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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는 구라다] 류현진, 범가너에게 동양의 가르침을 전하다

백종인 입력 2019.04.04. 08:31 수정 2019.04.04.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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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차. 흐리멍텅한 스윙이었다. 몸쪽 공에 불쑥 끌려나가고 말았다. 힘이 실릴 리 있나. 맥 없는 타구는 1루쪽 땅볼이 됐다. 투수가 잡아서 손쉽게 아웃 1개가 지워졌다. 이닝 끝. 공수 교대다.

덕아웃으로 돌아가던 투수와 타자는 눈이 마주쳤다. 그냥 가면 되는 데 그러지 못했다. 파바박. 스파크가 튀었다. 먼저 도발한 건 가해자(투수)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시비를 유발하는 한마디가 던져졌다.

“뭘 봐?” (Don‘t look at me.) 이 소리 듣고 가만히 있으면 공자님이다. 즉각적인 반응이 나왔다.

“뭐라고?” (What?)

“뭘 보냐고!” (Don’t look at me!)

“왜. 보면 어쩔건데.” (What‘re you gonna do to me.)

싸워도 될 일을 말로 한다. 아니나 다를까. 둘 간의 거리가 좁혀졌다. 으르렁. 험상궂은 표정이 폭발했다. 급기야 양팀 선수들이 몰려나온다. 벤치 클리어링이다.

2016년 9월 다저 스타디움에서 있었던 일이다. 시비를 건 쪽은 원정팀 투수 매디슨 범가너였다. 억울해 하는 피해자는 야시엘 푸이그다.

                                                                 mlb.tv 화면 캡처

중계 방송하던 빈 스컬리 옹이 한마디 던진다. “이제 푸이그가 영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됐나 보군요. 이런 일이 다 생기네요.”

점잖은 클레이튼 커쇼까지 참전했다. “그건 푸이그 잘못이 아니었어요. 범가너가 불을 질렀죠. 마치 싸움을 거는 것 같았어요. 그가 뭘 기대하는 지 잘 모르겠어요.”

1선발 직무 대행의 피곤함

참 피곤한 일이다. 정식 발령도 아니다. 말이 1선발이지 임시 땜빵이다. 고상한 이름 붙여봐야 직무대행일 뿐이다. 그런데도 업무 강도는 마찬가지다. 상대해야 할 고객 명단에는 한숨이 나온다. 한결같이 깐깐하고, 까칠한 이름들이다.

첫번째는 민원은 방울뱀이었다. 그곳 보스(잭 그레인키)를 잡아야했다. 괴팍하고 까다롭기로 소문난 인물이다. 그러나 동료들 도움 덕에 잘 처리됐다. 제법인데? 사내 평가가 치솟기 시작했다.

두번째는 더 고약하다. 이름부터 문신 느낌이 물씬 난다. 매드범(MadBum)이다. 그는 2014년 가을에 제대로 미쳤다. 각종 단기전 MVP를 휩쓸었다. 챔피언 반지가 손가락에 휘황찬란하다. 랜디 존슨의 재림을 보는 것 같다. 왼쪽인데도 옆으로 틀어서 던진다. 가공할 슬라이더의 위력이 상대를 위축시킨다.

공만 무서운 게 아니다. 얼굴도 늘 전사 모드다. 험상궂은 표정,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뭔가를 잡아먹으려 한다. 적에게는 단 한 발도 양보할 수 없다는 호전성이 불타오른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피가 너무 뜨겁다. 파이팅이 넘치다 못해 인화성, 휘발성이 강하다. 급하고, 전투적이다. 지극히 호전적이다. 때문에 화상의 위험이 크다.

3회 초 범가너 타석, 뜻밖의 머뭇거림

아직 0-0이다. 팽팽함은 여전했다. 승부의 축이 어디로 기울지 모를 때다. 그러니까 3회 초 원정 팀의 공격이 진행 중이다. 2사 후였다. 한가했다. 주자도 없는 9번 투수 타석이다. 게다가 카운트도 1-2로 투수 편이었다.

보통이라면 긴장감도 필요없는 순간이었다. 아마 삼진이겠지. 그렇게 광고 시간으로 넘어가겠지. 모두가 다음 이닝을 생각할 무렵이었다. 뜻밖에 ‘체증’이 시작됐다.

투/포수 사인 교환에서 브레이크가 걸렸다. 러셀 마틴의 수신호가 영 마뜩치 않았다. 투수는 4~5번이나 고개를 흔들었다. 이상하다. 저런 적이 없는데. 별로 고집 피우는 스타일이 아니다. 웬만하면 포수가 하자는대로 한다. 그런데 이번 공에 유독 뜸을 들인다. 시간이 계속 지체되자 타석에서 반발했다. ‘타임.’ 잠시 호흡 정리를 요청했다.

3초 후. 경기가 재개됐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포수 사인이 몇 개나 그냥 지나간다. 투수는 계속 발사 동작을 미루고 있다. 급기야 포수가 짜증을 낸다. ‘왜? 뭘 어쩌라고?’ 그런 제스처다. 또다시 진행이 끊겼다. 매드범은 조용히 타석을 빠져나갔다. 다행이다. 신경질은 드러나지 않았다.

