 용어나 문화가 그대로 답습된 부분도 상당하다. 그만큼 인적, 물적 교류도 절대적이었다. 그런 탓이리라. 일본 출신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미국에 진출한 아시아계 선수들도 그렇다. 대부분 일제 용품 한두가지는 쓰고 있다. 개인적 선호, 계약, 오랜 (협찬) 관계…. 그런 복합적인 요인들일 것이다.

때문에 일방적인 관점은 적절치않다. 어느 브랜드를 쓴다고 떨떠름할 필요는 없다. 일반적인 불매운동과는 다른 선상에서 이해돼야 한다.

그러나 반대의 경우라면 다르다. 굳이 일제를 쓸 일 없다는데. 그런 곳에는 특별한 시선을 주고 싶다.

의식적인 지는 알 수 없다.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들은 바도 없다. 물론 그렇다해도 굳이 밝히지 않을 것 같다. 괜한 ‘척’은 오히려 주변 선후배의 곤란함을 초래할 지도 모른다. 묵묵함이 오히려 깊은 메시지를 줄 때도 있다. 혹시 오해라도 어떤가. 그 정도 넘겨짚기라면 즐길만 할 것 같다.

99번과 W사 글러브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미국 초창기였다. 그러니까 2013년 첫 시즌 때다. 구매자는 특별한 옵션을 주문했다. 태극 문양을 넣어달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얼마 뒤 취소했다. “메이저리그 규정이 바뀌었대요. 다른 나라 국기 넣으면 안된다네요.”

MBC TV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는 이 장면이 담겼다. W사의 아소 시게아키 장인이 다저 스타디움을 찾았다. 글러브의 구루(guruㆍ스승)로 불리는 그는 일본계지만 영어가 유창하다. 백팩 속에서 특별 제작된 글러브를 꺼냈다. 이미 취소했다는 얘기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다. “그럼 이건 그럼 류 선수 한국 집으로 보내드리면 되겠네요.” 고객의 의도만큼은 충분히 존중/공감했다는 기꺼움이 담긴 표정이었다.

        2013년 방영된 MBC TV <다큐스페셜> 장면 중에서


이 시각 추천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