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는 구라다] 권혁을 욕할 수 없는 이유 - 사진들

조회수 2019. 2. 8.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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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이 울린다. 낯선 번호다. 평소라면 모른 척했으리라. 그러나 그럴 계제가 아니다. 일단 통화부터 터치한다.

전화기 너머에는 알만한 목소리였다. “혁아, 마음 고생이 많지?” 사실 김태형 감독과는 별 인연이 없다. 2008년 베이징 때 대표팀에서 함께 한 게 전부다.

전 소속 팀이 KBO에 요청했다. 자유계약선수로 공시됐다. 이른바 백수가 된 것이다. 이럴 때는 골든 타임이 중요하다. 속도전이 필요하다.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재취업이 잘 될 것 같았다. 베어스 구단과 김 감독이 속도를 냈다. 초초급행이다. 불과 이틀 만에 보도자료가 나왔다.

1월을 넘긴 계약이었다. 30대 중반에 육성선수 신분이 됐다. 등록하려면(1군에서 뛰려면) 5월 이후에나 가능하다. 아무렴 어떤가. 어려울 때 불러주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다.

아마 몇 팀이 더 있을 듯 하다. 어디라도 아쉬운 좌완 불펜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끝내 입을 다문다. “다른 팀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는 게 도리인 것 같다.” 아무렴 맞는 말이다. 상도의를 저버려서야 되겠는가.

몇 가지 이슈가 등장했다. 그 중 하나가 백넘버다. 20년 가까이 47번을 달았다. 그런데 베어스에는 이미 임자가 있다. 홍상삼도 10년 가까이 그 번호에 애정이 깊다.

굴러온 돌이다. 욕심부릴 상황이 아니다. 양보하는 게 당연하다. 빈 번호 중에 8번을 택했다. 낯설지만 나쁘지 않다.

배영수와 인연도 화제다. 묘하게도 줄곧 따라다닌다. 대구→대전→서울. 경부고속도로를 상행선 방향으로 추격전을 펼친다. 둘 사이에는 남다른 일화도 있다. 10년이 훨씬 넘었다. 하와이 전지훈련 때는 생사의 고비를 함께 했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다.

4년 전과 너무도 비슷한 스토리 전개

독수리 둥지를 떠나기 직전이다. 그러니까 자유계약으로 풀어달라고 요청한 무렵이다. 한 인터뷰에서 심경을 밝혔다.

“돈에 크게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돈 이전에 난 운동선수다. 내 직업이다. 돈보다 다른 중요한 가치들이 있다. 내가 뛸 수 있는 환경과 많은 경기에 나가고 싶은 것이다. 선수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돈보다 선수로서 중요한 가치에 중점을 두고 선수생활을 해왔다.”

비슷한 말이 기억난다. 시간을 조금 뒤로 돌리자. 2014년 초겨울이다. 정확하게는 11월 26일이었다.

밤까지 이어지던 마라톤 미팅이 끝났다.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딜은 깨졌다. FA 우선협상 마감일이었다. 결국 데뷔한 팀을 등지는 일이 됐다. 13년간 입었던 푸른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당시는 지금보다 시장이 훨씬 좋았다. 윤성환이 80억, 안지만이 65억에 사인했을 때다.

그래서 돈이 문제였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스스로 밝힌 이유는 달랐다. 금액이나 기간같은 핵심 조건은 큰 차이가 없었다. 터무니 없이 쎄게 부르지도 않았고, 구단도 심하게 후려치려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해피엔딩이 아니었다.

본인의 주장은 ‘기회’였다. 그 때만해도 내리막이 뚜렷했다. 존재감이 별로였다. “며칠 동안 수없이 고민했다. 13년간이나 정들었던 팀인데 오죽하겠나. 그런데 결론은 하나였다. 여기(삼성)에 있으면 그냥 올해처럼 별 역할도 없이 어영부영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야구 인생을 마무리하기 싫었다. 정말로 많이 던질 기회가 있는 곳을 찾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곧 32세 시즌을 맞게 되는 불펜 투수의 번민이 엿보였다.

마치 데자뷰 같다. 4년 전과 이번 겨울이 너무 비슷하다. ‘기회’ ‘존재감’ 같은 키워드가 등장했다. 원 소속팀을 뛰쳐나오는 명분이었다. 재취업 기간마저 똑같다. 길지 않았다. 딱 이틀이었다. 그 때도 우선협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이글스에서 계약서가 날아왔다.