구심이 플레이를 재촉했다. 오래 기다린 4구째가 실행됐다. 스트라이크 존으로 향하다가 반대로 꺾이는 체인지업(79마일)이다. 멀미할만큼 참고, 참았다. 타자의 배트가 강렬하게 출발했다. 그러나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삼진. 3회 초가 허망하게 끝났다.

짜증나는 삼진 직후 거듭된 범가너의 실수

범가너의 첫 타석은 중요한 고비였다. 적어도 <…구라다>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1선발 대행이 극도의 신중 모드를 발동한 순간이었다. 사인 교환 문제로 두번이나 흐름을 끊었다. 지켜보는 사람은 모른다. 당사자들만이 느끼는 승부의 호흡이라는 게 있다. 어쩌면 이 게임의 흐름을 좌우하는 포인트였는 지 모른다.

당사자가 경기 후 멘트를 남겼다. “투수 중에 가장 잘 치는 선수다. 우리 팀에서는 범가너를 분석할 때 투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다른 타자와 똑같다고 여기고 준비한다.”

4개 중에 똑바로 간 공은 하나도 없다. 체인지업(79마일)-커터(87마일)-커브(75마일)-체인지업(79마일)이었다. 마지막 공을 위한 사인 교환에는 무려 44초나 걸렸다. 투수가 타석에 있는 데 이런 경우는 없다. 지극히 이례적이다.

느긋한 타자라면 몰라도, 급하고 공격적인 성향이다. 속에서 천불이 날 경기 운영이었다. 더구나 상대는 매드범 아닌가. 내색은 안했지만 속으로 엄청 뜨거워졌을 것이다.

물론 그 순간은 아무 액션이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3회 말을 주목해야 한다. 공수가 바뀌자 이상한 현상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참 공교롭다. 혹시 복장 터지는 삼진 이후에 생긴 후유증 아닐까? 어쩌면 그런 해석이 붙을 플레이들이다.

첫번째가 3회 말 선두 타자 러셀 마틴 때였다. 그의 타구는 빗맞은 땅볼이었다. 쉬운 공이었지만 의외의 실책이 나왔다. 매드범이 1루에 악송구를 저지른 것이다.

다음 타자 때는 더 어이 없는 일이 생겼다. 투수 타석이었다. 타자가 된 99번은 선처를 원했다. 번트만 대겠다는 자세였다. 그런데 정작 범가너가 문제였다. 눈에 불을 켜고 던졌지만 존에 넣지를 못했다. 4개 연속 표적을 벗어났다. 스트레이트 볼넷이었다.

4번째 공에는 대치극까지 벌어졌다. ‘그게 왜 볼이냐’며 구심(알폰소 마키스)과 기싸움을 시작했다. 포수(버스터 포지)가 진정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원정팀 브루스 보치 감독은 여차하면 벤치에서 달려갈 기세였다. 혹시나 사고 칠까봐 안절부절이었다.

                          구심에게 항의하는 범가너의 모습.        mlb.tv 화면

어찌어찌 신경전은 일단락 됐다. 그러나 상황은 악화 일로를 치달았다. 8, 9번 타자를 살려보냈다. 순전히 투수 자신의 실수 탓이었다. 강호에서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자초한 일은 대형 사고로 연결됐다. 키케의 적시타가 0-0의 균형을 깼다. 이어진 만루에서는 코디 벨린저의 결정적 타구가 폭발했다. 사실상 이날 경기의 승패를 가른 대목이었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물론 직무대행도 미스가 있었다. 그토록 조심한 상대에게 (6회 투런) 한방 맞고 말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승패에 작용한 정도다. 누가 더 치명적인 실수를 하느냐다. 누가 더 결정적인 타이밍을 견뎌내느냐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인생 선배 아닌가(놀랍게도 99번이 2살 위다). 리그는 다르지만 초반 경력도 무시 못한다. 소년 가장으로 긴 시간을 버텨냈다. 보살 팬들의 보살핌 속에 멘탈 관리가 조기 교육으로 이뤄졌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미치지 못함이나 마찬가지다. 과도한 승부욕, 투쟁심, 파이팅은 자칫 대사를 그르칠 수 있다. 다저스의 1선발 직무대행이 이날 매드범에게 준 가르침이다.

다시 이 글의 맨 처음 얘기로 돌아가보자. 2016년 푸이그와 설전으로 벌어진 벤치 클리어링 때 말이다. 사건 후 며칠이 지났다. 다저스 클럽하우스에는 푸른색 티셔츠 몇 장이 배달됐다. 해시태그가 프린트 된 옷이었다. 거기에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자에 대한 훈계가 적혀 있었다.

'#Don’t look at me'라는 문구였다. 우리 말로 하면 "뭘 봐" 쯤일 것이다. 그보다 더 거리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런 뜻이리라.

"눈 깔아."
                                                             다저스 SNS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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