대전행이 결정된 뒤 누군가 물었다. ‘3년 만의 두 자릿수 홀드를 기대해도 되겠나.’ 숨도 안 쉬고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물론이다. 다시 하고 싶다. 후회없이 한 번 던지고 싶다.”

대치 상황의 인질이 된 불편함

2015년. 그가 사인한 팀은 예사롭지 않았다. 한 겨울인데 펄펄 끓고 있었다. 온 세상의 관심이 쏟아졌다. 야신의 강림이 모든 뉴스를 뒤덮을 때였다.

새로 온 47번에 대한 신임 감독의 멘트는 덤덤했다. “투수 하나라도 필요하지.” 소름 끼칠 정도의 보강은 아니라는 말이다. ‘있으면 뭐라도 보탬이 되겠지’ 정도다. 하긴 뭐. 그 때만해도 딱 그 만큼이 기대치였다.

그런데 아니었다. 막상 개막 후엔 180도 달라졌다. 시도 때도 없었다. 이길 때도, 질 때도. 1점 차에도, 7점 차에도 인터폰이 울렸다. 1이닝도, 때로는 3이닝도 지워야했다. 4월 한 달간 13번이나 호출됐다. 그나마 그건 절제한 편이다. 5월에는 14번, 6월에도 또다시 14번을 올라갔다. 이글스 파크의 마운드가 닳을 지경이었다.

“원 없이 던지고 싶다.” 늘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그게 현실이 됐다. 전반기에만 78.1이닝을 던졌다. 압도적인 1위였다. 무려 1400개가 넘는 투구수를 기록했다. 사람들은 눈만 마주치면 그렇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냐”고.

그 무렵은 그랬다. 대전 중구 일대는 식을 줄 몰랐다. 8회만 되면 어마어마한 함성이 전국을 뒤덮었다. ‘최강 한화’를 외치는 육성이었다. 기껏 4, 5등 하는 팀의 얘기가 온 나라를 들끓게 만들었다.

신드롬은 거대했다. 시청률, 뉴스 점유율, 조회수. 모든 숫자를 압도했다. 공중파 메인 뉴스의 단골 메뉴가 됐다. 그 화려한 중심에 그가 있었다. ‘불꽃 남자’였다.

하지만 불길은 오래가지 못했다. 맹렬함이 꺾일 무렵이다. 가려졌던 또다른 정서가 폭발했다. 엄청난 반감이었다. 야신의 방식에 대한 거부감과 못마땅함이었다. 구세대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비난의 크기는 거대했다. 찬사와 열광에 반비례했다.

논란 속에는 늘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정함과 가혹함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여론의 부딪힘은 치열하기 그지 없었다. 마치 인질 같았다. 뜨거운 대치 상태의 불편함은 온통 그의 몫이었다.

링거를 맞으며 마운드를 지키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또다시 미안함을 얘기한다. 4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편치 못하다.

원 소속팀이 곤란해진 게 마음 쓰인다. 팬들에게 등 돌린 것 같아 고개를 숙인다. 그 동안의 박수와 격려, 등 두드림을 외면한 것 같아 풀이 죽는다. 학교를 옮겨야 될 지 모를 유치원생, 초등학생 자녀들에게도 면목이 없다.

2015년 8월이었다. 그의 팀은 스러져갔다. 반복된 연패에 휘청거렸다. 불펜의 버팀목은 쉴 수 없었다. 링거를 맞으면서도 공을 잡아야 했다. 타자와 마주서야 했다. 참을 수 없는 무더움까지 괴롭혔다. 버티기 힘든 벼랑 끝이었다. 1구, 1구에 피가 말랐다. 공 하나 던질 때마다, 모자를 벗을 때마다…. 이미 흥건해진 온 몸에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사방으로 튀고, 뿌려졌다.

그걸로 됐다. 차고도 넘친다. 우리 모두가 기억한다. 기리 남을 투혼과 열정, 그리고 아낌없는 헌신이었다. 어떤 논란과 비판도 감히 범해서는 안되는 영역이다.

미안할 필요는 없다. 손가락질 받을 이유도 없다. 고개를 들라. 당당하게 마운드에 우뚝 서라. 그럴 자격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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